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왔다. 그리고 역시나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이번 쿠렌치스의 일본 투어는 네 번 공연하는데 이 날 산토리홀의 프로그램이 가장 독특하다. 다른 세 곳에서는 차이콥 바이올린 협주곡과 교향곡 4번 혹은 6번을 연주하는데 오늘 공연의 프로그램은 모음곡 3번,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였다. 프로그램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표 팔 생각이 없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쿄에서 있는 세 번의 공연 중 교향곡과 바협을 연주하는 앞의 두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이 됐지만 산토리홀은 꽤 늦게까지도 표가 남아있었다. 심지어 첫 공연은 도쿄의 세종이라 할만한 분카무라 오차드 홀이었는데도 말이다. 


일본에 오기로 좀 더 일찍 결심했다면 스미다 트리포니 홀 공연도 예매했겠지만 이미 늦었다. 결국 뒤늦게나마 오사카와 산토리홀의 공연을 예매했다. 얼빠석도 못 사고 이게 무슨 소립니까 엉엉


이번이 도쿄에 세번째 오는 것이었는데 세번 모두 산토리 홀에 들렸다. 세어보니 산토리 홀에서 본 공연만 이미 7개다. 그 사이에 리뉴얼을 했다고 하는데 천장과 벽면이 약간 달라진 느낌이었다.


보는 공연이 두 개 뿐인데다 차바협과 비창은 별다른 예습이 필요 없으니 예습은 주로 산토리홀 프로그램에 맞췄다. 솔직히 모음곡 3번은 한 번도 안 들어봤다. 모음곡 3번이 네 악장으로 이루어진 거 아셨던 분?? 모음곡이라고 하니 자잘한 곡들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1악장은 10분 정도 길이의 엘레지이고 2악장은 단조 왈츠, 3악장은 6/8박자 스케르초이며 마지막 악장은 주제와 변주에 폴로네이즈 피날레가 딸려있는 형식으로 20분 정도의 길이다. 4악장의 임팩트가 강해 이 악장만 따로 떼어서 녹음한 경우도 꽤 있다. 주제도 좋고 변주들도 재밌는데다 마지막 폴로네이즈가 오네긴 폴로네이즈에 비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하기에 이 곡을 안 들어본 사람이라면 4악장이라도 꼭 들어보길 권한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나오는 중간 파트는 솔직히 오네긴보다 이 모음곡 3번이 더 재밌다.


들어볼 만한 녹음은 콘드라신, 유롭스키, 마리너 정도다. 마리너는 네 개의 모음곡을 다 녹음했는데 모난 데 없이 곡의 매력을 잘 살리는 연주다. 폴로네이즈의 박력은 솔직히 그간 마리너에 가지고 있던 인상과 많이 달라 놀랐다. 콘드라신은 굉장히 감정적인 연주라고 줄일 수 있는데, 작품에서 거칠고 폭발적인 느낌을 잘 살려준다. 2악장 왈츠의 비올라 선율 파트라던가 4악장 2변주 같은 게 대표적인 부분. 유롭스키는 성부간 밸런스에 신경을 많이 써서 메인 멜로디 이외에 대선율을 강조하는 편이다. 전반적으로 짧고 간결한 아티큘레이션이 마음에 들었다.



쿠렌치스의 연주는 이들에 비하면 어떨까 궁금했다. 폭풍같이 몰아붙일까? 안 들리던 성부가 강조될까? 둘 다 아니었다. 말러 3번 때 느낀 거지만 쿠렌치스에게 파격적인 건 그저 디테일을 세공하고 매력적인 흐름을 만드는 실력이 뛰어난 것일 뿐, 특별히 튀는 짓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음곡 3번 연주도 귀에 띄게 특이한 부분은 별로 없었다. 같은 선율을 특별하지 않은 템포로 연주하지만, 중요한 건 선율에 표정이 살아있고 이야기가 담겨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예컨데 유롭스키의 연주를 다른 연주와 비교해서 들어보면 전반적으로 다채로운 성부를 조금은 과할 만큼 강조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약간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이 부분에서 묻혀있던 대선율을 전면으로 끄집어 내세우는 게 꼭 필요해서 그랬다라기 보다는, 일종의 일관된 기조처럼 작동한다. 덕택에 연주가 입체적으로 들리고 재밌는 부분들도 있지만, 굳이 이 부분에서 주선율의 흐름을 덮어버릴 만큼 대선율을 강조했어야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나는 다양한 성부가 들리는 걸 대체로 선호하지만 그게 연주를 평가하는 전적인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쿠렌치스는 다른 젊은 지휘자들에 비해서 특이하게 성부를 강조하는 곳은 오히려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차이콥스키에서 더 그런데, 오늘 연주를 되새김해보면 주로 부각되는 성부가 특이하지 않고 주선율이 항상 메인을 차지하는 흐름이었다. 바흐트랙에 올라온 쿠렌치스의 최근 차5 리뷰에서 특정 선율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고 까는 문장이 있었다. 확실한 건 쿠렌치스는 모든 성부가 되도록 적당히 잘 들릴 수 있게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거지만 필요한 대위는 누구보다도 잘 살려낸다. 프란체스카 느린 부분의 잉글리시 호른 솔로에서 플루트의 대선율은 유난히 빛났다.


그렇다면 쿠렌치스가 차이콥에서 내는 맛은 어떤 건가. 비결은 선율 프레이징의 디테일에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히는 마술이었다. 확실한 건 프레이즈 끝의 마무리를 섬세하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2악장 비올라의 솔로가 참 처량한 독백처럼 들렸다. 이런 느낌은 2부에서도 똑같이 이어졌다. 이것 저것 많지만 프란체스카 시작 부분의 관악기 세 음 모티프의 긴장감이나 롬줄 도입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실 모음곡 1,2,3악장의 경우 빈말이라도 완벽한 연주였다고 말할 순 없었다. 플루트 수석이 난조를 보이는가 하면 호른의 실수도 작게나마 있었다. 3악장 앙상블의 치밀함은 무지카 에테르나와 쿠렌치스 조합에 기대하는 수준에는 조금 못 미쳤다. 4악장의 변주 5번의 푸가토 같은 경우도 홀의 울림 때문도 있었겠지만 기대했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이 5변주에서 뭔가 특별한 해법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지라 이 부분은 아쉬웠다. 

하지만 2변주나 6변주에서 칼같이 맞는 현악기의 음표들은 내가 기대했던 사운드가 그대로 나왔다. 4변주에서 포르티시시모 투티의 템포를 상당히 여유롭게 잡은 건 의외였는데, 차이콥에서 쿠렌치스의 변칙은 오히려 남들보다 느리고 더 조용한 트릭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9변주 끝에 나오는 악장 솔로는 경악할 만큼 놀라웠는데, 원래 항상 나오던 아파나시 추핀 대신 나온 어린 악장이 솔로를 기가 막히게 소화해냈다. 내가 가장 최근에 들었던 악장 솔로가 서울시향 영웅의 생애였었는데........ 

악장 솔로에 넋을 잃고 나고 변주가 마무리 된 뒤에 폴로네이즈가 이어졌다. 폴로네이즈 연습 빡세게 한 티가 확확 나더라. 싱코페이션이 이렇게 태엽같이 착착 맞아 떨어질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좀 지저분하게 들려도 그냥 내가 원래 엇박에 약하니 들을 때도 그렇게 들리는 건 줄 알았는데, 촥촥촥 끼어들어오는 엇박을 들으니 기가 막히게 놀라웠다. 쿠렌치스가 템포를 너무 급하지 않게 잡은 것도 도움이 됐을 테다. 기대, 혹은 걱정했던 부분은 템포 디 폴라카가 시작하기 전의 현악기 16분 음표들인데, 이 부분이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는 연주를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 리허설 광은 다릅니다. 아주 깔끔하게 맞아 쾌감이 쩔었다. 폴로네이즈 주선율 시작하기 전의 상승 스케일에 거대한 알라르간도를 넣어 멋을 넣는 연주가 상당히 많은데 쿠렌치스는 오히려 담백하게 지나갔다. 텐슈테트가 잘 구사할 것 같은 이런 원기옥 모으는 프레이징을 쿠렌치스가 구사하는 걸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간혹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하는 마지막 피우 모소에서도 너무 빠르지 않았다. 템포만 빠르고 앙상블을 희생하는 연주도 있지만 쿠렌치스는 정확한 앙상블이 주는 흥분을 선택했다.


엄청난 환호에 악장을 따로 인사 시키고 나서 갑자기 앵콜이 시작됐다. 무려 차바협 3악장ㄷㄷ 이 전날인가 공연에 앵콜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해줬다길래 돈내고 롬줄 보러가는 사람 입장에서 배가 아팠는데 차바협 못 듣는 오늘 관객을 위한 서비스였나보다. 이 악장이 투어 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연에서 차바협을 협연하는 걸 봤었는데, 기가 막히게 잘하더라. 도대체 쿠렌치스는 어떻게 저런 재능을 악장으로 영입한 걸까, 코파친스카야도 저거 보면 좀 긴장 탈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본 차바협 실연 원탑은 단연 즈나이더 & 이반 피셔 내한이었는데 3악장 뿐이었지만 엄청난 연주였다. 악장은 날카로운 소리에 쿠렌치스 스타일 아니랄까봐 자유분방한 솔로를 보여줬다. 내친김에 이자이 소나타 2번까지 앵콜로 연주해줬다.


2부는 원래 리미니 - 롬줄 순서였지만 롬줄 - 리미니 순서로 바뀌었다. 교향곡에 비하면 뭔가 아쉬운 듯한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듣고나니 교향곡 4번 안 부러웠다. 이 두곡이 이렇게 엄청난 곡이었단 말인가.




수면부채가 5시간을 훌쩍 넘어 일단 1부는 여기서 자르겠습니다.

블로그에 들려주신 귀인의 팁을 받아 한과 선물 세트를 사서 선물로 전달했습니다.

공연 끝나고 사인을 받았을까요 못 받았을까요? 그건 다음 이야기에....



상기했던 것 처럼 롬줄은 도입부부터 달랐다. 프레이징의 텐션이 남다른데, 순전히 100% 음악적 차이는 아니고 쿠렌치스의 지휘도 큰 몫을 한다. 쿠렌치스 공연을 직접 보는 것의 묘미는 쿠렌치스의 몸동작을 보는 것이다. 바라보고 있으면 음악이 바로 전달되는 것 같은 지휘들이 있다. 지휘자는 결국 몸짓으로 단원들과 소통하고, 이 소통을 함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메리트다. 무지카 에테르나 단원들이 기립해서 연주하는 모습 역시 특별한 광경이지만 내 눈은 그저 쿠렌치스에 고정돼있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아예 눈에 안들어왔다. 이전에 말러 3번을 볼 때에 비해서도 더 볼거리가 많았는데, 단순히 박자를 젓는 부분이 거의 없고 대부분이 구체적인 프레이징 지시를 하고 있기에 그랬다.


최근 SWR과 연주한 차5 영상을 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이날 공연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쿠렌치스는 차이콥의 반복을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다이나믹이나 아티큘레이션 변화를 주며 어느 하나 지루하게 반복되는 느낌이 들지 않게 만든다. 1악장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리듬 모티프를 연주할 때 악센트와 아티큘레이션을 달리하며 변화를 준다. 그리고 쿠렌치스의 특기는 때려부수는 것이 아니라 피아니시모를 만들고 섬세한 감정선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는 걸 또다시 확인했다. 쿠렌치스 차5를 들어보면 남들이 쎄려박는 지점을 오히려 과장하지 않고 지나가곤 한다. 4악장 알레그로로 넘어갈 때 팀파니는 오히려 심심한 편이다. 템포 역시 절대 빠르지 않다. 모차르트에서 종종 남들과 확연히 다르게 빠른 템포를 가져가는 것과는 영 딴판이다. 4악장 피날레 마지막에 프레스토로 넘어가는 부분 역시 당혹스러울 만큼 여유롭다. 쿠렌치스는 차이콥에서 특이한 템포로 승부를 보지 않는다.


이날 롬줄과 리미니도 비슷했다. 함부로 때려박지 않는 모습은 롬줄 알레그로 1주제부에서 유명한 칼싸움 장면 (심벌과 금관이 불규칙한 리듬으로 들어오는 파트)에서 잘 나타났다. 심벌즈가 신경질적일 정도로 강렬하게 때려박곤 하는 부분인데 쿠렌치스는 전혀 방점을 찍지 않았다. 덕분에 오히려 뒤의 투티에 무게가 더 실릴 수 있었다. 전반적인 템포가 빠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롬줄과 리미니 모두 평균보다 빠르지 않았다. 반복을 재미있게 잘 살려낸 부분으론 롬줄 알레그로 1주제에서 현악기와 목관이 세음 모티프를 주고 받는 대목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를 가미하며 마치 물결치듯 흥미진진하게 텐션을 쌓아 올라갔다. 이런 반복적인 부분에서 포르테 - 피아노 대비를 주거나 일관된 크레셴도를 주는 것은 고전파 음악을 해석할 때는 이디엄 처럼 사용하는 기본적인 수법이지만 이를 차이콥에 적용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전까지 롬줄의 이 부분을 들으며 너무 의미없는 반복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쿠렌치스는 이걸 쫄깃하게 만들어줬다. 전개부에서 목관과 호른이 주고받으며 현악기가 싱코페이션으로 반주를 넣는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에서 처음엔 현악기가 싱코페이션을 아주 짧고 날카롭게 가져가고 조용하고 무표정한 프레이징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온갖 표정 다 보여준 사람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굳어있는 모습을 보는듯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현악기의 싱코페이션이 길어지며 급물살을 타듯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롬줄 알레그로 1주제에서 첼로와 목관이 돌림노래로 주고받는 경과부가 있는데 이 부분도 독특했다. 첼로와 목관이 비슷한 크기로 들리게 하기 위해 첼로가 너무 크지 않게 조절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쿠렌치스는 반대로 첼로가 마음껏 나오게 만들어 전반적인 텐션을 더욱 높였다.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연주하는 것은 선율의 매력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물어뜯 듯 연주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바이올린의 반주 패턴도 자칫하면 너무 기계적이고 표정없는 연주가 되기 마련인데 그 안에서 충분한 다이나믹 변화와 바이올린 양익배치가 주고받는 효과가 더해져 급박한 상황을 잘 표현해줬다.


가장 마법같은 순간을 꼽자면 재현부에서 현악기가 사랑의 2주제를 뿜어내는 지점이었다. 이 지점은 비브라토에 포르타멘토 같은걸 다 집어넣고 말 그대로 ‘분출’ 하기 좋은 부분인데 쿠렌치스는 여기서 모든 걸 다 내어주지 않았다. 보통의 연주는 상승 스케일 뒤 나오는 현악기의 주선율이 첫음 G#(A#)에서 A(B)로 도달하는 순간 황홀함과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쿠렌치스 프레이징의 종착점은 이 두번째음이 아니었다. 이 최고음에서도 더 나아가는 느낌. 성취의 만족이 아니라 더 높은 것을 갈망하게 만드는 연주였다. 땅에 닿아있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부유하는 것 같았다. 최고음에서 정점을 찍는게 아니라 그 안에서도 힘을 빼지 않고 미묘한 크레셴도를 준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평소에 듣던 차이콥의 직설적이고 뿜어져 내고 신파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말러 3번 6악장의 ‘슬픈 행복’에 가까웠다. 통속적이고 달콤한 것이 아니라, 살짝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열망,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열망을 연상케 했다. 곡 전반에 걸쳐 투티를 너무 강하게 연주하지 않아서인지 현악기가 쏟아져 나올 때 한번도 보지 못한 압도적인 장관을 보는 듯 했다. 여기가 클라이막스라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난 파국 뒤에는 장송행진곡에 해당하는 모데라토 아사이가 이어진다. 쿠렌치스는 엄청난 팀파니 타격 뒤에 한참을 멈추었다. 그 정적의 압박이란. 여태 들으며 표제음악이라는 점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는데 쿠렌치스의 연주는 극적인 힘이 탁월했다. 주인공이 죽었는데 바로 다음으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꿈결같은 사랑의 주제가 다시 반복되고 나서 꽉 찬 에너지와 함께 곡이 끝났다. 그리고 쿠렌치스가 손을 내리기 까지, 아마 20초는 넘었을 것 같은 그 시간 동안 객석에서는 완벽한 정적만 감돌았다. 롬줄 끝나고 이런 정적 가능한겁니까ㄷㄷ 이 점에서 일본 관객들 정말 리스펙 합니다… 일본까지 와야만 경험할 수 있는건 바로 관크-프리, 이 압도적인 정적이다. 겨울이라고 악장간 기침은 많았지만 연주중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소음이 없었다. 



리미니 역시 작품의 매력을 한껏, 아니 없는 매력까지도 살려낸 느낌이었다. 일단 처음 들었을 때 지루했던 느린 도입부에 쿠렌치스 프레이징이 입혀지니 긴장감이 생겨났다. 선율의 끈을 팽팽하게 잡으면서 놓아줄 때도 슬며시 건네주듯 풀어주는 맛이 있었다. 


알레그로로 넘어가서 처음 호른의 선율이 나오는 것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보통 어느정도 악센트를 넣으며 앞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인데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알레그로로 넘어왔지만 아직 안단테의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템포 바뀌었다고 표정 싹 바꾸는게 아니라 이전까지 쌓아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느낌이었다.


리미니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면 역시 포르티시시모 투티에서 모든 악기가 다 같이 정점을 찍는 긴 음표일테다. 므라빈스키는 이 음표를 꽤 늘리며 강조하는데 밀어내듯 소리내는 트럼펫의 절규가 압권이다. 쿠렌치스는 이 부분을 우아하게 만들어냈다. 템포를 조금 늘어뜨린 걸까. 음표 머리에 액센트를 확 주는게 아니라 살짝 밀어내는 듯 하며 테누토를 확실하게 줬다. 무엇보다 쾌감 쩔었던 건 쿠렌치스의 지휘와 오케스트라의 반응이었다. 쿠렌치스는 이 박자를 지휘하지 않았다. 이 음표 전부터 한박자를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그저 열심히 팔을 휘젓다가 한박자 전에 몸을 숙이며 우아하게 긴 목을 빼내고 (뒷모습이라 얼굴은 안보였지만 아마) 그윽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멈춰 있었다.예약대기 걸어놓고 여유롭게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해야하나. 마치 농구공을 던져놓고나서 여유를 부리며 공이 링을 통과하는 순간을 여유있게 바라보는 스웩이었다.  그리고 이 투티 화음이 나타나는 순간에 그저 폭발 버튼을 누르듯 미세한 임펄스와 반동이 있을 뿐이었다. 정점에 이르기 위한 모든 모멘텀을 이미 주었으니 그 순간 힘을 줘서 내려찍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들은게 맞다면 아마 이 정점 앞에서 미세한 간격이 생겼거나 데크레셴도가 있었을 테다. 그래서 앞과는 살짝 떨어져서 우아하고 도도하게 빛났다. 이걸 영상으로 찍었다면 이 장면을 움짤로 만들어 무한반복하며 감상했을 테다. 지금도 이미 머리속으로 수십번은 돌려본듯..


느린 선율이 중간 부분에만 뭉쳐있는 것이 리미니의 특징인데 쿠렌치스의 지휘는 오페라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조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장면이 롬줄에 이어 리미니에서도 나타났다. 이 2주제부의 마지막 투티는 롬줄 처럼 숭고한 아름다움의 경지를 보여줬다. 특히 첼로가 선율을 연주하는 부분은 연주자의 모든 걸 끄집어내려는 듯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피날레에선 아껴놓았던 힘을 다 사용해 화끈하게 폭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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