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도와줄 뻔한 안나 볼레나.
안나 볼레나(앤 불린)는 흔히 마리아 스투아르(매리 스튜어트)다, 로베르토 데브뢰(엘리자베스 1세 애인)와 함께 여왕(Queen) 삼부작, 혹은 튜더 삼부작으로 묶이기 마련이다. 잡설이지만 앤 불린은 여왕이 아니라 왕비라 한국어로 묶기가 좀 애매하긴하다. 어차피 삼부작을 관통하는 인물이 엘리자베스 1세라 크게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삼부작은 벨 칸토 오페라의 전성기 이후 묻혔다가 위대한 프리마 돈나들로 부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존재를 처음 들었을 때 일종의 의구심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처음 듣는 제목인데, 그것도 사랑의 묘약 같은 거나 쓴 도니체티의 작품인데, 여기에 무거운 역사물이지만 벨 칸토 최고의 걸작이라고?
나는 벨 칸토랑 상당히 안 친하다는 걸 누누히 밝혀왔다. 로시니는 이제 꽤나 좋아하지만 벨리니 공포증은 여전하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도니체티다. 확실한 건 도니체티는 벨리니보단 훨씬 괜찮게 들리더라는 것이다. 사실 이 말도 좀 어폐가 있긴 한 게, 도니체티의 대표작인 루치아와 사랑의 묘약을 내가 별로 안 좋아한다. 루치아는 특히 별로 안 좋아한다. 거의 벨리니 급... 농담이 아니라 이 글을 쓰기 전에 루치아에 대한 생각을 풀어가다가 작곡가가 벨리니였던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도니체티에 대한 시각이 바뀐 게 라 파보리트 이후 연대의 딸에서부터였다. 연대의 딸을 듣고 나서부터 도니체티는 까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처음으로 여왕 삼부작에 도전했다. 블로그 글을 찾아보니까 지금까지 벨리니는 세 편 썼는데 도니체티는 두 편 밖에 안 썼더라고? 로시니는 여덟 편으로 푸치니 일곱 편 보다 많다. 벨칸토 나름 많이 봤는데 도니체티만 왕따시키고 있었던 셈이다.
도니체티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자면 1막은 정말 힘들었다.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저 아리아의 연속일 뿐이었고 아리아도 대체로 카발레타 없이 느린 곡 위주로 편성돼있다. 총 2막 3시간 가량의 오페라인데 앞의 한 시간 동안 갈등의 밑밥만 깔아둔다.
여기서 잠깐 줄거리 설명. 안나 볼레나는 실제 앤 불린의 이야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런 종류의 궁정 치정극 + 역사물이라고 하면 돈 카를로가 대표적일텐데, 돈 카를로는 구라가 많이 들어가있잖아. 사실 기본 카를로-엘리자베트의 러브 라인부터 구란데 뭐. 하지만 안나 볼레나는 그렇지 않다. 귀찮으니 영어식 표기로 다 표기하면, 헨리 8세와 앤 불린이 결혼해서 살다가 헨리 8세(엔리코)의 애정이 식고 앤 불린의 시녀인 제인 세이무어(조반나)와 불륜 관계가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앤을 버리고 제인이랑 결혼하고 싶은 헨리는 앤을 처치할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앤의 전남친 리처드 퍼시(리카르도)를 런던으로 불러들이고, 앤이랑 퍼시랑 다른 시동이랑 같이 있는 순간을 급습해 앤을 간통죄로 고소한다. 그리고 앤 처형당하면서 끝남.
사실 세계사도 이제 별 기억 안나고 시덥잖은 궁정 치정 이야기 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이거 되게 유명한 이야기였다. 나무위키에 아주 친절하게 설명돼있다. 난 사실 저 이야기 중에서 왕의 새 여친인 제인이 앤 시녀라는 설정은 허구일 줄 알았다. 너무 뻔한 막장이잖아ㅋㅋㅋㅋ 근데 진짜였다... 앤의 전 약혼남으로 나오는 퍼시도 실존 인물이다. 다만 다시 돌아와서 앤이랑 뭘 해보려다가 죽는 건 허구. 대신에 앤이 간통으로 몰려서 죽는 건 사실이다. 심지어 간통 혐의로 몰린 대상 중엔 앤의 남동생도 있는데, 오페라에도 똑같이 등장한다. 쟤는 왜 나올까 싶었고, 쟤는 무슨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건지도 감이 안 왔는데 (퍼시와 시동이야 앤 침실에 있으면 이상하지만, 앤 남동생이면 있어도 상관없잖아??) 실제 역사가 너무 어메이징해서 그런 것이었다. 이걸 보고 나니까 드라마 튜더스 정주행하고 싶어졌음..
여튼 1막 초반 1시간 가량은 이 설정을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물론 그 아리아들이 적당히 예쁘기야 하지만, 카스타 디바도 별 감흥없이 듣는 놈에게 처음 듣는 벨 칸토 아리아면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게 바로크 오페라보다 답답한 극 진행을 참고 견뎌야한다. 퍼시랑 앤이랑 옛날 감정 이야기하는 장면 까지도 별 긴장감이 없다가, 헨리가 급습해서야 이제 좀 오페라 다워진다.
2막은 완전 딴판이다. 도니체티가 이런 음악을 썼어? 싶을 정도다. 특히 제인이 앤에게 왕과의 불륜 관계를 이야기하는 듀엣 장면은 듣는 사람을 완전히 압도한다. 아니 레치타티보가 어떻게 이렇게 숨 막힐 수 있지. 이 듀엣은 진검 승부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여자 둘이 이렇게 살벌하게 다투는 장면이 어느 오페라에서 나왔더라. 노르마와 아달지사 관계가 그나마 비슷할텐데 노르마의 분노도 앤의 분노에 비할 바가 아닌 듯 하다.
여기에 헨리와 앤이 다투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며 마지막 앤의 광란의 장면까지 모두 훌륭하다.
빈 슈타츠오퍼 역사상 처음으로 올리는 안나 볼레나 답게 캐스팅 역시 화려하다. '안나' 네트렙코가 타이틀 롤로 데뷔했고 제인 역에는 엘리나 가랑차, 헨리 역에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퍼시 역엔 멜리가 열창한다. 와 한 명 빼고 내가 다 좋아하는 가수잖아!
간단하게 평을 하자면 가랑차가 가장 안정적이고 뛰어나며, 네트렙코와 멜리는 최근만 못한 것 같고 다르칸젤로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랑차는 메조 치고 목소리가 어두운 편이 아니라 목소리가 아주 어두운 네트렙코와 반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음역에서도 둘이 치고받는 것이 되는데 상당히 어울린다. 가랑차의 장점은 어떤 피치, 어떤 다이나믹에서도 균질하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능력이다.
네트렙코는 요즘에 비해서 약간 목소리가 충분히 어둡고 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최근 들어서 네트렙코의 목소리는 소름끼칠 정도로 어두워졌는데, 이 공연에서는 아직 그런 느낌이 확실히 살아나지 않는다. 그리고 네트렙코의 장점은 강렬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곳에서 더 잘 드러난다. 위의 듀엣에서도 화를 내는 부분에서 감정의 분출이 목소리에서 자연스레 묻어나온다. 콜로라투라 고음이 나올 때 소리를 살짝 쥐어짜내는 느낌도 있다.
멜리 역시 요즘의 그 압도적인 느낌이 없다. 투토 베르디 시몬 보카네그라나 가면 무도회에서 나타난 그 느낌이 아니다. 아직 멜리의 실력이 꽃피기 전인가 보다 했는데 투토 베르디 공연도 2010년 2011년이었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네트렙코도 그렇고 멜리의 목소리가 이렇게 잡힌 게 녹음 탓인가 싶기도 하다. 아마 컨디션 탓일 것 같긴 한데, 목소리가 폭풍 간지인 멜리에게 이 점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내가 이 공연이 '우주가 도와줄 뻔 했다'라고 한 건 두 사람이 내 예상을 깼기 때문이다. 한 명이 바로 다르칸젤로다. 나에게 다르칸젤로란 바리톤의 젤코 루치치 같은 존재였다. 도대체 얘가 왜 잘나가는 건지 이해가 안되는 케이스. 노래가 좋은 것도 아니고, 연기는 정말 말짱 꽝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피가로나 돈 조반니나 둘카마라나 같은 인물 처럼 표현해내는 재주가 있다. 노래도 특별히 잘 한다는 느낌을 못 받았는데, 그렇다고 목소리가 매력적인 것도 아니다. 잘츠 갔을 때 돈 조반니를 듣기도 했지만 얘가 별로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느낀 게 얘 정도면 잘 생긴 거구나? 생각보다 얼빠가 꼬일 만한 외모였다. 그 외모를 살릴 만한 연기를 못해서 그렇지...
여튼 이 다르칸젤로가 안나 볼레나에서 인생 공연을 펼치는 듯 하다. 일단 목소리에 영혼이 실려있다. 항상 재미없게만 부르던 가수가 목소리가 흔들리면서 감정이 뚝뚝 떨어져 나온다. 이게 혹시 그 실수로 명연이 된다는 그런건가... 목소리가 상당히 멋있게 울리면서 훌륭한 가수로 탈바꿈한다.
여기에 다르칸젤로의 밋밋한 연기도 헨리 8세 역에는 자연스럽게 바뀐다. 얘가 피가로나 돈 조반니, 레포렐로, 둘카마라 처럼 능청맞게 이리저리 활약하는 역할을 잘 못해서 그렇지 헨리8세처럼 찌질한 불륜남은 정말 잘 어울린다. 내추럴 본이야 아주. 그 특유의 변함없는 표정도 이 작품에선 '부인 시녀랑 놀아나면서 부인 앞에서 철판 깔고 큰소리 치는 뻔뻔한 인간'을 만들어준다.
1막 헨리와 제인 듀엣. 5분 25초 경에 제인이 부르는 선율이 이발사 2막에서 Buona sera~ mio signore 하는 거랑 똑같지 않나??
안나 볼레나랑 싸우는 장면들이 더 재밌긴 한데 그 부분 영상은 못찾겠다.
예상을 깬 다른 한명은 바로 촬영 감독 브라이언 라지다. 악명 높은 그 분께서 카메라를 든 이상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카메라 워크가 상당히 정상적이다. 과다한 클로즈업도 없고, 촬영 각도도 상당히 정상적이다. 가끔 측면샷이 나오긴 하는데, 두 인물의 표정을 한 앵글에 담기 위한 장면 정도? 무대 전체샷도 생각보다 많이 보여준다. 이거 머신 러닝으로 카메라 워크 돌려보면 얘는 절대 브라이언 라지 거라고 못잡아낼 듯.
안나 볼레나를 보면서 느낀 건데, 내가 인물 간의 미묘한 감정선에 꽤 무감각하구나 싶다. 예를 들어서 하일트 님 블로그에서 돈 카를로 이야기를 보면(저것 말고도 다른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못 찾겠다) 대사 한 줄 한 줄, 가수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나오는 그 감정선들을 정말 잘 캐치해내는구나 싶다.
사실 안나 볼레나 역시 돈 카를로 처럼 인물들이 각자에 대해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감정이 분명하고 일정한 다른 오페라와 '궁정 치정극'이 다른 점은 이 부분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가수들의 표정을 읽을 줄 아는 게 중요한데, 내가 오페라를 나름 많이 봐오긴 했지만 표정을 보고 가수가 연기하고자 하는 캐릭터가 무엇인지 썰을 풀어내는 건 못 하겠다. 앞으로 다른 튜더 3부작을 보면서 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야하지 않을까 싶다. 괜히 잘 이해도 안되는 영어자막 읽겠다고 자막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보다 어차피 내용 별거 없는 거 가수들 얼굴이나 열심히 보는게 남는 거라는 걸 느꼈다.
지휘 이야기를 빼먹을 뻔 했다. 지휘자 이름이 에벨리노 피도Evelino Pidò라는 이탈리아 지휘자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 역시 빈 슈타츠오퍼가 은근히 듣보 지휘자를 많이 쓰는구나 생각했는데, 서곡 들으면서 그 해맑은 웃음과 상큼한 표현에 곧바로 반성했다. 다시는 슈타츠오퍼 지휘자들을 무시하지 않겠습니다ㅜㅜ
추가 영상 4분이 있는데 가랑차가 1막 2막 줄거리를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한줄 요약: 벨 칸토 좋아하는 사람이면 이미 다 구입했을 테고, 안 좋아하던 사람들도 꼭 살만한 타이틀ㅇ
'DVD,블루레이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발리 - 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 (2009년 네덜란드 오페라) (2) | 2016.12.26 |
---|---|
베르디 - 운명의 힘 (2014년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6) | 2016.12.18 |
푸치니 - 제비 (2015년 도이체 오퍼 베를린) (0) | 2016.12.13 |
A. 차이코프스키 - 베니스의 상인 (2013년 브레겐츠 축제 극장) (2) | 2016.12.09 |
베토벤 - 피델리오 (2004년 오펀하우스 취리히) (0) | 2016.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