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를 샀는데 4등에 당첨됐다.


일정을 짜면서 가장 고민됐던 날이다. 이 날에는 큼직한 공연이 많이 있었다. 하노버에서는 레푸지치가 트졸데를, 칼스루에에서는 브라운이 신들의황혼을, 뮌헨에서는 페트렌코가 명가수를 한다. 그리고 뉘른베르크에서는 바로 이 전쟁과 평화를 했다.


레푸지치, 브라운 모두 작년에 같은 극장에 바그너를 들어봤던지라 만족하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노버는 좀 멀고 (다음날 파리로 돌아가야한다) 칼스루에를 가느니 뮌헨 페트렌코를 보지 않겠나.


사실 일반적인 오페라 덕후라면 여기서 고민을 하고 있는게 이상하긴 했다. 페트렌코가 뮌헨에서 명가수를 올리는데 뉘른베르크 하노버 칼스루에랑 고민을 한다구요??? 그런데 이유가 몇가지 있었다. 일단 뮌헨 같이 큰 극장 보다는 작은 극장이 좀 더 맘에 들고, 명가수는 바로 전날 비스바덴에서 듣기로 했고, 작스와 베크메서 캐스팅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뉘른베르크는 기대할 만한 건덕지가 있었다. 일단 작년에 한번 가보긴 했지만 그래도 뮤지컬이었기 때문에 오페라를 본적이 없으니 새로운 느낌으로 가볼만 했다. 두번째로는 새 음악감독과 극장장(인텐단트)이 부임했고 두명의 취임 첫 공연이었다. 지휘자 요아나 말비츠는 에어푸르트 극장 게엠데로 취임하며 독일 최연소 게엠데 기록을 갱신하며 이슈가 됐다. 아마 이전 기록은 뉘른베르크 게엠데를 맡던 시절의 틸레만이 아닐까 싶다. 신임 극장장이자 연출은 옌스 다니엘 헤어초크가 맡았는데, 이 사람의 오를란도 푸리오소나 마술피리 모두 상당히 재밌는 연출이었기 때문에 기대가 됐다.



뭔가 신임 음악감독과 극장장의 취임 공연이라니 한번 기대를 걸어볼만 하지 않겠나. 페트렌코 명가수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혹시나 요아나 말비츠가 나중에 대박을 친다면 뉘른베르크 취임 공연본 걸 자랑으로 만들 수도 있을 거다.


무엇보다 작년 여행의 마지막이었던 마르코 코민 같은 대박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나의 공연 예지력을 한번 믿어보며 도박을 해본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공연하는 작품이 전쟁과 평화이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당시에 이 작품을 한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지만, 이론상 대작일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프로코피예프의 후기 작품이며 그가 남긴 오페라 중 가장 긴 작품이기도 하다. 무대에서 상연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자주 공연하는 작품이 아니라 이런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칠 수 없었다.


처음엔 겔가 음반으로 예습을 해봤다. 겔가가 러시아 오페라를 잘할 것 같지만 사실 그건 딱히 비교대상이 없고 당연히 이게 잘하는 걸거라는 편견이 있어서 그렇지 실제론 구리다.  겔가 음반으로 이 작품을 처음 접할 땐 너무 노잼인 것 같아 그냥 뉘른베르크 대신 뮌헨을 가야하나 싶었다. 그러다 베르티니 지휘 파리 오페라 공연을 보니 1장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 이건 꼭 봐야돼! 라는 심정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곳이 바로 한스 작스의 도시입니까! 


뉘른베르크 시가지 

 개인적으로 이번 일정에서 상당히 기대되는 공연이라 예습도 짧은 시간이나마 부지런이 했다. 정식 영상물로 발매된 것이 겔겝 마린스키, 베르티니 파리 오페라가 있고 여기에 중국 웹에서 겔겝 마린스키의 최근 공연 영상도 보았다. 커트를 하지 않은 판본의 길이가 5시간 정도라는데 세 공연 모두 3시간~4시간이 조금 못되는 길이다.


톨스토이의 소설도 찾아 읽어보기로 했다. 읽다 만 안나 카레니나 부터 다시 읽었는데 생각보다 술술 넘어가서 즐겁게 일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는 안나 카레니나보다도 좀 더 길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2권 중간까지 읽고 공연을 보았다. 오페라가 처음 700페이지 정도를 스킵하기 때문에 오페라로 치면 13장 중 2장의 내용까지 읽은 셈이다. 하지만 오페라에 설명되지 않은 배경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항상 피에르는 그렇게 안경잡이에 후덕하고 안드레이는 그렇게 잘생긴 사람들이 맡았는지 소설을 읽고서야 이해했다.


프로코피예프 역시 작곡하면서 아마 관객들이 소설을 매우 잘 알고 있을 거라 가정한 것 같다. 예를들어 오페라만 보면서 잘 이해가 안 된 부분이 2막에서 안드레이가 ‘나타샤가 만약 사촌에게 먼저 가고 그 다음 다른 여자에게 간다면 그녀는 나와 결혼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게 무슨 셜록 급의 추리라던가 (나타샤가 내가 맘에들었으면 제일 먼저 사촌한테 먼저 가서 말할거다 라던지) 그 당시 무도회의 관습 같은게 있나 했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보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꽃잎 뜯으면서 ‘결혼 한다, 안 한다, 한다, 안 한다’ 수준으로 소망을 표현한 것 뿐이다. 책을 다 읽고 오페라를 봤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좀 있다. 


새 지휘자와 극장장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1층 표는 일찌감치 다 팔려있었다. 최고등급 티켓은 비스바덴보다 싼편이지만 좌석등급 나누는게 살짝 창렬한 감이 있다. 시야 제한이 상당한 사이드 좌석도 2등급이라던가.. 그래도 뉘른베르크 역시 극장이 그렇게 큰편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도 훌륭한 음향을 들을 수 있다.


공연장에 갔을 때 제일 놀란 건 예상 공연 시간이었다. 공연이 6시 시작인데 30분 인터미션에 종료 예정 시간이 9시 20분인 거다. 그럼 오페라 길이가 2시간 50분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커트를 한건가. 


요아나 말비츠는 서곡에서 상당히 강렬한 모습을 보여줬다. 아주 패기있고 두려움 없이 쭉쭉 나아갔다. 프레이즈와 프레이즈 사이를 부드럽게 이으며 분절없이 휘몰아 치는 스타일이었다. 템포도 상당히 빨라 인정사정 없는 느낌.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말비츠의 지휘는 곡 전반을 거쳐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템포가 내가 듣던 것보다 조금씩 빨랐고, 명확한 쉼표보다는 프레이즈 사이를 잇는 걸 선호했다. 여기에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드는 것도 탁월했다. 오케스트라의 다이나믹 폭도 좋았고 다채로운 오케스트레이션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내 자리가 오케스트라와 충분히 떨어져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블렌딩도 훌륭했다. 


주역들이 한명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역에는 내가 좋아하는 바리톤 요헨 쿠퍼가 나왔다. 아주 모범적인 발성이다. 강인한 군인의 모습보다는 멜랑콜리한 느낌에 방점을 둔 해석이었다.

나타샤 역의 가수도 훌륭했다. 어린 나타샤의 소녀 같은 순수함을 표현하면서도 극장을 울릴만큼의 소리가 있어야하는데 그걸 딱 갖춘 가수였다. 이보다 더 잘어울리는 목소리 스타일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 피에르 베주호프를 맡은 가수 역시 이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실력자였다. 피에르가 힘있는 고음을 내줘야하는 꽤나 어려운 역할인데 깔끔하게 잘 불렀다.


반면 좀 아쉬운 가수들도 있었다. 쿠라긴 역을 맡은 가수는 뭐 원래 좀 멍청하게 보여야하는 역할이긴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했다. 그래도 잘생긴 외모로 여자 꼬시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인물인데 노래는 기깔나게 잘해야 좀 설득력이 생기지 않을까. 고음을 쭉쭉 내면서도 간교하며 동시에 매력적인 느낌을 잘 살려야하니 참 쉽지 않은 역할이다.



1부는 전체적으로 커트가 많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2장 초반, 3장 초반에 하인들끼리의 대화장면, 5장에서 돌로호프의 수하 두명의 장면이 삭제되었다. 하지만 오페라의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 큰 상관이 없었다.


그렇담 많이 짤리는 건 2부일테다. 그리고 2부는 정말 충격적으로 많이 짤렸다. 


일단 전쟁 시작을 알리는 8장에서 전황을 설명하는 내용들이 다 짤리고 무려 쿠투조프의 등장까지 짤렸다. 쿠투조프와 볼콘스키가 이야기하는 장면을 워낙 좋아해서 좀 충격이었다. 피에르의 전장 방문 역시 너무 간소화돼서 안드레이가 피에르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우린 어찌됐든 전쟁에서 이길거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도 나름 안드레이와 피에르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장면인데.. 특히 안드레이가 피에르에게 프리메이슨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장면은 이후에 피에르가 나폴레옹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과도 연결이 되는데, 실제로 피에르가 나폴레옹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것으로 연출한 이후 부분을 생각하면 이 대화를 삭제한 것이 참 아쉽다. 

 여기에 모스크바 퇴군을 결정하는 10장에서는 러시아군 장교들의 회의 장면은 완전히 짤리고 쿠투조프의 아리아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쿠투조프는 마지막 승리인 13장에서 까지 짤려서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파리 점령인 11장은 대체로 안짤렸지만 프랑스 군의 공표문을 러시아인들이 읽는 장면은 짤렸다. 

공연 며칠전 올라온 BR인터뷰에서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도록 커트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커트를 하는구나 정도는 알았지만 그건 뭐 워낙 당연한 소리라 신경을 안썼다. 그런데 이 정도로 짤리니 좀 당황스러웠다. 



커트뿐만 아니라 연출 역시 대단히 만족스럽진 않았다. 장면 전환이 워낙 많은 작품이라 연출이 쉽지 않은데 전반적으로 텅빈 무대에 검은 가벽을 적당히 옮겨가며 구조를 바꾸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스타일도 잘 만들면 훌륭한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일단 시각적으로 깔끔해서 보는맛이 있던 전날 비스바덴 명가수와 비하면 아쉬웠다. 

부분부분을 떠올리면 특별히 엉성하거나 아쉬운 부분은 없었던 것 같다. 각 장 마다 화면에 영화 자막처럼 배경설명을 해주어 관객들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돌로호프나 아버지 로스토프가 때때로 도박을 하고 있거나 엘렌이 로스토프를 돈으로 회유하는 것 같은 장면 역시 오페라에 명시돼있진 않지만 소설의 내용을 잘 살린 부분이었다. 

무대 전환이 빨라 물 흐르듯 쭉쭉 진행됐고 2장의 무도회 동선 역시 괜찮았다. 3장 역시 공작 영애 마리아의 감정 표현이나, 자기도 브리엔과 결혼하겠다는 아버지 볼콘스키의 말을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준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다만 그걸 보여주기 위해 관객 입장에서 집중이 분산되는 느낌은 있었다. 6장에서 아나톨이 나타샤를 유괴하려고 할 때 집 안에는 온갖 러시아 위인들의 초상화가 붙어있었다. 아나톨과 엘렌은 러시아인이지만 프랑스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고, 우린 고귀한 러시아인들이다라는 생각을 보여줄 수 있는 장치였다. 1부에서도 틈틈히 나폴레옹의 얼굴을 비롯한 정치적 사건들을 작은 TV로 보여주며 귀족들이 사랑놀음하는 평화의 시절에도 전쟁의 암운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9장 나폴레옹 장면은 상당히 코믹하게 바꿔놨다. 일단 이후의 장면들과 달리 프랑스 군들이 군복을 입고 있지도 않고, 나폴레옹 역시 종이로 대충 만든 것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폴레옹 역의 가수는 한국인 바리톤 이상민 씨였는데, 덕택에 1부에서부터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한국인 얼굴이 무대에 계속 나왔다. 훌륭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나폴레옹의 까다로운 노래를 잘 살려냈다.  원군을 보낼 때마다 발판으로 삼는 상자들이 하나씩 빠져 나폴레옹의 자리가 위태해지도록 연출한 건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였다. 나폴레옹이 무심하게 던진 불발탄이 폭파되는 장면은 전황을 너무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프랑스군의 모습을 단적으로 비유한 연출이었다.



11 장에서 프랑스인들이 모스크바를 약탈하며 ‘프랑스의 것은 프랑스에게로’ 라는 대목에서 그림을 약탈하는 대신 엘렌을 살해하는 걸로 연출했다. 11장 마지막에도 프랑스 군인들이 러시아 여성들을 강간하는 장면을 넣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유독 강조한 느낌이다. 11장에 러시아인들이 사보타주를 노래하는 대목은 도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연출했다. 실제로 합창 소리도 녹음한 것을 쓴 것 같다. 이 합창이 뒤에 다시 등장하는데 동어반복의 느낌을 덜 줘서 괜찮은 선택이었떤 것 같다. 프랑스 군인들이 공포에 떠는 연기도 괜찮은 연출이었다. 




2부 전반적으로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러시아 군의 복장이 1812년 전쟁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밀덕이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2차대전 쯤에 입었을 것 같은 옷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저 러시아인들이 싸우고 있는 건 프랑스군이 아니라 독일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곡에서 러시아의 국기를 현대 국기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소련, 러시아 제정 국기등을 거는 장면이 나온 것도 비슷한 의도였을 수 있다. 독일 사람들이 러시아랑 프랑스 전쟁하는 걸 보고 남의 나라 이야기 인것 처럼 바라보는 건 좀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에 전쟁 특유의 날려버리는 효과도 잘 살려냈다. 1막 끝에 에피그래프를 집어넣었는데 합창단이 무대 뒤의 벽을 부수고 등장한다. 11장에서 모스크바가 불탈 때 무대 벽이 아예 무너져 내리는 것도 충격적인 효과였다.  비슷한 정도의 충격은 셰로 <죽음의 집에서> 1막 끝나고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정도에서나 느꼈던 것 같다. 이러고 나서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부분 역시 공연의 간지 하이라이트.


음악적으로 가장 훌륭한 장면은 안드레이가 임종을 맞는 12장이었다. 여기서 요헨 쿠퍼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분위기와 워낙 잘 어울렸고, 말비츠도 이 부분에서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이 부분을 위해 선율을 아껴놨다는 듯이 둘의 선율을 정말 사랑스럽게 가공해서 선보였다. 


부분부분으로는 분명 만족스러웠지만 공연이 끝났을 때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뭔가 강한 한방이 없었다. 그런게 나오기 힘든 오페라일 것 같기도 한데, 뭔가 마지막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피에르와 나타샤가 이어지는 장면도 나오지 않았고, 승리의 환희도 느끼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 오페라의 클라이막스인 피날레 합창이 말 그대로 폭망....... 1부 2장에서 합창이 처음 나올 때도 불안했는데, 설마 피날레를 망치겠냐고 생각했다. 연출이 무대를 깊게 쓰다보니 마지막 합창을 무대 안쪽 끝에서부터 시작했고 오케스트라와 안 맞는 정도가 아니라 합창단 끼리도 완전히 어그러졌다. 여기에 간지 터지는 쿠투조프의 선창을 삭제해서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합창이 너무나 뜬금없이 시작해버렸다. 에?? 아니 벌써 오페라가 마지막이라구요? 안그래도 짧아서 지금 당황하고 있는데 마지막 합창까지 이렇게 뜬금포로 나오면 마음의 준비는 언제합니까ㅠㅠ

이 피날레 파트의 연주효과가 말러1번 피날레 만큼이나 곡빨 깡패라, 막말로 겔가가 지휘를 해도 이 부분에서는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공연에선 피날레가 너무 허망하게 끝났다.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심지어 합창 파트도 한절을 삭제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멋진 합창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릴 수가 없다. [라디오 중계를 확인해본 결과 A-B-A-C-A 구조의 노래에서 마지막 A-C를 삭제하고 바로 마지막 A로 넘어간것 같다] 


생각해보면 이게 너무 프로파간다 스타일이라 독일에서는 그 느낌을 일부러 거세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일단 연출도 너무나 담백했고, 쿠투조프라는 인민의 영웅을 2부 전체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기도 했다. 1812년 전쟁이란 특수성을 삭제하고 싶은 것보다 어떤 우상화를 삭제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싶다.


국뽕이 금기시되는 독일이라서 그런가. 이 작품은 물론 러시아뽕이 한가득한 작품이다. 대체로 러시아 사회의 안 좋은 면, 비겁한 군인들도 잘 묘사한 톨스토이의 원작과 달리 오페라는 그런 것 까지 다룰 수 없었다. 또한 소비에트 시절 프로파간다 용으로 당의 검열을 받고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 1812년 뽕, 톨스토이 뽕, 프로코피예프 뽕이 소비에트 시절에 짬뽕이 됐는데 어찌 국뽕 한사발이 안나올 수 있겠나. 하지만 나는 들으면서 ‘이 정도면 솔직히 국뽕에 취할만 하지’ 라던가 ‘톨스토이에 프로코피예프면 인류 공통뽕으로 써먹으면 안 되겠냐’라는 생각이라 별 거부감이 없었다. 아니 국뽕 없는 전쟁과 평화라니 그럴거면 그냥 작품을 올리지 말았어야ㅠㅠ

꼭 그렇게 다 잘라야만 속이 후련했냐!!ㅜㅜ


공연을 되짚어보면 분명 뛰어난 장면들도 많고 전반적으로 훌륭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피날레에 너무 짜게 식어버려서... 여기에 짧은 공연시간도 못내 아쉬웠다. 아니 오페라 시작한지 3시간 20분밖에 안 지났는데 끝나는 게 어딨죠. 3부 해야죠 3부. 30분 쉬고 1시간 더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말러 1번 공연하셨다던데 그거 이어서 하시면 되겠다!!


이 공연 보기 전에 본 작품들의 인터미션 포함 평균 공연 시간이 5시간 10분 쯤이라 적응이 안 됐다. 원래 짧은 작품이면 괜찮았겠지만 전쟁과 평화는 이들 못지 않게 긴 작품이다. 삭제해도 무방한 장면이 있다는 건 동감하지만 주요 모티프들이 나오는 장면들이 너무 많이 빠졌다. 이 작품이 워낙 같은 선율이 계속 등장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그러면서 점층적으로 고양되어가는 게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소요되는 시간 역시 관람에 큰 영향을 끼친다. 2부만 2시간이 넘게 보고 있다가 마지막 합창이 나오는 것과, 1시간 남짓 후루룩 지나갔다 마지막 합창이 나오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또하나 아쉬웠던 건 말비츠가 기대했던 것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통솔력이 훌륭하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12장 초반에 술 폰티첼로로 사운드를 만드는 것. 7장에서 피에르가 분노할 때 오케스트라를 폭발시키는 것, 5장에서 쿠라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반주 스타일 등 복잡하고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잘 소화해냈다. 

하지만 극을 안정적으로 만들어가는 느낌이 부족했다. 전반적으로 호흡이 가쁘게 느껴졌다. 뭔가 한숨 고르고 들어가도 될 것 같은 부분에서 쭉쭉 이어지는 부분이 많았다. 가수의 자연스러운 호흡에 맞춰 따라가는 것보다 오케스트라의 칼같은 반주에 가수가 얹혀서 따라가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많았다. 이렇게 말하면 오페라 지휘자로서 너무 큰 단점인 것 같은데, 그게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쭉쭉 뻗어나가는 게 이 작품의 흐름이라고 생각해서인 것 같았다. 이런 흐름 때문에 가수가 숨을 쉬는 포인트에서 엇나간다던가, 가수가 숨을 급하게 쉬는 부분들이 종종 보였다.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좋았는데 이런 부분이 아쉬웠다. 


사실 바흐트랙에서 찾아본 말비츠 평이 정말 좋고 해서 기대치가 많이 올라갔다. 프랑크푸르크에서 한 드뷔시와 레하르 모두 극찬을 받았다. 어쩌면 마르코 코민의 돈 조반니를 보았을 때의 감동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다보니 공연을 보면서도 조금씩 아쉬웠다. 코민을 들었을 때 느꼈던, 지휘자가 극을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만들어가는 분위기가 아쉬웠다. 물론 이 작품을 어떻게 지휘해야 기깔나게 지휘하는 건지 나도 상상이 잘 안가긴 한다. 하지만 이것보단 더 좋았을 여지가 있어보인다. 이렇게 공연 볼때마다 코민만 찾는 코민무새가 되어가고..


종합해보면 합창단의 치명적인 실수와 판본 상의 문제만 빼면 상당히 괜찮은 공연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의 짜릿함을 느끼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당연히 티켓값에 비하면 훌륭한 공연이었고 그렇다고 대박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좀 있었다. 프리미어가 아니라 막공 쯤이라 합창단이나 전반적인 호흡이 더 좋았다면, 내가 어떤 부분이 컷트되는지 알고 있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면 훨씬 즐겁게 들을 수 있었을 테다.


가수들의 수준이 상당히 뛰어났던 걸 생각하면 더 아쉬운 대목이다. 글라인드본에서도 압도적으로 눈에 띄던 요헨 쿠퍼가 이번 공연에서는 다른 캐스팅에 비해 조금 앞서나갈 뿐이었다. 쿠라긴과 데니소프 역이 살짝 아쉬웠던 걸 빼면 어느 배역 하나 구멍이 없었다. 전날 공연에 다비드 역 가수가 난조를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솔리스트가 많이 나오는 작품에서 구멍이 없었다는 건 아주 훌륭한 성과다. 은근히 잘 하기 어려운 쿠투조프 역시 덩그러니 아리아만 남았지만 절절했다. 

특히 한국인 가수 3명, 나폴레옹 역의 바리톤 이상민 씨, 메티비에/베르티에/다부 역의  강원용 씨, 랑발 역의 김대호 씨 모두 훌륭한 캐스팅이었다. 각각의 배역이 다 길지 않아 아쉬웠는데, 나폴레옹 역의 이상민 씨는 노래는 물론 여유 넘치는 나폴레옹의 모습에서 패전후 모든 것을 잃은 모습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특히 피에르가 권총을 쏘는 모습을 비웃는 대목에서는 베테랑 같은 여유가 보였다. 강원용 씨는 짧게 짧게 등장하는 배역이었지만 아주 매력적인 목소리로 듣는 순간 바로 각인되는 스타일이었다. 김대호 씨는 안정적인 노래와 자연스러운 연기가 참 좋았다. 

딱 봐도 나폴레옹역인 이상민 씨, 그리고 가장 오른쪽이 랑발 역의 김대호씨,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다부 역의 강원용 씨.
글고보니 강원용 씨의 다른 역할까지 포함해 한국인은 모두 프랑스인 역할을 맡았다.




시즌 첫 공연이라 그런지 끝나고 리셉션이 있었다. 음식 케이터링도 해서 큰접시에 음식을 골라 담으면 10유로에 먹을 수 있었다. 독일 와서 독일 음식 먹을 일이 없다가 소시지와 고기, 그리고 연어가 올라간 해쉬브라운?스타일의 감자를 맛나게 먹었다.


새로운 극장장이자 오늘 연출인 헤어초크가 연단에 서서 가수들을 한명씩 소개했다. 제일 많은 환호를 받는 건 역시 요헨 쿠퍼였다. 알고보니 바예리셰 캄머쟁어ㄷㄷ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클라스를 인정받은 가수구나 싶었다. 요아나 말비츠가 올라왔을 때도 환호성이 대단했다. 자기 동네 지휘자와 가수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환영하고 축하할 수 있다니 참 부럽다. 


어차피 마지막 날이라 호텔 돌아와서 할 것도 없어 혼자 뻘쭘하게 행사를 보다가 한국인 가수분들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실력있고 젊으신 분들이라 나중에 또 무대에서 볼 날이 있을 것 같다. 

공연이 좋으면 기다렸다가 요아나 말비츠와 헤어초크에게도 인사하고 사인을 받을까 했지만 피날레의 충격이 가시기 전이라 그냥 말았다.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정말 좋았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싶진 않아서... 그러고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연주나 연출이나 괜찮았던 것 같아 후회하고 있다.


극장이나 더 둘러보고 나니 사람이 좀 빠져서 요헨 쿠퍼도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오기 전에 사인받으려고 챙겨온게 카우프만, 쿠렌치스, 그리고 요헨 쿠퍼의 블루레이 였다. 근데 이날 공연을 가기 전에 짐 깊숙이 넣어둔 블루레이 커버를 찾기도 귀찮아 그냥 말았다. 

 카우프만-쿠렌치스 팬질하다가 요헨 쿠퍼에게 사인받을 생각하니 내가 그 정도 팬은 맞나 라는 쓸데없는 자기 의심이 들었다. 에이 뭘 또 사인받으려고 백스테이지에서 기다려야 하나.


아니 리셉션이 있는 줄 몰랐지.. 팬심을 표현하는데에도 가장 좋은 건 물증이라는 걸 깨달았다.그래도 도쿄 탄호이저랑 글라인드본 명가수 봤다고 하니 정말 좋아하시더라. 추 구텐베르크랑 내한 왔던 이야기를 하면서 친한 한국인 반주자도 있고 불고기도 좋아한다면서 스스로 친한파라고 이야기했다. 제가 그 내한 공연을 못갔지 말입니다 흑흑... 이번에도 한국에서 오페라 제안이 있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못 했다고 하더라. 프로그램에 볼콘스키가 나타샤랑 춤추는 사진에 사인을 받았다. 



이렇게 마지막 공연을 보았다. 공연을 보는 시간도 즐거웠지만 공연을 보겠다고 전쟁과 평화 음반을 듣고 영상을 보고 소설을 붙잡고 읽고 있던 시간들이 정말 값진 것 같다. 이날 뮌헨 대신 뉘른베르크를 선택한 것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공연 전날 뮌헨에서 코흐가 아프다고 대타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폴레를 데려왔다고 메일을 보냈지만 난 후회하지 않을거다. 어차피 옥토버페스트 기간이라서 뮌헨에선 숙소도 못 잡았을 거다. 폴레가 대타라서 노래도 제대로 못했을 거다. 전쟁과 평화가 최고시다.


ㅎ그흐긓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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