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입석으로 보려고 했다. 미스터 네트렙코가 나오는데 100유로 이상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한번쯤 입석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살이라도 젊을때 입석을 봐야하지 않겠나 싶었다. 티켓 대행사와 메일 주고받으면서 나름 친분이 생겨, 혹시 안드레아 셰니에 남은 티켓은 어디냐, 입석을 살까했는데 자리 괜찮은게 있으면 사겠다고 했다. 남은 자리가 박스2열이라 그냥 입석 사겠다니 늦어도 오후 2시까지는 가는게 좋을 거라고 충고해줬다. 1 입석을 얻으려면 1 까진 가야할 거고, 기다릴때 의자를 사려면 좀더 일찍 출발해야했다. 잠만 자고 나면 점심 먹고 그냥 죽치고 기다리며 폰으로 무영녀 영상 보며 시간을 때우면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차적응 때문에 아침에 눈이 떠지면 다시 자기가 힘들었다. 

 

하루전날부터 쿨투랄에서 공연 취소표가 나오는지 확인했다. 정확히는 예매사이트에 커미션을 받고 판매할 티켓으로 올리는 형태인것 같다. 제일 윗등급 얼빠석들도 나오는 거 보고 취소표가 꽤 나오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100유로 밑이면서 음향 구린 박스석 2열을 피한 자리는 계속 나오지 않았다. 운좋게 꼭대기층 중앙 자리 표가 난걸 아침에 발견하고 고민 좀 하다가 결제했다.

 

네트렙코 나오는거라 무조건 매진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표가 많이 남았다. 공연장 바깥에는 티켓 팔겠다고 티켓 들고 서있는 사람이 10명은 넘어보였다. 네트렙코가 빈에서 자주 공연하니까 그런건지 아니면 남편 네트렙코라서 거르는 건지...

 

네트렙코를 보는 건 두번째다. 저번에는 0.5 공연 정도 봤다. 루체른에서 잘츠부르크 가는 기차에서 잠들어서 다시 루체른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에...... 공연장에 도착했을 땐 트로바토레 2막 끝부분이었다. 빈슈타츠오퍼와 네트렙코 모두 내겐 패배의 아이콘이었는데 오늘은 무탈히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사실 오늘도 위기는 있었다. 평소에도 속이 안좋아져 급하게 화장실가는 경우가 많은 편인데, 기름진 파스타를 두끼 연속 해먹었더니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2시간밖에 안되는 오페라에 인터미션이 두번이나 있었고, 다행히 첫번째 인터미션 때 신호가 왔다. 처음에 1막 끝나고 인터미션 할 때는 무슨 시트콤도 아니고 30분 하고 쉬는 건 뭐냐고 속으로 궁시렁대고 있었는데 화장실에 쳐박혀 슈타츠오퍼의 혜안에 감동했다. 1,2막 스트레이트로 갔으면 진짜 중간에 100퍼 뛰쳐나왔을 상황이었다. 두번째 인터미션에도 화장실에 쳐박혀있었고 다행히 3,4막에는 별탈이 없었다. 버텨줘서 고마워 내 소화기관들아....

 

각설하고, 남편 네트렙코 빼면 모두가 훌륭한 공연이었다. 네트렙코는 울림통이 달랐다. 그냥 성량이 크다고 느껴지는게 아니라 선명하고 또렷하게 전달된다. 역시 실연 깡패. 비브라토가 과하다거나 이런것도 전혀 없었다. 다만 마달레나라고 하기엔 저음에서 살의에 가까운 포스가 너무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특유의 어두운 음색도 공연장에서 들을때가 가장 좋다. 맘마 모르타는 역시나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 객석 집중도도 엄청났고, 가사 스토리에 맞게 감정선 잘 잡아주고 마지막 고음까지 잘 터뜨려줬다. 네미코 - 맘마 모르타를 연달아 듣고나니 이제 보다가 속이 안 좋아져 긴급 퇴장하더라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라르 역을 맡은 가수는 조르제 페테안Geroge Petean이라고 하는 루마니아 출신의 가수였다. 찾아보지도 않고 갔는데 생각보다 아주 잘했다. 1막 첫 아리아는 괜찮네 수준이었지만, 네미코 델라 파트리아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혁명의 이상을 추구하던 제라르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냈다. 숭고한 느낌이 팍 살아나는 노래였다. 스케줄을 보니 한창 전성기를 달리는 것 같다.

남편 놈은 처음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펑크님이 예전에 이 놈 노래는 돈 주고 듣는게 아니라 돈 받고 들어야한다는 리뷰를 쓴적이 있는데, 그래도 1막 아리아는 기대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하지만 이 놈이 노래를 더 할 수록 알게됐다. 내가 기대치가 무슨 돼지 멱따는 수준이어서 생각보다 잘한다고 했던 것 뿐... 성량도 좋고, 고음에 삑사리가 나는 것도 아니고, 호흡이 과하게 짧은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박수를 받는 게 이해가 간다. 문제는 목소리가 썩 매력적이지도 않은데, 그마저도 시시각각 지 멋대로 변한다는 점이다. 나도 정확히 발성에 대해선 알지 못하지만, 흔히들 파사지오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게 얘가 아닐까 싶다. 도대체 노래하면서 음 하나하나마다 발성이 맺히는 포인트가 다르다. 그래서 고음하나 길게 뽑아낼 때는, 뭐 그게 목을 너무 조여서 내는 소리라 하더라도 욕을 할 만한 수준까진 아니다. 그런데 프레이즈 단위로만 보아도 한 프레이즈 안에서 목소리가 계속 바뀐다. 진짜 들어줄 수가 없어... 이게 특히 다른 가수와 주고받는 대목에서 티가 훨씬 많이 난다. 네트렙코가 아주 저음에서 목소리 톤이 더 특이해지는 건 있어도 노래할 때 음색을 일관되게 이어가고, 페테안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 놀랄 만큼 매끄러운 노래를 들려줬다. 그런데 옆에선 뭐 음 하나하나 따로 내고 있는 수준이니.. 4막 아리아를 부를 때는 눈을 감고 머리속으로 열심히 집중해서 테너의 목소리를 삭제하고 오케스트라 반주에만 집중했다. 마지막 이중창을 듣고 있으면 네트렙코가 남편을 캐스팅하는 이유는 자기가 완벽하게 돋보이기 위함이 아닐까 싶었다. 네트렙코도 귀가 있는데 저게 잘하는 걸로 들리진 않을 거 아냐??

 

공연을 기대한 이유 중 하나는 아르밀리아토의 지휘였다. 이 시대 최고의 이탈리아 반주쟁이가 아닐까 싶다. 잘나가는 오페라 지휘자 중에 이렇게 오페라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 검색하다가 몇가지 당황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밀리아토는 영문 위키 페이지도 없다. 심지어 내 블로그에도 아르밀리아토 영상물 후기가 하나도 없다ㄷㄷ 반주 음반도 많고, 굵직한 오페라 갈라 맡은 게 많아서 당연히 뭐 쏟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역시 반주쟁이는 주목을 못받는구나 싶다.

그건 아무래도 아르밀리아토의 지휘 스타일과도 연관이 있을 거다.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것보다 가수에게 맞춰주는 걸 정말 잘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가수의 목소리를 덮지 않으면서 가수가 부르고 싶은대로 호흡을 따라가주는 모습이 돋보였다. 그러면서도 오케가 치고 나갈 수 있는 극적인 부분에서는 팍팍 달려주는 것도 좋았다. 오페라 계의 언성 히어로가 아닐까 싶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역시 오케. 탑티어 극장에서 이탈리아 후기 오페라를 보는게 이런 느낌이구나. 2막에서 스네어를 쳐도 소리가 다르고 전체 소리 밸런스도 탁월했다. 호른이 포르티시모로 나올 때 그 꽉차는 호른 음색은 역시 빈이구나 싶다. 맘마 모르타의 첼로 솔로는 정말 기가 막혔다. 눈물 좌르륵... 여기에 오보에 솔로까지 다들 잘난 실력으로 울어재끼더라. 내가 재작년에 헨그 봤을 때 기량은 좋아도 대충하니까 각이 안 산다고 했는데 각잡고 하면 진짜 다른 오페라 오케스트라랑 비교할 수가 없었다. 

 

솅크 연출은 그냥 럭키 코리안 정도라고 해야하나. 한국 민간 오페라단에서 셰니에를 올리면 이렇지 않을까. 제피렐리 연출은 뭐 스케일이라도 크고 보는 맛이라도 있지 이 프로덕션은 무대가 정말 휑하니 드러났다. 1층에서 보면 좀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꼭대기에서 보면 그냥 드넓게 펼쳐진 바닥밖에 안보인다. 무대를 1막부터 4막까지 완전 평면 2D로 사용한다. 그나마 1막은 오페라 극장을 그려낸 벽면 회화가 괜찮기라도 했지 뒤로 가선 그런 것도 없다. 제일 웃긴건 마지막 장면. 단두대로 나아가든 서서 기다리던 죽음을 맞이하는게 보여야하는데 그냥 수레에 올라타서 뒤로 퇴장한다. 뭐 꽃가마 타고 가세요???

 

공연이 끝나고 박수가 계속 나와서 불이켜지고 관객 대부분이 퇴장하고 나서도 두번이나 더 나와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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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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