대-박. 이 프로덕션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그저 디아나 담라우가 나온다는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 영상물이 내 2017년 최고의 연출이 될지 몰랐다.  내가 본지 몇달 씩이나 지난 후기들을 꾸역꾸역 다시 써나간 것도 이 후기를 써야해서였다. 


난 <루치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도니체티의 대표작을 떠올리라고 하면 가장 먼저 <사랑의 묘약>이 떠오를 거고 그 뒤로 <돈 파스콸레>가 나올테다. 여기에 튜더 삼부작이 붙지 않을까.  그러다가 도니체티의 오페라 중 <묘약> 다음으로 자주 공연되는 것이 바로 <루치아>라는 걸 뒤늦게 떠올리게 된다. 나에게 <루치아>는 도니체티 보단 벨리니에 더 가까운 오페라다. <노르마>처럼 억울한 여자 주인공이 나와 <몽유병 여인>처럼 광란의 아리아를 부르는 것 빼고는 <루치아>에서 인상 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벨리니에 가깝다는 건 나와 거리가 있다는 것과 같았다. 영상으로도 보고 실제 공연장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작품의 매력이 도통 무엇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Il dolce suono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광란의 아리아도 특별히 애정이 가지 않았다.  공감이 잘 가지 않아서 그랬을 테다. 내게 벨 칸토 비극이란 건 그저 예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적당한 이야기를 갖다붇힌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연출은 <루치아>가 가지고 있는 극적인 긴장을 완벽하게 살려냈다. 헤어하임 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 것도 아니다. 그냥 있는 이야기에 몇가지 상상력을 추가하고 이 작품이 진짜 일어난 일처럼 표현한다.


"진짜" 라는 키워드가 중요하다. 무대는 진짜로 가득차있다. 이 영상을 보기 전에 수저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가짜 투성인 아이다를 봤었다. 그 공연을 보고 잠시 현타가 왔었다. 오페라란 몰까? 그리고 이 공연을 보고 치유됐다. 자기가 가짜라는 걸 티낼려고 안달이었던 수저우 아이다와 달리 이 공연에서는 무대 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자기가 진짜라고 외치고 있다. 모든 무대 장치, 소품들이 진짜인 건 물론이고 욕조의 물, 방의 촛불 까지 모두가 다 진짜다. 가수들의 표정도 진짜다. 루치아의 결혼식에 나타난 에드가르도가 짓는 배신감과 원망, 그리고 미련의 눈빛, 괴로워하는 루치아의 표정 모든 게 진짜다. 루치아가 광란의 아리아를 부를 때 무대에 서있는 합창단원의 눈마저 눈물로 촉촉해져있다. 이 모든 게 진짜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자살한 루치아 역시 숨을 쉬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흔들리는 촛불이 만들어내는 2막 결혼 연회 장면의 미장센은 렘브란트의 회화를 보는 느낌이다. 만약 저 촛불을 국오처럼 화재 위험때문에 LED로 교체하라고 했다면 연출가는 분노했을 거다. 그건 진짜 촛불이었어야만 했다. 진짜 촛불이 진짜 불을 태우며 무대를 채워줘야만 한다. 여기에 LED 촛불이 들어갔다면 이 모든 마법이 깨져버렸을 테다.


무엇보다 가장 진짜 같았던 장면은 루치아가 아르투로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루치아의 살인은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하며 중요한 사건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본 상 무대에서 직접 표현되지 않는다. 이 연출에서는 3막 1장, 엔리코와 에드가르도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루치아가 아르투로를 살해하는 걸 무대 한쪽에서 보여준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거의 오열하다시피 울었다. 난 루치아가 어떤 작품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상황인가. 어째서 루치아는 아르투로를 살해하는가. 루치아는 그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 상태였을까.

원작은 루치아의 살인을 라이몬도의 나레이션으로 들려준다. 이 과정에서 모든 디테일은 사라진다. 우리는 그저 "루치아가 미쳐서 사람을 죽였다"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루치아는 그저 정신이 나간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보통 미친 사람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관객은 미쳐버린 루치아를 구경거리 처럼 관람한다. "가족의 강요로 원치 않은 신랑과 결혼하여 그 남자를 죽이는 비극"이라는 요약은 이 이야기의 표면만 보여주며 단순화시킨다.

이 공연에서 루치아는 아르투로를 맨정신으로 살해한다. 그리고 여자가 건장한 남자를 살해한다는 것은, 토스카가 하는 것 처럼 스테이크 나이프로 푹 찌른다고 해결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하는 행동이며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봐야하는 일이다. 루치아, 그리고 루치아를 도와주는 알리사 두명은 아르투로의 숨을 끊어놓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린친다. 

루치아가 아르투로를 살해할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친년이 남자를 죽였다'라고 하는 프레임에서 상상하자면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앞에서 애교 피우다 갑자기 섬뜩하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칼로 목을 능숙하게 그어 처리하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마 현실과 거리가 있을 거다. 식칼 한번 들어보지 않았을 귀족 가문의 여자가 칼로 사람 목을 긋는다니, 불가능한 일이다. 루치아는 평범한 여자 사람이다. 연출은 루치아와 알리사가 아르투로가 오길 기다리며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루치아가 미쳤기 때문에 아르투로를 죽인 것이 아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그냥 '사람을 죽였다'라고 말하고 쓰는 것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 장면을 보며 왜 그렇게 울었던 걸까. 굳이 따지자면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장면이다. 루치아가 아르투로를 죽인다는 건 오페라 안 본 사람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무대 위에서 루치아와 알리사가 극한의 괴로움으로 아르투로의 몸에 칼을 꽂아넣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내가 그 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사실들은, 실제론 얼마나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던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여성의 고통을 알고 공감하는 것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루치아>는 지독하게 폭력적인 이야기다. 루치아를 둘러싼 모든 사람은 루치아를 파멸로 몰아세운다. 엔리코는 가족이라기 보다는 조폭에 가깝고 집안의 모든 사람은 루치아를 속이고 이용하는데 동조한다. 이 더러운 남성 사회에서 루치아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은 같은 여성인 알리사 뿐이며 (실제로 원작에 나오는 여성은 합창단 제외 루치아와 알리사 둘 뿐이다) 그 둘은 마지막 비명을 지르는 심경으로 아르투로를 살해한다. "그 집 여자가 강제로 결혼시켰더니 첫날밤에 신랑을 죽였대" 라고 가십처럼 전해지는 스코틀랜드의 실화 안에는 어쩌면 그런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었을 거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소식들이 그런 형태일 거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 살해" 라는 한줄 짜리 소식에는 그 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루치아의 살인은 극단에 몰린 피해자의 처절한 절규다.


여기에 원작에 없던 장치를 살짝 추가함으로서 극 전개에 필연적인 논리를 만들어냈다. 연출에서 꽤 중요한 장면이니 스포주의로 접어둠.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연출가가 누군지 몰라도 여자일 거라고 확신이 생겼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여성만이 느끼는 고통을 무대 위에 펼쳐놓으며 논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이건 남성 연출가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평소같았으면 연출이 누군지 모르고 보고 시작했어도 중간에 케이스 커버를 확인했겠지만, 집에서 보다보니 케이스를 멀리 놔둬 확인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담라우 나온다는 이야기만 듣고 바로 샀던 거라 지휘나 연출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연출가는 여성이었다. 바로 영국에서 연극 연출가로 이름을 날린 케이티 미첼Katie Mitchell이다.


미첼의 연출은 헨델 <알치나>와 조지 벤자민의 <Written on Skin>을 본적이 있다. 이것말고도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역시 영상이 있는데 어째 인터넷에 있는 두 파일 다 오디오가 너무 깨져서 듣다가 포기했었다. 특별한 연출가라고 생각은 했지만 갓갓 연출가인 줄은 몰랐다.

예전에 쓴 <알치나> 리뷰에서 미첼의 연기지도가 탁월하긴 하지만 간혹 음악과 상관없는 연기가 너무 많아 음악이 소외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때도 있다고 평했었다. 이 연출에서도 미첼은 비슷한 시도를 했다. 3막 살해 장면을 보여주다 보니 에드가르도와 엔리코의 듀엣은 관객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원래 이 듀엣은 잘려나가는 게 일상인 부분이다. 극 중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을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 극의 진행에 별 상관이 없다는 이유로 잘리는 이 부분 좀 써먹는 걸 비판할 사람은 없을 테다. 

미첼은 2막에서 엔리코와 노르만노, 라이몬도 세 명의 남자가 루치아를 협박하고 설득하는 장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루치아가 아르투로와 결혼하기로 한 것은 에드가르도가 배신했다는 거짓말 따위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이 집안 남자들의 폭력을 앞세운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연출에 나타난 페미니즘이 모두 미첼의 근거없는 상상에만 기반한 것도 아니다. 미첼은 대본 속에 나타나지만 명확히 표현되지 않는 두 개의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1막에 소개된 여자의 귀신과 루치아 어머니의 죽음이다. 미첼은 이 두명의 유령을 직접 무대 위에 올리며 루치아와 교감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의 유령을 굳이 무대 위에 유치하게 보여줄까 싶었다. 하지만 미첼은 이 두명의 인물이 시사하는 바가 절대 적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다. 1막에서 루치아가 여자 유령 이야기를 하며, 여기에 억울하게 죽은 여자가 묻혔다는 이야기와 루치아가 그 유령을 본다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 루치아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존재다. 그런데 이 여자가 왜 죽었나? 나는 당연히 루치아와 비슷한 운명으로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암시'로서의 기능이 더 분명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대본에 나온 바에 의하면 여자는 질투심에 눈 먼 자신의 연인에 의해 살해됐다. 실제로 루치아와 닮은 구석은 거의 없다. 연인을 잃고 자살한 것도 아니고 원치 않은 결혼을 한 것도 아니며 오해가 생겨 연인이 자신을 떠났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죽은 여인과 루치아의 공통점은 오로지 하나, 남성의 폭력에 의한 피해자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루치아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은 왜 중요한가? 이 작품에는 루치아와 알리사를 제외한 다른 여성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엔리코와 루치아 가문에는 현재 별다른 여성 가족이 없는 셈이다. 어머니가 언제 죽었는가? 라이몬도는 1막 첫장면에서 그게 최근이라고 설명한다. 이 길지 않은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죽음은 상당히 여러번 언급된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상황이 왜 그렇게 중요하나? 정말로 루치아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빠져 있는가? 아니, 루치아는 자신의 입으로 한번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루치아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그렇게 큰 사건은 아닌 것 같아보인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중요했을까?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바로 엔리코에게 중요했을 거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엔리코가 아르투로와 루치아의 결혼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루치아를 보호해줄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테다. 엔리코가 결혼을 추진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마리아의 여왕 즉위이지만, 그렇게 계획을 세웠더라도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은 실행하지 못했을 거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이 가설이라면 루치아의 어머니는 이 남성위주의 가족에서 루치아를 보호해줄 수 있었던 마지막 여성인 셈이다.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바라본 결과이긴 하지만, 이런 해석이 설득력이 부족해보이진 않는다. 미첼이 살려놓은 대본의 디테일들을 들여다보면, 어쩌면 도니체티나 대본가 캄마라노가 대놓고 억압받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가지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월터 스콧의 원작 소설에서 이 강제 결혼을 계획하는 사람은 루치아의 오빠가 아니라 루치아의 어머니다! 삼마라노와 도니체티가 어떤 이유에서 어머니를 오빠로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소프라노 역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대립역할을 메조 소프라노인 어머니보다 바리톤인 오빠로 맞췄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래도 어쩌면 진짜 둘다 페미 전사라 프레임을 확실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미첼이 알리사라는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도 탁월하다. 알리사는 루치아의 고통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며 루치아와 함께 여성으로서 고통을 공유하고 함께 범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알리사는 1막에서부터 루치아와 함께 있다. 아르투로를 살해할 때 루치아 보다 먼저 침실에 들어가 숨죽여 기다리는 알리사의 표정은 이 지독하고 외로운 세상에서 연민과 동정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2막에서 엔리코가 루치아를 겁박하는 장면에서 루치아는 “내 눈물을 보고 내 마음을 읽는 당신(너)”이라고 노래한다. 원래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말하는 내용이지만, 미첼은 이걸 알리사를 보고 말하게 한다. 알리사는 루치아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비는 기도와 한탄보다, 바로 옆에서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는 사람에게 한탄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고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각 막의 무대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모든 무대 배경과 의상은 매우 사실적이다. 미첼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이야 말로 실화를 기반으로 한 몇 안되는 오페라이지 않는가. 어떤 점에서도 오페라 특유의 어색한 동선과 연기가 나오지 않게 노력한다. 죽은 사람이 숨을 쉬느라 조금씩 움직이는 것 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루치아가 죽은 뒤에도 담라우는 숨을 열심히 참는 듯 한데, 이 정도로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영상에서는 아예 프레임을 정지시켜 버린다. 화면이 정지된 게 티가 나서 오히려 몰입이 깨졌기에 이 부분은 아쉬웠다. 영상물의 화면을 정지시킨 게 영상 편집과정의 선택이었는지 미첼의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죽은 인물이 숨 쉰다고 움직이는 것 마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아할 만큼 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가수들의 연기까지 잘 받쳐준다. 담라우의 연기 욕심은 더 설명할 것도 없다. 미첼 역시 인터뷰에서 담라우가 캐스팅 된 건 축복이라며 하늘에서 내려온 것 처럼 노래하는 동시에 평생 뉴욕에서 연기를 공부한 사람 처럼 연기를 해낼 수 있다고 극찬한다. 담라우의 연기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종종 과장된 듯한, 아니면 “연기를 하고 있는 담라우” 느낌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어려운 노래를 부르며 무대 위에 계속 나와 하드코어한 연기를 모두 수행하는 것 자체가 보통 가수로는 엄두도 못낼 도전이다. 담라우의 다채로운 표정은 다른 남성 캐릭터들의 평면적인 표정과 대비되며 극을 이끌어간다. 그렇게 많은 감정을 다 표현해내고 쏟아내는 걸 담라우 말고 다른 가수가 더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담라우 덕택에 연출이 빛났고, 연출 덕택에 담라우가 빛났다.


찰스 카스트로노보는 잘 생겼다. 자신의 잘 생김을 무기 삼아 촉촉한 눈망울로 루치아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연기가 완성된다. 베차와 처럼 오버하지는 않으면서 진지한 연기를 보여준다. 지휘자를 곁눈질 하지 않고 인물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것 만으로도 관객을 몰입시키는데 충분하다. 거기다 노래도 잘 한다. 

연기 못 한다고 생각한 루도빅 테지에도 딱딱하고 근엄한 건 잘 해낸다. 다르칸젤로가 왕을 맡으면 잘 어울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테지에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냉혈한 표정으로 루치아를 설득하고 있으면 조폭이 따로 없다.


영상을 본 지 오래돼서 각각의 노래가 어땠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담라우는 연출과 케미가 잘 맞아 노래에서도 이득을 본 느낌이고, 카스트로노보는 완전히 반할 만큼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줬다. 토리노 파우스트에서도 괜찮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괜찮다 정도를 넘어 훌륭하다는 인상이었다. 지휘를 맡은 다니엘 오렌은 대구 토스카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만큼 혈기 넘치는 지휘는 아니지만, 거슬릴 것 없는 반주였다.

이 연출을 보고나서 케이티 미첼이 정말 갓갓 연출가라는 생각에 전에 사두고 읽지 못한 책을 집어들었다. 바로 케이티 미첼이 직접 쓴 <연출가의 기술>이라는 책이다. 작품 분석과 리허설 진행에서 공연까지 세세한 점들 까지 자세한 과정이 담긴 책이다. 예시 작품을 하나 잡고 설명하는데 바로 체호프의 <갈매기>다. 딱 하나 알고 있는 체호프 희곡이 갈매기라 신나는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미첼이 어떻게 이런 프로덕션을 만들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미첼은 텍스트의 모든 사건을 뜯어보며 자세히 분석한다. 특히나 놓치지 않는 게 바로 희곡 안에서 벌어지지 않는, 희곡 전이나 막간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정리다. 여기에 디테일에 대한 조사도 놀랍다. <갈매기>에서 소린의 영지가 러시아 어디쯤인지, 영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당시 일반적인 영지의 크기는 어땠는지, 영지 관리인의 월급은 얼마나 되었는지, 소설에 나온 23루블은 지금 돈으로 어느 정도인지, 당시 학교 교사의 월급이 어느 정도였는지, 당시 코담배를 피는 것이 여자에게 얼마나 흔한 일이었는지, 아르카지나가 <햄릿>의 거트루드를 연기한 적이 있는지 등 인물과 이 세계에 관련된 사실과 그에 대한 질문의 목록을 작성해간다. 극 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목록, 인물들의 의도, 각 인물들의 전기, 막과 장면의 제목, 그리고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작품의 주제를 찾아가는 것 까지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연기 지도의 디테일도 놀랍다. 미첼은 배우가 극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하고 서로 같은 이미지를 공유하게 만든다. 예컨데 무대에 표현되지 않은 배경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이 집안의 구조에 대해서도 같은 이미지를 갖도록 훈련시킨다. 연기의 템포가 늦다고 지적하는 것 대신, 등장인물이 30분 뒤에 기차를 타러 떠나야 한다는 걸 명심하라는 식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어떻게 지적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리허설 할 때와 닮은 점들이 상당히 많다. 재밌는 건 배우가 배역을 자기 치료로 활용하는 걸 극도로 경계해야한다는 걸 여러번 강조한다는 점이다. 배우가 연극에 사적인 경험을 너무 많이 끌어다 쓰고 연출가가 배우의 상담사가 되는 것을 꼭 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희곡을 분석하는 과정의 설명은 재미있지만 대체로 뒤로 갈 수록 실무적인 내용들이 많고 자세한 설명보다는 일방적인 지시가 많아 평범한 관객1의 입장에서 읽기에는 조금 지루한 면이 있다. 연습실에 다과를 준비할 때 첫날은 몇명이 돈을 모아서 사고 그 다음부터는 연습실에 드나드는 모든 스탭과 배우들에게 함께 걷어 사라는 설명도 있다. 


 

극찬받아 마땅한 연출이다. 연기와 무대의 디테일로 오페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작품의 내용을 세세하게 분석하여 합리적이며 설득력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탁월한 연출을 보면 작품에 눈이 활짝 뜨이며 이 작품은 이렇게 연출되어야만 한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루치아>는 루치아에 대한 이야기이고, 루치아의 일생은 페미니즘으로 볼 때 가장 명확한 현실이 된다. 나는 이 오페라의 내용을, 루치아의 고통을, 여자의 고통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케이티 미첼은 그게 아니라고 보여줬다.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 있던 Top 5 연출에서 무엇을 빼야할지 고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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