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음악적인 연출이 가능할까 싶은 서곡 연출



연달아 같은 작품을 보고 후기를 쓰는 건 처음이다. 당장 이 오페라를 다시 보고 싶을 만큼 한 번에 반한 셈이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 파파노 지휘, 헤어하임 연출, 브라이언 히멜, 어윈 슈로트, 미하엘 폴레 등 날 설레게 하는 이름이 많았다. 그만큼 기대도 컸다. 


네덜란드 오페라도 훌륭한 단체이지만, 파파노가 이끄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대적할 수 있는 곳이 몇 없는 단체다. 파파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에 있어서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지휘자다. 무티의 화끈함과 아바도의 정교함을 두루 갖춘 지휘자로 동년배에서는 따라올 적수가 없지 않을까. 최근 공연한 파르지팔 역시 대박이었다는데 아직 찾아보진 못했다. 서곡에서부터 정교한 앙상블을 보여준다. 현악기의 깔끔한 음정이 네덜란드 필과 꽤나 비교된다. 듣고 있으면 행복한 앙상블이다. ROH오케스트라가 런던의 다섯 오케스트라보다 더 뛰어나지 않을까 한다. 합창단의 폭발력도 훌륭하다. 3막 피날레는 압도적이다.


브라이언 히멜은 이제 그랑 오페라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트로이 인, 악마 로베르에 이어 시칠리아의 앙리 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네덜란드 오페라의 프리츠 역시 훌륭했지만 히멜은 정말 딱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다. 베찰라 처럼 목소리가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데 베찰라의 가벼움보단 무게감이 있다. 거기다 또 프랑스어 딕션은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지. 프랑스인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명확하다. 사실 실제 프랑스어 발음과 성악 발음이 또 조금 다르긴 한데, 노래에서 프랑스어의 발음과 느낌을 어떻게 잘 살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미하엘 폴레는 바그너 영상에서 자주 접한 가수다. 베크메서나 작스, 카스파를 부르는 것을 보았었는데 악역에 어울리는 목소리다. 얼굴의 생김새와 주름 부터가 잭 니콜슨을 연상시킨다. 나만 그렇게 느낀건가 해서 구글링 해보니 역시 비슷하게 느낀 사람들이 있다. 일단 노래와 연기는 걱정을 안해도 될텐데 과연 딕션은? 세상에 정말 말도 안 나오게 잘하더라. 아니 이 아저씨 프랑스어 까지 잘하면 어쩌자는 거죠. 심지어 오페라 베이스를 뒤져봐도 프랑스어 공연 기록도 별로 없다. 독일 극장에서 구르다보면 프랑스어 딕션 따윈 문제도 아닌 건가. 3막 아리아도 아주 훌륭하다. 


소프라노 리안나 하루투니안Lianna Haroutounian 은 약간 실망스럽다. 2013년에 ROH에서 하르테로스 대타로 돈 카를로 엘리자베타를 불렀다는데, 나름 성공적이었나보다. 문제는 돈 카를로와 달리 이번에는 프랑스어라는 거다. 프랑스어를 못하는 가수가 프랑스 오페라를 부르는 건 정말 들어주기 힘들다. 거기다 성량까지 부족한데, ROH의 녹음은 가수 개별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차이를 보정해주지 못한다. 노래가 나쁜 건 아니지만 딕션이 나쁜 노래는 정말 제끼고 싶다.


어째서 유튭에는 딕션 구린 두 가수 영상만 있는 걸까.



기대했던 어윈 슈로트도 배신을 한다. 돈 조반니나 레포렐로 때 보여준 번뜩이는 재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래도 안어울리는데 프랑스어 딕션이 심각하게 안좋다. 그냥 Mon 조차 제대로 발음을 못한다. 2막 아리아를 부르는데 차라리 합창단 딕션이 더 정확하게 들리더라. 찾아보니 프랑스어 배역은 거의 안부르고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 카르멘의 에스카미요만 가끔 부르는 정도인데 제발 프랑스 오페라는 맡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인의 흑역사를 열심히 광고하는 어윈 슈로트의 유튭 계정. Mon pays도 제대로 발음 못하는 애국자라니 오호 통재라.



프랑스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점은 프랑스 어로 노래한다는 것임을 실감했다. 특히 주연 중 두 명이 딕션이 매우 좋고 두 명이 매우 안 좋다면 더더욱 비교가 돼서 미칠 지경이다. 저 가수 딕션이 구린건지 내가 못 알아듣는건지 계속 고민하다가 저 가수 딕션이 구리다면 왜 이상한 건지를 분석하게 된다. 불어 자막을 켜놓고 보면 확실하겠지만 영어 자막으로 보고 있는데 일단 가사가 들려야 발음을 어떻게 이상하게 한 건지 알지... 일단 무슨 단어를 노래하는지도 모르겠으니 답답함만 더 커진다. 하지만 히멜과 폴레가 나오는 장면은 행복함 그 자체다. 그래서 3막의 이중창은 정말 정말 훌륭하다. 이 장면이 끝나고 하루투니안과 슈로트의 비중이 커질 수록 암담해진다. 테너와 바리톤은 자기가 부르는 노래 음절 하나하나마다 이게 바로 프랑스어다!!!!라고 외치고 있는데 소프라노와 베이스는 이게 이탈리아어일까 불어일까 알아맞춰보세요 하는 것 같다. 


히멜 팬심이 무럭무럭 생겨서 유튜브 좀 찾아봤는데 메트에서 부른 라보엠은 영 꽝이다. 노래 습관 자체가 프랑스어에 최적화 된 것 같다. 프랑스 오페라만 부르면 정말 이 쪽의 최고존엄이 되지 않을까. 



헤어하임의 연출은 글쎄. 잘츠부르크 명가수를 보고 헤어하임도 '덜' 특별할 때가 있구나 싶은데 이번이 그렇다. 생각보다 너무 얌전하다. 이야기의 배경을 12세기 시칠리아가 아니라 19세기 파리 오페라, 그러니까 시칠리아가 초연되던 당시의 시기로 바꾸었다. 억압받는 시칠리아인은 오페라 극장의 가수와 발레단, 프랑스인은 군인들로 묘사했다. 일단 이런 컨셉 자체는 상당히 효과적이다. 이야기의 개연성도 전혀 떨어지지 않으며, 오페라를 보러 온 관객에게 오페라 극장이 고통받는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운가. 서곡 역시 훌륭하게 활용했다. 프로시다를 발레 감독으로 묘사하여 발레단을 연습 시키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서곡의 흐름에 따라 군인들의 습격, 그리고 몽포르가 강간을 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극 전에 일어나는 사건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해주는 한편 프로시다가 2막에서 뜬금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발레단을 성적 노리개로 빼앗겨버린 인물이 된다. 거기다 서곡에 맞춰 발레단이 춤추는 장면은 순수하게 재밌다. 헤어하임은 정말 음악을 무대 위에서 잘 표현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연출가다.


문제는 이 이후에 너무 얌전해진다는 것이다. 특별한 장치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명가수 때와 비슷하다. 딱히 헤어하임이 아니라 다른 연출가도 시도할 수 있는 연출이랄까. 이야기의 전체 틀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 헤어하임의 특기인데 상당 부분의 문맥이 원래와 똑같이 유지된다. 마지막 피날레에 관객석을 비추는 것 역시 약간 무리수로 다가왔다. '이 억압받는 오페라 극장의 원흉은 바로 당신들과 같은 관객이었습니다' 라는 느낌인데, 이 메시지 자체는 괜찮지만 앞선 장면들과 잘 연결이 안된다고 할까. 그래도 더 헤어하임스럽지 못해서 아쉬운 거지 전반적으로 괜찮은 연출이다. 

아 참고로 3막 2장의 발레 '사계'는 삭제됐다. 



헤어하임의 연출과 별개로 블루레이 부클릿 코멘터리가 상당히 훌륭하다. 작품의 배경과 음악적인 면, 프로덕션이 지적하는 바를 정말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준다. 진실을 창조하겠다는 베르디의 목표, 태생은 프랑스인이라고 볼수 있는 베르디의 과거라든가 당시 파리 오페라에서 발레단이 갖는 의미 등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한다. 


반대로 스페셜 영상은 유튭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파파노가 늙어서 은퇴하면 가둬놓고 오페라 해설 영상을 찍어내야 한다. 왜 항상 감질맛 나게 조금만 설명하고 끝내냐고.



훌륭한 공연을 두 가수가 말아먹었다. 유명한 스타는 없어도 차라리 큰 구멍이 없는 네덜란드 오페라에 한 표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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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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