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악마는 아마 쿠렌치스의 얼굴을 하고 있을 거다.


차바협과 차6, 사골 중의 탑 사골. 협주곡 부분 사골과 교향곡 부분 사골이 만났다. 내가 대학 들어와서 한창 공연을 보러다니기 시작할 때 가장 자주 들은 게 이 두 곡이었다. 여기에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을 얹으면 그야말로 사골 삼종 세트. 하지만 쿠렌치스와 코파친스카야가 가장 잘 하는게 있다면 악보를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다. 같은 사골 처럼 보이지만 계속 우려냈던 그 사골이 아니라 이 말이다. 


쿠렌치스와 코파 조합은 유일무이한 매력이 있다. 둘 중 누가 더 정신나갔는지 시합을 한다. 보통의 협주곡 연주가 서로를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협연자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눈치를 보며 맞춰가는 일이라면, 쿠렌치스와 코파는 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음반을 되도록 덜 들으려고 했지만 워낙 강렬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음반에서 듣던 바로 그 연주입니다. 1악장에서는 날카롭고 자유분방하게 찌르는 벌이라면 2악장은 세상을 초월한 듯 명상적이었고 3악장에서는 저음현을 어느 정도 까지 긁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종잡을 수 없는 루바토 덕에 차이콥이 마치 현대음악 처럼 들렸다. 세상에 이런 바협은 없었다 이것은 차이콥인가 쇤베르크인가.


비창. 1악장의 2주제가 너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어제 느꼈던 그 섬세한 프레이징, 음표 하나하나에 정성과 감정이 담겨있는 연주였다. 쿠렌치스의 능력은 파격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 디테일에 대한 집착에 있다. 눈물이 핑 돌 수밖에 없었다. 신파와는 거리가 멀었다. 너의 눈물을 뽑아버리고 말겠다고 착즙하는 신파 영화가 아니라, 그저 화면의 구성과 화면에 담긴 배우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한 감정이었다. 1악장 재현부 투티에 나오는 트롬본의 포르티시시모는 심연의 괴물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 뒤로 인터메초 같이 흘러가는 2악장이 이어졌다. 3악장은 역시 자신의 해석대로 너무 과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채로운 소리를 들려주며 오버하지 않았다. 4악장은, 내겐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별과도 같았다. 이 마지막 악장을 들으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쿠렌치스가 말하는 것은 내가 경험한 것을 넘어서는 감정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모든 힘을 쏟아낼 수 있을까.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도 쉽지 않을 텐데 이토록 고통스러운 에너지를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곡이 끝나고 쿠렌치스의 손이 내려가기 까지 30초를 넘는, 어쩌면 1분 가까이의 정적이 이어졌다.


내가 받은 인상으론 쿠렌치스와 악단의 컨디션이 최고의 상태는 아니었다. 투어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랬을까. 오사카 페스티벌 홀 역시 너무 넓어 소리를 내기에 좋은 홀이 아니다. 걱정했던 것 만큼 끔찍하진 않았지만 울림이 부족했다. 하지만 1악장 까지만 하더라도 칼같은 앙상블과 명확한 아티큘레이션이 들었는데 3악장에서는 음반에서 듣던 앙상블에는 조금 못 미쳤던 걸 보면 체력적인 한계가 온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4악장 역시 1악장과 비교해보았을 때 완벽한 집중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부 입장 전에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명이 롬줄을 연습하는 거 보고 앵콜로 롬줄을 해주려나 싶었는데 역시나 하지 않고 퇴장했다. 단원들이 넘긴 악보에도 하나 더 있고 2부가 끝나고 바로 퇴장한 단원이 몇명 있는 걸 봐서는 준비했었지만 피로 상 넘긴게 아니었을까 싶다.


기대가 엄청 큰 만큼 아쉬움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잊지 못할 순간들이 많았다. 다음엔 언제 다시 쿠렌치스 공연을 볼 수 있을까.




팬질 후기.


어째 음악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진도가 안 나간다. 어제 느꼈던게 똑같이 적용되는 부분이 많았고, 뭐 다 써봤자 거의 대부분 음반에 있는 스타일과 비슷하고 세부적인 차이가 있는 정도였다. 


자 그래서 다시 한과 이야기로 넘어가서. 이게 평소 같았으면 생각도 못했을 짓인데, 누군가 직접 세세한 가이드를 주니 두려움없이 실행하게 됐다. 일단 한과 맛있다는 가게 부터 좀 찾아보고.. 캐리어에 곱게 담아갔다. 보자기 싸는 법도 좀 찾아보고 편지랑 같이 담아서 전달했다. 편지는 휘리릭 써내려갔다. 사실 전하고 싶은 말은 쿠렌치스 랩 중계 엄청 잘 보고있고 (그러니 제발 계속 쭉 해달라) 한국에서 초청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한국 관객들 엄청 열광적이니 너도 맘에 들거다 제발 좀 와달라 라는 이야기였다.

리허설 끝나고 저녁먹고 식후 땡으로 단원들이랑 한과를 나눠먹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4시 쯤 산토리홀에 가져갔다. 출연자 대기실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이거 어떻게 전달하는 거지 걱정했지만, 보자기 싸들고 산토리홀 입구에 나타난 나를 보고 기획사 직원이 먼저 나와서 물어보더라. 전해주겠다고 내 이름도 적어갔다. 

과연 쿠렌치스랑 오케 단원들은 한과를 먹었을까?? 공연 때 보니 단원들 표정이 좋아보이는데 거기에 내가 선물한 한과의 영향이 티끌 만큼은 있지 않을까?? 혹시 한과가 맘에 들어서, 아니면 일본까지 찾아온 팬이 잇다니 한국에 투어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조금은 해보지 않았을까? 그런 온갖 뇌내망상을 펼쳐봤는데... 


일본 공연장은 보통 커튼콜 촬영도 막는 편이다. 그렇다고 또 얌전히 지키면서 사진한장 없이 돌아갈 놈이 아니라, 직원이 제지하기 전에 잽싸게 찍을 걸 목표로 했다. 그런데 내 바로 옆이 어셔 자리라.... 머리 속으로 쿠렌치스가 어디에 서있을 때 사진을 찍을지, 카메라 세팅은 뭐로 해둘지 다 정해놓고 기다렸다. 먹이감을 포착하는 심정으로, 아 이게 아니구나 여튼 한번의 기회로 사진을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찍었고 다행히 몇장 건졌다. 일본 관객들은 신기하게 정말 커튼콜 때 사진찍는 사람이 아예 없더라. 


공연이 끝나고 나서 사인을 받으러 어딘가로 가봐야했다. 지휘자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되냐고 열심히 붙잡고 물어봤다. 내 선물 전달받아서 날 기억하던 직원이 여기서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나가서 왼쪽 계단으로 내려가면 출연자 출입구가 있다고 사람들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줬다. 혹시 산토리홀에서 싸인받으려는 분들 메모해두세요. 산토리홀 출연자 출입구는 건물 왼쪽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서 지하 주차장으로 쭉 내려가면 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갔는데 나를 기다리던 광경은 이거 였다.

저기요???? 이게 뭐죠??? 뭐 어디서 정식 사인회라도 한답디까?????


그냥 지휘자 사인받겠다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미 저 정도였다. 아니 저게 말이되냐고ㅋㅋㅋㅋㅋ 예당에서 종종 사인 받아보려고 기다린 적 있지만 저렇게 많이 기다리는 건 처음본다. 아니 카우프만이 파리 리사이틀 끝냈을 때도 기다리던 사람이 저렇게 많진 않았다. 그리고 왜 다들 알아서 줄을 서있는뎈ㅋㅋㅋㅋㅋㅋㅋ 저 장면은 이날 깜짝 차바협 앵콜을 보여준 악장이 나와서 (가장 오른쪽에 갈색 코트를 들고 있는 사람) 줄 서있던 사람들이 쪼르르 달려가서 악장한테 사인받을 줄 선 장면이다. 이것이 일본 팬의 질서입니까..


쿠렌치스를 보러갔던 두번 공연 모두 그렇게 어렵지 않게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샹젤리제에서는 대기실 까지 찾아갔는데 나처럼 그냥 친분 없이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어보였다. 그 좁은 복도에 다 모일 수 있었으니 10명이나 됐으려나. 슈투트가르트에선 나 포함해서 달랑 두명이었는데!!! 난 그때 쿠렌치스가 인기 별로 없는 줄 알았지.... 그냥 슈툿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겐 코르넬리우스 마이스터나 단 에팅거 처럼 흔한 동네 지휘자였을 뿐.... 

이 줄을 보는 순간 틀렸다 싶었다. 놀라운 건 사람들이 1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안떠난다는 거다. 사람들이 좀 떠나면 존버로 승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꿈도 희망도 없다. 심지어 중간부턴 직원이 나와서 사인 못해줄 것 같다는 공지를 했는데도, 떠나긴 커녕 택시 주위로 몰려들어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기다렸다.




그 와중에 내 눈에 띄인게 있었으니... 


내 선물이 요기 있넹? 보통 때였다면 저걸 보고 아무 생각도 안 들었겠지만, 지금 보니 저게 다 선물이구나 바로 알게 됐다. 선물한 사람이 저렇게 많았구나ㅋㅋㅋㅋㅋㅋㅋㅋ 세상은 넓고 팬들은 많습니다. 거기다 저 거대한 캔버스 뭐야 무서워....

일단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아마 열어보지도 않았을 지도..? 아니 저거 너 단원들이랑 나눠먹으라고 준건데... 혼자 저거 다 먹으면 성인병 도집니다ㅠㅠ


그리고 쿠렌치스는 유유히 택시에 탔고, 아무도 사인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허탈한 발걸음을 뒤로하고, 공연이 좋았으니까!! 내가 공연 보러 왔지 사인 받으러 왔냐! 내일은 기회가 있겠징ㄴㄹ ㅁㄴㅇㄹ 




그렇게 오사카 공연이 끝나고 또 한번 직원들에게 물어물어 출연자 출입구에 도착했는데....

거짓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ㅇㄹㄴㅇㄹㅇㄴㄹㅁㄴㅇㄹㅁㄴㅇㄹㅁㄴㅇㄹ

솔직히 이미 한번 퇴짜 맞은 사람은 우선권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ㅠㅠ 멀리 비행기 타고 와서 선물도 조공했는데 이건 좀 아니잖아여 ㅎ그흑

아니면 관계자가 '약속 잡았냐' '무슨 관계냐'라고 물어봤을 때 당당하게 후렌드라고 거짓말을 쳤어야 하나.... 마 내가 인마! 느그 지휘자랑!! 파리에서도 만나고!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보고! 어제 한과도 주고! 다 했어! 편지에 제발 대기실로 찾아가게 해주세요 라고 썼어야 하나보다.

어제는 지하 주차장이기라도 했지, 오늘은 그냥 야외다. 서울에 비하면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1시간 동안 꼼짝없이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손발이 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에이 이렇게 엄동설한에 기다리는 팬들을 그냥 보내진 않겠지... 직원이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줄을 확인하는걸 보니 대충 몇명쯤인지 확인해보는 것 같았다. 존버는 승리한다!!!! 

퇴근하는 단원들도 그렇게 길게 서있는 줄을 보고 신기한지 핸드폰으로 영상 찍어가더라ㅋㅋㅋㅋ 제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무지카 에테르나 백스테이지 채널에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직원이 나와서 무슨 말을 하더니 사람들이 다 포기하고 떠났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한건지, 떠났다고 한건지, 혹시 구라는 아닐지, 믿기지 않아 건물을 열심히 배회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흐긓거어흑흐억읗겋읗엏윽그흑흑ㅎ겅헝헝


뭐 근데 솔직히 싸인 안 해줘도 할 말은 없긴 하지만... 스미다에서인가 분카무라인가에서는 아예 코파랑 둘이 사인회도 해줬던데... 혹시나 만나면 한국 투어 관련돼서 아는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다음에 쿠렌치스 보러가면 일본에서 너 보려고 두 시간 동안 기다렸는데 두 번 다 못 만났다, 미안하면 제발 한국 컴온이라고 해야겠다. 쿠렌치스가 한국에 오게 된면 저의 노력과 희생도 바닷물의 눈물 한 방울 만큼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십쇼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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