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마이어베어가 잘못했다.



파리 오페라의 위그노 교도 신작 프리미어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설렜다. 여기에 캐스팅도 훌륭했다. 디아나 담라우, 브라이언 히멜, 에르모넬라 야호가 주연 3인방을 맡았고 지휘는 미켈레 마리오티였다. 히멜은 실연에서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데 프랑스 오페라, 특히 그랑 오페라의 주인공으로서는 현존 최고의 가수로 꼽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가수다. 담라우 역시 가곡 리사이틀 뿐이어서 오페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아주 설렜다. 미켈레 마리오티 역시 로시니가 훌륭한 지휘자라 꼭 한번 보고 싶은 지휘자였다.

연출을 맡은 안드레아스 크리겐부르크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뮌헨 반지도 연출하는 등 상당히 잘 나가는 연출가였다.

처음 공연을 알아볼 땐 겔겝 반지와 물르당 트졸데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위그노 공연이 최고의 기대작이었다. 캐스팅 페이지 인쇄해서 책상 옆에 붙여놓고 연구하다가 한번씩 쳐다보며 힘을 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조금씩 흐뜨러지기 시작했다.

먼저 위그노 교도를 예습해보니 기대와 달리 핵노잼 작품이었다. 바그너가 마이어베어 까는 게 그냥 너무 잘나가는 것에 대한 질투 + 어차피 자기 작품 말고는 뭐든 까는 인간이라 그러려는 건가 싶었다. 그랑 오페라가 요즘 시대에 잊혀진 것 역시 내용이 유행에 뒤떨어지거나 그저 공연을 올리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위그노 교도는 정말 답이 안 나오는 노잼 작품이다. 내가 웬만해서는 내가 작품이랑 안맞나 보다라고 생각하지 작품 자체가 구리다는 생각은 안 하는데, 이건 정말 못난 작품이다. 오케스트라 반주는 형편없고 극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도 못한다. 4막에서 위그노 학살을 계획할때 반복되는 현악기의 패턴은 무서움을 표현하려는 초등학생의 흉내내기 수준이다.
노래 역시 같은 선율의 의미없는 반복인데, 비슷한 이유로 까이는 슈베르트와는 선율의 급이 다르다. 극의 기승전결도 부족해서 뭔가 발전이 되는 건가 싶으면 끝나버린다. 리브레토 중에서도 살려볼만한 장면이 있는데 음악적으로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한다.

이 때부터 위그노 교도에 대한 기대는 어느정도 접어두고 그냥 담라우랑 히멜을 직접 본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 런. 데.
출국전에 예습을 하다가 우르뱅 캐스팅이 궁금해서 파리 오페라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근데.... 담라우 이름이 없네? 담라우그 마르게리트 여왕 아니었나? 다른 역할이었나? 다른 역할 이름에도 없는데? 뭐죠? 응?

구글링 해보니 8월에 하차를 결정했고 리제트 오로페사가 대신 캐스팅됐다고 한다.

아니 내가 담라우 보고싶어서 이 노잼 작품 보러가는건데 흐그흑ㅎㄱ
그래도 나름 머리속으로 행복회로를 돌렸다. 솔직히 담라우가 요새 콜로라투라를 잘하는 건 아니지. 담라우가 억지로 불러봤자 썩 잘 하지도 못하고 나도 괜히 담라우 망가지는 거 보고 가슴 아파했을 거다. 새로운 소프라노가 그래도 로시니를 잘 한다고 하니 잘 할거라 기대하자. 그리고 어차피 마르게리트는 2막 빼면 특별히 비중있는 역할도 아니다. 양덕들 포럼에서도 마르게리트가 바뀌는 건 정도는 괜찮다, 제일 어렵고 중요한 역할은 역시 라울 역이다 라는 댓글들이 있었다.

그 런 데 말입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출국이 이틀 전날이었나. 히멜이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한다고..... 그래서 강요셉이 대타로 투입된다는 뉴스가 떴다.

아니 ㅇㄴㅁㄹㅇㄴㄹㅇㄴㅁㄹ ㅎ
흑흐그흑흑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작년에 파리 오페라좀 깠다고 너희들 나한테 이러기냐ㅠㅠ
강요셉 씨 역시 훌륭한 테너지만 그래도 난 히멜이 너무 듣고싶었다. 거기에 아무리 강요셉이라고 해도 공연이 10일도 남지 않았는데 대타 투입이라니, 제대로 소화해내기 어려운 일정이었다. 오페라베이스에 따르면 마지막 위그노 교도 공연이 2016-17 시즌이었기 때문에 시간 간격도 꽤 있다. 짧은 기간 안에 최고의 모습을 기대할 순 없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은 연출이었다. 파리 오페라가 82년만에 올리는 작품인데다가 19세기 파리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품이었으니 그래도 기합좀 팍팍 넣어서 만들지 않겠냐는 게 내 기대였다.


그렇게 공연이 시작됐다. 생각해보니 바스티유 공연은 세번 연속 중앙블럭 사이드 폴딩 좌석을 선택했다. 이 극장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 엄두가 아직 나지 않는다.



마리오티가 진부한 서곡을 붙잡고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사이 연출은 이것이 2060년 파리의 모습이라고 약을 파는 자막을 내보냈다. 사람들 순간 웅성웅성. 근데 그렇다고 진짜 미래 컨셉도 아니고 그냥 과거 복식의 추상화 + 현대화가 된것 뿐이었다.

1막의 무대는 격자처럼 구분지어진 공간이었다. 무대 전체가 하얀 프레임 처럼 둘러쌓여있고 모든 무대 구조물이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가톨릭 귀족 합창단들이 빨간색 보라색 같은 원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일단 비주얼은 글쎄올시다.


강요셉 라울이 등장했다. 혼자 복장도 다르고 동양인이다보니 가톨릭 사이에 들어온 신교도의 마이너리티가 아주 잘 살아났다. 히멜을 기대했지만 그래도 마음 속 전심으로 강요셉을 응원했다.

대체로 의미없는 1막의 앞부분이 흘러가고 라울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아리아가 시작됐다. 먼저 비올라 솔로를 칭찬하고 넘어가야겠다. 처음 이 노래를 듣고 마이어베어는 도대체 반주 쓰기가 얼마나 귀찮았으면 비올라 솔로로 때우나 싶었다. 하지만 비올라 솔로가 워낙 아름다운 음색과 프레이징으로 뻗어나와 감탄했다.

하지만 라울의 아리아는 테너에게 너무 살인적이었다. 끝도 없는 고음 행진에 고음이 제대로 나지 않아 음정이 나가거나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앞줄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 제대로 해냈다면 폭풍같은 박수가 나왔겠지만 박수는 별로 나오지 않앗다.



그렇게 가슴이 아픈 와중에 마르셀의 전쟁 노래가 이어졌다. 이 아리아 전에는 그동안 예습하면서 한번도 못들었던 것 같은 마르셀의 찬송가 파트도 있었다. 뒤이어지는 전쟁노래는 마르셀이 부르는 아리아 중 가장 유명한 노래일텐데, 니콜라 테스테가 가사를 까먹어서 첫 프레이즈를 못 불렀다. 어이구야 이렇게 총체적 난국 가나요.. 아니 담라우는 남편 같이 끼워파셨으면 끝까지 책임 지셔야죠ㅠㅠ 그래도 테스테는 이후로 무난하게 안정적인 모습으로 1인분은 소화해냈다.



무언가 어수선한 1막을 정리한 것은 우르뱅역의 카린 드샤예Karine Deshayes였다. 대단한 기교와 메조 소프라노다운 부드러운 음색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조금도 어렵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부르는데 바스티유 디버프 역시 피해가는 모습이었다.

합창단은 빠른템포에서 발음이 조금씩 안맞는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괜찮았다. 1막 합창이 유난히 빨랐는데 그 뒤로 나오는 모든 합창은 아주 완성도 높았다.


2막을 책임진 건 마르게리트 역의 오로페사였다. 이 공연 보고 담라우를 아쉬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다. 오로페사는 가벼운 목소리와 여유넘치는 모습으로 콜로라투라를 소화해냈다. 프레이징도 자연스러운데다 뻗어나가는 고음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기에 아리아의 스트레타 부분에선 합창단과 다른 솔로들 역시 분위기를 잘 깔아줬다. 끝나고 나서 거의 1분 가까운 박수가 이어졌다.
우르뱅과 둘이 고음을 한번씩 주고받는 대목에서는 둘다 말도 안되게 깔끔하게 찔러줘서 이런 게 가능하나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오늘 공연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바로 2막이었다. 커튼콜에서도 역시 폭발적인 환호를 받았다.





에르모넬랴 야호는 특유의 사연있는 듯한 목소리 덕에 행복할 수가 없는 비운의 주인공 발렝탕에 잘 어울렸다. 하지만 성량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고, 이 홀에서는 목소리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4막의 아리아는 절절하게 소화해냈다.

강요셉은 1막의 난조 이후 2막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는 듯 했으나 4막에서 또 잔혹한 고음 행진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고음이 잘나오는 순간도 있었지만 잘 안풀리는 순간도 그만큼 많았다.

기타 배역에서 생브리 백작과 나바르는 무난했다. 저 둘은 잘 불러봤자 티가 나기 어려운 배역이라고 생각한다.

합창단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역 몇명을 빼놓으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게 합창단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비중이 컸는데 많은 인원임에도 상당히 집중력있는 소리를 만들었다.

마리오티는 이 노잼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마르셀이 나올때마다 등장하는 상투적인 첼로 반주 역시 뉘앙스를 집어넣으려고 노력했고 각 막의 전주곡들도 악센트에 상당히 공을 들여서 듣는 맛이 있었다.



(왼쪽 세번째 보타이에 정장입은 남자가 연출가다. 인터미션 때 로비에 키크고 잘 빼입은 존잘러가 여러 사람이랑 이야기 하고 있길래 무슨 프랑스에서 유명한 영화배우인가 했는데 커튼콜 때 올라옴...)


연출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단적으로 말해 학민킴 연출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연출이 아무리 망해도 어떻게 그렇게 비교하냐고 따지실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런 악몽스런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1막에서 아무 의미없어 보이는 검은 무용수들과 하얗게 분칠한 웨이터들, 3막에서 칼싸움 하겠답시고 엄청 어색하게 대치하고 있는 모습들은 수준 이하였다. 특히 5막에서 가톨릭 병사들이 살육하는 장면에서 어정쩡한 동선은 국오 루살카 때 전기톱 병사들이 뛰어다니던 모습이 생각났다. 의상도 괜히 어정쩡한 복식이라 딱 국립오페라단 스타일이었다.

그 와중에 또 여성 상체노출을 2막에 목욕씬에 아주 적나라하게 넣었다. 객석이 술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 나도 와이프랑 옆에서 같이 봤으면 허벅지 10번 쯤 꼬집혔을 것 같다. 유럽 오페라 극장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여자 가슴인가 싶기도 하다가, 원래 마이어베어 원작부터 우르뱅이 목욕 장면을 놓쳐서 매우 아쉬워하는 걸로 해놨다. 역시 마이어베어가 이런 건 또 시대를 초월해나간다. 객석에서 우르뱅의 아쉬워하는 마음에 격하게 공감하듯 우르뱅의 노래에 웃음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바스티유 스케일에 맞는 거대한 무대를 만들어왔지만 무대의 활용이 부족했다. 3층의 격자무늬에서 무언가 공장같고 기계적인 것이 느껴지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단조롭기 짝이 없는 연출이었다.

디테일도 부족했다. 1막에서 마르셀이 술잔을 집어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멋지게 깨져야할 술잔이 안깨지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뒤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끝없이 돌고있는 술잔을 보고 있자니 무슨 인셉션인 줄ㅋㅋㅋㅋㅋㅋㅋㅋㅋ
4막에서 생브리 백작이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에서 네명의 남성 가수가 박자에 맞춰 칼을 뽑았다가 집어넣는 동작을 했는데, 네명이서 동작이 통일이 안돼 중구난방이었다. 어떤 사람은 칼 뽑는걸 잊고 있고 어떤 사람은 칼 집어넣는 걸 반박자 늦게 들어오고. 무슨 덤앤더머 보는 줄 알았다.

작중에 발렝탕은 남자한테 두번이나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는데, 2막에서 라울에게 한번 3막에서 아버지 생브리 백작에게 한번이다. 둘다 그 동작이 어색하기 짝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나 지금 파리에서 공연보고 있는 거 맞지...?

5막 장면에선 연출이 뭔가 멋있는 걸 보여주겠지 했는데 끝까지 안나왔다. 마지막에서 갑자기 하얀 무대에다가 핏물이 흘러내리는 프로젝션을 덮어씌웠다. 너무 진부해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종합하자면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사건이 너무 없었고, 시각적으로도 너무 추상적이라 호감이 가지 않았다. 연기의 디테일은 떨어졌고 큰 무대를 활용하는 동선도 허접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커튼골에서 연출가 크리겐부르크에게 상당히 많은 부잉이 나왔다.


킨리사이드가 앙브루아즈 토마 ‘햄릿’을 공연과 관련해 인터뷰에서 ‘모든 작품이 다 걸작일 순 없지만, 평범한 작품도 공연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올리면 관객들이 근사한 저녁을 보낼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걸로 기억한다. 나도 위그노 교도를 보러가며 딱 이정도를 기대했다. 아주 걸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파리 오페라가 자기들 자존심을 걸고 만들면 뭐 괜찮은 저녁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러기엔 이 작품이 너무나 노잼이었다. 합창단이 상당히 연습을 열심히 했겠지만, 공연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그저 합창단이 내는 소리가 아름다운 것 뿐이지 어떤 맥락에서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냥 합창단이 포르티시모로 화음을 내지르는 그 음향적 효과에 따른 감동이지, 음악적 의미에 따른 감동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고생해서 겨우 이런 노래나 불러야할까 싶었다.

가장 안타까운 건 라울 역이다. 1막에서부터 부잉각 좁히는 게 보였고 결국 다른 배역에 비해 티나게 작은 환호와 적지 않은 부잉이 나왔다. 내가 같은 한국인이라 실드 치는거일수도 있지만 솔직히 부잉하는 건 양심이 없는 행동이다. 담라우나 히멜이나 둘다 이 아무 쓸데없이 가수들 목이나 나가게 하는 작품 준비하다가 조기 탈락했다. 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지크프리트 구하는 것보다 어려울 테다. 강요셉 아니었으면 누가 나와서 욕받이를 했을지 모른다.

나도 돌아와서 히멜이 이 역할을 불렀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으로, 히멜 아리아집인 에로이크 를 찾아봤다. 그런데 위그노 교도 아리아는 아예 없더라. 이번 공연이 롤 데뷔 예정이었는데 캔슬한 거다.


결국 이게 다 멍청한 마이어베어 때문이다. 멋진 음악을 쓸수 없으니 가수 성대 갈아넣는 곡이나 쓰게 되는 거 아닌가. 그걸 또 좋다고 이 무자비하게 넓은 바스티유에서 상연하겠다고 한 것도 멍청한 일이다. 프랑스 인들의 세기를 넘나드는 뻘짓 커버치려고 괜히 한국인이 부잉 받고 있는 걸 보고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덕친 말대로 그런 건 프랑스의 자랑 알라냐 세워놓고 얼마나 잘하나 좀 보자.


뻘이야기
파리 오페라에 갈때마다 유명인을 한명씩 마주친다. 작년에는 마카롱 사다가 바로 뒤에 토마스 햄슨이 서있었고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에는 비야손과 정면으로 지나가며 눈까지 마주쳤다. 비야손 진짜 너무 비야손 처럼 생겨서 놀람;;; 내가 너무 놀란 표정을 지어서 비야손도 날 쳐다본 것 같다...
이 날 위그노 교도 공연 객석 1층에는 민콥스키가 와있었다. 글고보니 민콥스키도 위그노 교도를 지휘한적이 있다. 발이 다쳤는지 깁스를 하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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