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가놈 다시는 보지 말자.



갈까말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표는 예매해놨다. 거기다 황혼은 나도 여태 한번밖에 보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고보니 이 땅에서 지크프리트와 황혼이 연주된 것은 딱 한번 뿐이었는데 그게 바로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였다. 기껏 한국에서 나와 유럽에서 바그너 좀 들어볼려고 하니까 또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가 날 기다리고 있다. 한국인에게 허락된 황혼은 오직 게르기예프 뿐이란 말입니까.....


공연장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그 연주가 겔겝의 반주보다 훨씬 음악적이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연주하는걸 맛깔나게 하려고 노력했고 최소한 자기가 뭘 연주하고 있는건지는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름 파리 바그네리안들한테도 큰 이슈인지 공연장 근처에서부터 바이로이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제 지크프리트에서도 환호성이 상당히 많이 나왔는데, 겔겝이 파리에서 인기가 괜찮나보다.

전날 공연이 자정이 넘어서 끝났고 이날 공연이 16시 30분에 시작했으니 가수들이나 단원들이나 16시간 정도의 휴식 뒤에 다시 5시간 짜리 작품을 연주하는 셈이다.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에서 아침 11시에 구레의 노래 하겠다고 했다가 말아먹은 대목이 생각났다. 잠깐 딴 소리지만 그때 인상깊게 봤던 젊은 트럼펫 수석은 이번에 베를린필 정식 단원이 됐다고 한다.

처음 캐스팅을 봤을 때는 주요 캐스팅이 다 바뀌는 걸로 알았는데 알고보니 이틀다 지크프리트가 같은 가수다. 전날 반더러가 군터를 맡고 브륀힐데는 구트루네를 맡고, 파프너는 하겐을 맡는다. 세 역할 다 이틀 중 하나는 비중이 크지 않아 다행이지만 지크프리트를 이틀 연속으로부르는 건 좀 많이 끔찍할 것 같다.

쿠렌치스의 공연을 들으면서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 ‘어떤 디테일 때문에 쿠렌치스의 음악이 특별한가 였다면 게르기예프의 경우 도대체 뭐 때문에 게르기옢의 음악은 이토록 지루하게 들리는가가 내 감상 포인트였다.

이튿날이 되니 더 여러개가 보였다. 일단 현악기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Ring ohne Streiche인가! 7-6-5-4-3 풀트였는데, 모두 50명이다. 관악기가 33~5명 정도였으니 일반적인 관현악 공연이라면 꽤 어색한 조합이다. 물론 저기서 현악기가 20명 정도 더 늘어난다고 해서 많은 것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현악 소리가 너무 작으니 편성도 맘에 안든다.

덕분에 노른 장면에서 실을 엮는 모티프가 들리는 둥 마는 둥 해서 핵노잼이 뭔지 보여줬다.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현악기가 추가된 윈드밴드 느낌이다. 베이스 수석이 일당백의 기백으로 엄청난 연주를 들려줬지만 (정말 그사람 활소리가 멀리서도 정확히 들렸다) 안타깝게도 혼자선 역부족이었다.

겔가놈의 반주는 템포도 일정하고 다이나믹도 일정하다. 그 유연성 없는 뻣뻣함이란 마치 끔찍한 요통을 유발하는 단축된 햄스트링 마냥 고통스러운 존재였다. 가사와 극의 내용에 상관없이 막가파로 가는 겔가를 보고 있자니 가수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쓰다보니 생각난건데 전날 지크프리트 혼콜만 하더라도 얼마나 신경 안쓰는지 보일 정도였다. 호른이 무슨 군악대마냥 박자랑 음정만 신경쓰는데 어떠한 방향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그런 수준이었다.

브륀힐데 역을 맡은 새 가수는 어제 가수보다 좀더 일반적인 바그너 소프라노의 느낌이었다. 목소리도 상당히 어두운 것이 러시아 소프라노 특유의 음색이 보였으며 비브라토도 더 폭넓은 편이었다. 지크프리트 역의 베쿠아는 이틀연속 부르는 것이 조금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서막이 끝나고 기비훙 삼남매가 나오는데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니키친이 군터고 어제 브륀힐데였던 스티키나가 구트루네, 거기다 미하일 페트렌코가 하겐을 맡았다. 페트렌코의 바그너는 훈딩 정도만 듣고 하겐은 처음 들어봤는데, 괴물같은 힘이 넘치는 하겐이었다. 군터와 구트루네는 자주 맡는 역이 아니라서인지 어제에 비해 별로 돋보이지 않았다.

예상했던대로 섬세함이 필요한 부분들, 서막이라든가 발트라우트 장면이라든가 2막 1장 같은 부분은 지루하기 짝이없었다. 그냥 빨리 지나가는걸 목표로 하는게 느껴졌다. 황혼이 이렇게 재미없는 작품이었단 말인가.

여기에 오케스트라가 나사가 빠진게 어제처럼 1막과 2막 피날레가 앙상블이 무너졌다. 아니 뭐 얼마나 자주 나오는 투티라고 이걸 못 합니까..

그러다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왔는데 바로 2막 2장에서 하겐이 기비훙들을 부르는 호이호 장면이다. 아 이게 바로 겔겝 스타일이구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엄청나게 내지르는데 나름 프레이징도 훌륭하고 음향적 쾌감도 확실했다. 공연 내내 스코어에 머리박고 있던 겔가도 움직이면서 뭔가 지시다운 지시를 했다. 포르테가 세개 정도는 붙어있어야 연습을 하는거였나 보다. 아마 악보계한테 시켜서 포르테 내림차순으로 리허설 레터 정렬해서 그 순서대로 연습할 거다.

겔가놈이 무진장 공들인게 티가 나는 부분이 바로 장송행진곡과 마지막 데몰리션 장면이었다. 장송행진곡에서 숄티랑 맞짱 뜰만큼 금관을 쥐어짜내더니 필하모니를 폭발시킬 기세로 연주했다.

겔겝 말러2번에 대해 ‘MB식 부활이다’라고, 포크레인으로 땅파서 시체를 땅에 묻은 다음에 강제로 부활시키는 꼴이다라는 고클 평이 있었는데 딱 들어맞았다. 아니 지금까지 지크프리트한테 신경 하나 안써주더니 언제 그렇게 슬퍼했다고 비장미 쩌는건데ㅋㅋㅋㅋㅋㅋ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 낙태 반대하는 사람들이 태아 생명엔 관심 더럽게 많으면서 태어난 뒤의 삶엔 신경 하나도 안쓴다는 비판이 생각났다.

데몰리션 장면에서도 발할라에 핵폭탄이라도 떨어뜨리는 줄 알았다. 발할라가 무너지는 것에서 어떤 숭고함, 혁명적인 것, 구질서의 파괴 같은 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동네양아치들이 아무 생각 없이 신나서 가게 유리창 부수고 있는 느낌이었다. 겔겝은 분명 장송행진곡이랑 피날레 몇분 해보겠다고 반지 14시간을 연주하고 있는게 분명해보였다.


뮌헨 필이랑 내한해서 말러 1번 연주한다는데 어떻게 연주할지 눈에 뻔히 보일 정도다. 내한해서도 아마 포르티시시모만 리허설해보고 공연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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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연주했는데 엄청난 기립박수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다. 도대체 조르당이 평소에 파리 관객들한테 어떤 바그너를 들려줬길래 마지막에 좀 때려부숴준다고 이정도 환호가 나오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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