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지로 상처받은 마음 포기로 은혜받고 왔습니다.



올 한해 동인 한국에서 공연되는 모든 오페라 공연 중 가장 뛰어난 공연은 아마 이 공연이 될 것 같다. 이 위대한 작품의 사실상 한국 초연이며 이 작품을 소화하는데 가장 훌륭한 가수들이 모였다.


거슈윈의 포기와 베스는 아주 유명한 오페라라 오페라를 잘 모르던 시절에도 이름만은 친숙한 작품이었다. 여기저기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지만 정작 음반이나 영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이 작품의 영상을 발매했을 때 주저없이 구매했다. 그리고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이 작품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아시아전당에서 포기와 베스를 올린다고 했을 때 주저없이 예매했다. 공연이 언제인지도 별 생각 없이 일단 예매해놓고 기다렸다. 


내가 왜 이 거슈윈의 유일한 오페라에 첫눈에 반했었는지 오늘 공연이 제대로 보여줬다. 빼어난 선율, 뿜어져 나오는 활력,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담고 있다는 점. 거슈윈은 미국의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문화와 감성을 정확하게 그들의 언어, 그리고 자신의 음악으로 표현했다.


꼭 흑인 가수가 불러야한다는 거슈윈 재단의 요구사항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은 아프리카계 출연진들이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오텔로를 아프리카인이 부를 필요가 없고 나비부인을 동양인이 부를 필요가 없는 것과는 맥락이 다르다. 특정 배경과 강하게 결합돼있는 오페라들이 있다. 예컨데 투란도트, 나비부인, 아이다 처럼. 그런 작품들이 배경을 단순히 미지의 흥미로운 세계 정도로 소비하고 있는 반면, 포기와 베스는 오로지 미국 아프리카인들의 문화 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푸치니가 동양풍의 선율을 넣은것과 거슈윈이 영가를 차용한 것은 출발점 부터가 다르다.


포기와 베스를 관통하는 주제들이 있다. 약속의 땅과 주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모든 고난과 역경을 노래 예배로 승화시키는 것. 극의 배경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아니라면 도저히 톱니바퀴가 돌아갈 것 같지 않는다. 극의 결말인 베스의 타락과 포기의 굳은 결심은 이러한 맥락 위에서만 설득력을 갖게 된다. 베스의 선택은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처한 현실, 그리고 포기가 좌절하지 않은 것 역시 그들의 특별한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렸을 때 가족 모두가 시카고에서 1달간 지냈던 적이 있다. 어릴 적 기억들 중 유독 그 한달간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 중에서도 잘 기억나는 것은 흑인 교회 예배에 참석했던 것이다. 평생 교회라곤 그때와 훈련소에서 간 것 딱 두번 뿐이라 무언가 비교하긴 어렵지만, 그 때 흑인 교회 예배에서 가스펠의 향연에 컬처 쇼크를 받았다. 노래 안에 주님 있고 주님 안에 노래있는, 삼위일체 중에 하나는 분명이 음악이었을 것 같은 그런 광경이었다.


포기와 베스에 계속 나오는 기도 장면은 실제 삶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그 순간 무대 위 인물들은 오페라라서 노래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노래로 모든 걸 이야기하고 표현하고 있다. 이 점에서 포기와 베스는 이 전의 어느 작품보다도 오페라에 가장 적합한 배경을 고른 셈이다. 오페라를 처음 만들었던 르네상스 이탈리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이, 혹은 신화의 인물들이 모두 노래로 이야기했을 거라고 상상했을 뿐이지만, 거슈윈은 한 공동체가 노래로 의사소통을 하는 장면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고, 그 기도의 힘은 바로 노래의 힘이었다.



케이프타운 오페라는 한동안 미국의 상징이었던 이 오페라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와 정서가 어떻게 현대의 남아공 사람들에게 이어져 있는가는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다. 그것을 단순히 ‘흑인 문화’로 퉁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역 까지도 모두 상당한 가창을 들려주는 출연진, 여기에 확실히 주역급 실력을 자랑한 포기, 무대에서 모두 개개의 고유한 인물이 되어 에너지를 내뿜으면서도 탁월한 앙상블을 보여준 합창단 까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중간중간 나온 안무들은 어색하지 않고 음악과 극의 상황에 잘 녹아들었으며 두명의 무용 연기자들은 무대를 제대로 장악했다.


단 하나 아쉬운 건 스포르팅 라이프 역의 가수가 유독 성량이 작았다는 점이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신나는 노래인 It ain’t necessarily so 에서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합창단이 강렬한 초고음까지 소화하며 응창을 훌륭하게 처리해줬다. 


합창단, 혹은 앙상블 단원들은 노래 안무를 자연스럽게 처리했다. 처음에는 누가 무용수고 누가 합창단인지 구별이 안 갔다. 보다보니 무용수는 단 두명 뿐이었다. 심지어 그 무용수 중 한명은 립싱크인지 실제로 가사를 같이 읊는 건지 춤추며 입까지 따라했다. 이날 합창단이 보여준 모습을 표현하는데에는 역시 ’소울’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포기의 노래는 정말 포기 그 자체였다. 저 가수는 본투비 포기란 말인가. 선해보이는 얼굴, 강직한 목소리, 흔들림없는 믿음 만큼 굳건한 노래. 포기가 주님을 찬양하는 부분은 어느 종교곡보다도 더 설득력 있고 신실했다. 연기의 경지를 넘어서, 포기가 주님의 존재를 믿는 만큼이나 내가 저 가수를 포기 그 자체라고 믿게 만들었다. 1막 장례식 장면의 노래는 정말 진실되고 숭고한 감정이라 울컥하게 만들었다.


여러 장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직접 들었을 때 더 특별했던 것은 폭풍우가 올 때 모두 기도하는 장면이었다. 기도 소리의 클러스터를 앙상블 가수들이 서로 뚫고 나오는 모습이나, 포르티시모에서 포르티시시모로 팽창하는 순간은 듣는 이를 완전히 압도했다. 


쿱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걱정했던 것보다 중요한 장면을 잘 처리해줬고, 투박한 건 있었지만 특히 관악기 및 타악기 주자들이 이 작품에 상당한 애정이 있다는 게 연주에서 느껴졌다. 커튼콜 초반부에 가수들에게 가장 환호를 많이 보낸 건 바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었다.


연출은 세련되지 못한 점들이 조금 있었다. 가수들이 노래 부를 때 너무 정직하게 정중앙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안무 구성이 좋았고 좁은 무대를 효과적으로 채워냈다. 마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는 디테일도 좋았다. 


아시아 문화전당은 작년 코미셰오퍼 마술피리에 이어서 이렇게 훌륭한 프로덕션을 또 수입해왔다. 도대체 내부에 어떤 오페라 고수가 있길래 이런 알짜배기 기획을 할 수 있나 궁금하다. 극장 음향이나 오케스트라가 더 좋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기획이 매년 한번 씩만 빠짐없이 있어도 기쁘겠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