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올렸던 후기.
블로그로 다 옮기고 정리해야할 것 같다.
이 날의 경험은 나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하룻밤의 공연을 위해 얼마까지 쓸 수 있을까?
정말 벌벌 떨면서 50만원 짜리 티켓을 구입했다. 명가수 플레이 타임을 생각했을 때 티켓값을 공연 시간으로 나누면 그나마 상대적으로 위안이 되긴 하지만 진짜 비쌌다. 돈도 써본 놈이 잘 쓴다는 걸 요즘 느끼고 있다. 사실 공연을 보고 나서 유일하게 남은 부정적인 생각은 '과연 이게 현명한 소비인가'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돈값 했다는 생각도 들긴 들지만, 그렇다고 저런 회의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도 없었다. 좀 우스운 게, 저 걱정만 안하면 공연 관람을 통해 얻은 경험은 정말로 귀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걸 지를려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지르든가, 아니면 지르지 말아야 한다.
글라인드본은 한 편의 훌륭한 오페라를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티켓값으로 알려준다. 우리가 즐기는 예술이 세금 지원 없이 순전히 실질 수혜자인 공연 관람객의 지갑으로만 만들어내는 경우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한번쯤 그걸 직접 체감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저 수많은 예술가들의 시간을 갈아 넣어 내 하룻밤을 즐기겠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행위인지 말이다. 저 짓 몇번 더했다간 내가 파산할 테니 글라인드본에 다시 가는 건 좀 미루겠습니다.
글라인드본에 붙어있는 도시가 루이스다. 저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다. 날씨가 좀 을씨년스러웠다.
드니스가 글라인드본에서 화보를 촬영하고 있다.
커튼콜 사진. 1층 두번째 열이었나.... 돈 지 랄!
글라인드본의 잔디밭.
피트가 낮은데 가림막이 높지 않아 오케스트라가 아주 잘 보였다.
글라인드본 오페라 하우스는 규모가 상당히 작고 모두 목재 마감이라 음향이 아주 훌륭한 편이다.
공연장 로비. 로비 자체가 넓진 않다. 어차피 광활한 잔디밭이 있으니까.
드디어 글라인드본에 왔다.
오페라 영상물을 많이 보는 사람이라면 글라인드본은 정말 친숙한 이름이다. 대부분의 프로덕션이 영상으로 꼬박꼬박 나오고 그퀄리티가 상당히 훌륭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글라인드본 공연 치고 구린건 못봤다.
글라인드본에서 직접 공연을 보기로 한다면, 가장 먼저 그 창렬한 티켓값에 놀라게 된다. 내가 티켓 가격을 잘못 보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도 안되게 비싸다. 가격대가 가장 높은 명가수의 경우, 입석 제외 가장 싼 좌석이 70파운드인데, 로열 오페라하우스 외디프 가장 비싼 좌석이 89파운드인가 되는걸 생각하면 영국 기준으로도 창렬한 가격이다. 물론 페스티벌이 더 비싼건 사실이고 잘츠도 뺨치게 비싸지만… 싼 좌석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진 않았다.
거기다 그 싼 좌석마저도 쥐도 새도 모르게 다 팔려있다. 난 분명 일반인에게 티켓 오픈하는 날 들어갔는데 제일 싼 자리가 200파운드가 넘었다. 30세 이하에게는 별의별 혜택이 있다지만 스탠딩 티켓도 못구했고 선예매 기간에도 예매를 못했다. 찾아보니 내가 메일 수신을 선택하지 않아서 프로모션 코드가 안간거라고 한다. 허허 그런 건 좀 미리 말해주면 안되겠니…..
그래서 진짜 눈물을 머금고 비싼 자리를 샀다. 결제하고 보니 50만원.... 티켓을 사면서 이렇게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티치아티를 과연 이 돈 주고 들을 가치가 있을까 녹음도 찾아서 들어봤다. 이 놈이 나중에 대성해서 ‘야 내가 티치아티 젊었을때 명가수를 직접 들어본 사람이야’라고 말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생각해봤다.
그렇게 큰 맘 먹고 예매해놓고 기다리다가 심심해서 홈페이지 다시 찾아가봤더니 티치아티가 디스크 수술 때문에 하차하고 미하엘 귀틀러라는 지휘자로 바뀌었댄다. 핀란드 국립 오페라 감독이라는데 영상을 보니 영 미덥지 않았다. 핀란드에서 한 명가수 리뷰도 열심히 찾아보았다. 뮌헨에서는 페트렌코랑 카우프만이 명가수를 하고 있는 시즌인데 나는 이 비싼돈 주고 이런 듣보 지휘나 보러가나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일이 있었는데 결국 표를 취소하진 않았다. 명가수니까. 내가 처음으로 본 바그너 오페라였고, 내가 아직까지 유일하게공연장에서 직접 보지 못한 작품이다. 국내에서 초연되긴 요원해보이고, 볼 수 있을 때 봐야 했다.
글라인드본은 드레스코드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어디 페스티벌이나 다들 차려입고 오는 걸 많이 볼 수 있지만 글라인드본은 홈페이지에도 전통이라고 명시가 돼있다. 그래서 양복을 챙겨갈까 고민했지만 바이로이트에서도 안 입은걸 무슨 글라인드본에서.. 구두까지 챙겨가긴 너무 귀찮았다.
글라인드본은 런던에서 한시간 가량 떨어진 루이스 근처에 있다. 루이스 기차역에서 글라인드본까지 셔틀이 있는데, 야속하게도 정해진 시간에 딱 한번만 있다. 택시 타기 싫으면 시간 맞춰 가는 수밖에 없다. 이걸 뒤늦게 알아서 허둥지둥 기차역으로 갔다. 글라인드본 가기전에 점심이라도 때우려고 토스트를 샀는데 마저 다 먹지 못한 채로 셔틀을 타야했다. 다들 정장입고 있는데 나만붉은 빛 재킷을 걸치고 한손에는 먹다 남은 토스트 봉지를 들고 있으니 아무리 철면피라도 남들 시선이 걱정되긴 하더라.
도착하니 정말 처음보는 풍경이 펼쳐진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도시랑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예전에 갔던 구트 임링은 농장에다가 극장을 세워놓은 것 같은데 글라인드본은 그 넓은 땅에 오페라 극장과 부대시설만 있다. 잔디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저 멀리에는 말들이 방목돼있다. 휴양지에서 펼쳐지는 음악축제라고 할 때, 이런 정도로 딴 세상 같은 곳은 처음봤다. 정말로 속세와 단절된 곳이었다.
이번 공연은 2011년 맥비커 연출 프로덕션의 재상연이다. 맥비커의 연출을 썩 좋아하진 않았다. 작스와 에파의 관계를 재조명한걸 빼면 별 아이디어가 없고, 3막에서 화려한 난장판을 만들고 마지막 작스의 민족주의 독백 역시 별 처리를 하지 않은 것 역시 참 ’편하게’ 연출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점에서 연출에 딱히 기대를 한 것도 없었다.
1막 전주곡. 귀틀러가 굉장히 가볍게 접근한다는 평을 들어서 기대를 안하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꽉찬 사운드를 들려줬다. 저음은 매끈하고 윤택있게 강조되었고 호른의 음색은 특히 훌륭했다. 목관이 마이스터징어 모티프를 짧게 연주하는 부분이나, 트럼펫이 깃발 모티프를 연주하는 부분의 아티큘레이션은 굉장히 짧게 통일되었다.
전주곡이 끝나고 막이 올라가자 내가 정말 명가수를 보러 왔구나 실감이 났다. 항상 전주곡의 마지막 코드와 함께 음악이 끝났건만 내 앞에서 명가수 1막이 펼쳐지고 있는 거다.
발터 역은 미하엘 샤데가 맡았다. 내가 비싼 티켓을 샀지만 샤데가 발터를 맡기에는 상당히 구리다는 걸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다. 샤데가 썩 훌륭하지 않다는 건 잘츠 피엘브라스 때도 느꼈다. 그런데 솔직히 요즘 발터하는 사람 중에 카우프만이랑 포그트 빼면괜찮다고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2011년 글라인드본에선 마르코 옌치가 맡았다. 그래도 옌치보다는 샤데가 낫다.
샤데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코에 걸리는 소리가 많은 편이다. 독일어 처리가 상당히 훌륭한 편이라 바그너 오페라에서 유리하긴 하지만 암만 봐도 헬덴테너는 아니다. 이번이 롤 데뷔인 것 같기도 한데, 찾아보니 내년엔 라 스칼라에서 가티 지휘로 또 발터를 부른다. 발터 기근이 뭔지 보여준다.
하지만 다행히도 다른 가수들이 모두 훌륭했다. 1막 초반부를 담당하는 다비드는 경험 부족인지 능청스러운 연기가 살짝 아쉽긴했지만 지루할 수 있는 긴 노래를 다양한 표현으로 소화해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다비드 포르틸로다. 개인적으로 바그너 오페라에 나오는 슈필테너 역(로게, 미메, 조타수, 다비드)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목소리나 표현이나 아주 만족스러웠다.
에파 역의 아만다 마제스키 역시 처음 듣는 가수였는데 곱지만 또렷한 목소리, 심하지 않은 비브라토가 마음에 쏙 들었다. 딕션이나 표현이 다른 사람에 비해 살짝 딱딱하다는 느낌이 있긴 했다. 영상물에서도 항상 에파가 후달리던데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공연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베크메서와 한스 작스가 등장했다. 베크메서부터 먼저 언급하겠다. 요헨 쿠퍼가 맡았는데, 2013년에 도쿄 신국립극장 탄호이저에서 볼프람을 본적이 있었다. 그 땐 O du mein holder Abendstern은 아주 잘했지만 조금 아쉬웠다고 적어놨었다. 최근에 본 뉘른베르크 슈타츠오퍼에서 공연한 명가수 영상을 보았는데, 이 때는 베크메서가 압도적으로 훌륭해서 감탄했다.
오늘 공연에서도 베크메서는 첫 등장부터 ‘아 이 사람은 클라스가 다르다’라는걸 보여준다. 소리를 자연스럽게 내면서도 남들보다훨씬 또렷하게 들리는 성량을 갖췄다. 여기에 베크메서에게 필수적인 다양한 표현이나 연기 역시 훌륭했다.
작스 역은 제랄드 핀리가 맡았다. 존 애덤스의 닥터 아토믹에서 주연을 맡았기에 특히 좋아하기 시작한 가수였다. 핀리는 전통적인 작스와 거리가 꽤 먼데, 작스를 매우 아름답고 달콤하게 부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생긴 것도 작스를 하기에는 너무 젊어보인다. 그 때문인지 가발에다가 흰머리를 섞은 것 같다. 아니면 저게 원래 머리인가…
핀리는 성량이 큰 편은 아니다. 한 마디 뱉을 때마다 묵직한 카리스마가 있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이 바로 맥비커 연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활용된다.
1막에서는 확실히 베크메서가 무대 전체를 잡아 먹을 것만 같았다. 베크메서의 노래의 전달력이 작스와 비교해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2막에서는 작스가 실력을 발휘했다. 작스의 중요 아리아 중 하나인 Was duftet doch der Flieder 작스를 아름답게 부르는게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프레이징이 일품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베크메서와 작스의 다툼. 사실 베크메서가 (그나마)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요헨 쿠퍼는 이걸 완벽하게 살려냈다. 세레나데를 부를 때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작스가 방해할 때 거친 목소리 사이를 완벽하게 오갔다. 영국신문 리뷰 중에 ‘성악적으론 베크메서가 발터를 제치고 에파의 마음을 얻는게 마땅했다’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백번 공감가는 장면이었다. 샤데가 구린것도 있지만 쿠퍼가 유별나게 이 곡을 잘 불렀다. 베크메서를 코믹한 악역으로 상정해 이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부를 수도 있지만 다행히도 맥비커는 그런 방향으로 빠지지 않는다. 아니, 맥비커의 연출에서는 베크메서가 정말로 노래를 감미롭게 잘해야만 했고 쿠퍼는 그걸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베크메서의 노래는 바그너 음악중 가장 복잡한 ‘개판’으로 이어진다. 진짜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개판이라는 단어 말고 어떻게 묘사해야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글라인드본 무대 자체가 크지 않은 편인데, 아마 예당과 비슷하거나 작을 것 같다. 그 무대를가득 매운 합창단이 열심히 치고박고 싸운다. 프로그램북에 ‘Fighting Director’이름이 괜히 올라가 있는게 아니다.
뭔가 그 개판을 보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베크메서의 노래 때문에 울컥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절대 공연 못할 것 같은 그 2막의 합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폭발시켰다. 이 때 등장하여 모든 걸 정리하는 야경꾼의 노래는 화룡점정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야경꾼이 뭐 그렇게 중요하나 싶었는데, 여기서 노래 못하면 2막 다 망쳐먹는 거구나 실감했다.
2막이 끝나면 1시간 30분 동안 긴 인터미션을 가진다. 글라인드본에서 가장 특별한 시간은 이 긴 인터미션에 잔디밭에서 저녁을먹는 거다. 난 내일 공연 스탠딩을 못구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120파운드를 썼기 때문에 그냥 바에서 과자사서 먹었다ㅜㅜ
3막은 샤데의 고군분투와 핀리의 연기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발터가 1,2막에서는 어떻게 독일어 실력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3막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목소리를 고칠 순 없지만 최대한 완급조절을 해가며 프레이징을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거슬리는 건 전혀 아니었다.
3막을 캐리해나가는 건 작스의 임무다. 초반부 반반 아리아에서 부터 확실히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클라이막스에서 오케스트라에 묻히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역시 자신의 부드럽고 진득한 목소리를 십분 활용했다. 특히 긴 음표를 끌 때 조그마한 크레셴도로 긴장감을 주는 것 역시 탁월했다.
맥비커의 연출은 3막에서 조금 특이해지는데, 작스와 에파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2011년 연출과 달리 올해는 이 점을 훨씬 더 강조했다. 발터가 등장해 구두를 고치는 동안 마지막 절을 부르는 장면에서, 원래는 에파가 작스를 껴안는 것으로 연출했는데 이번에는 한발 더 나가서 입을 맞추는 것으로 바꿨다. 당연히 이어지는 작스의 행동도 훨씬 더 심각하게 반응한다.
이후 등장하는 장면들은 맥비커의 연출이 핀리의 연기로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작스는 에파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급하게 다비드를 불러 발터의 노래 세례식을 가진다. 핀리의 눈빛에서는 에파의 키스로 정신이 나간 듯한 작스의표정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이때 부르는 오중창 역시 에파의 아름다운 선창으로 시작해 훌륭하게 처리됐다. 마침 오중창을 부르는 의자가 내 바로 앞이라 개이득!
실제 공연에서는 영상에서는 보지 못한 수많은 디테일들이 숨겨져 있었다. 에파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작스의 표정, 대중들에게노래경연대회의 시작을 말하지만 에파를 떠나보내야한다는 아쉬움이 담긴 표정까지.
베크메서는 그 엉뚱한 노래를 나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부른다. 그렇기에 그의 실패가 더 안타깝게 다가온다.
뒤이어 발터가 노래를 하는 장면에서는 발터 말고도 눈을 둬야할 곳이 많았다. 발터의 노래를 따라 읊어보며 자신이 기억하는 가사가 틀렸다는 걸 깨달으며 낙담하는 베크메서, 1절 끝에 에파라는 단어가 처음 나올 때 표정이 밝아지는 에파와 포그너, 발터의성공에 만감이 교차하는 작스의 표정 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하는 작스의 마음이 정말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작스만큼이네 에파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베크메서의 낙담 역시 함께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연민을 자아낸다. 그렇기에 작스가 베크메서에게 다가가 허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은 이 연출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합창의 Hail Sachs는 그의예술에 대한 경의가 아니라 그가 감내한 고통에게 주어지는 찬사라 할 수 있다.
이 마법같은 순간들을 자아낸 건 미하엘 귀틀러의 공이 컸다. 귀틀러의 지휘는 오페라에 최적화되어있는 동작이었다. 완벽히 기계적이라고 할만큼 정확함을 지향했지만 동시에 모든 필요한 표현들을 정확히 지시했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수많은 템포 변화를 아무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나갔는데, 저렇게 하면 오케스트라가 틀릴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기다 1막 전주곡에서 힘을 뺀건 의도한 게 분명하구나 싶을 정도로 필요한 부분에서 폭발시켜줬다. 이분 빅픽쳐 보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곳곳의 정밀한 아티큘레이션과 화려함을 잃지 않는 음색, 여기에 3막 전주곡 같은 부분에서 엄청난 긴장감까지. 3막에서 베크메서가 작스를 비난하는 장면에서 스릴넘치는 템포를 보여주다가도 놀라울 만큼 정확한 다이나믹과 템포 변화를 만들어냈다. 솔직히 티치아티가 해도 이것보다 잘했을 거라고 말 못하겠다.
런던필과 합창단 역시 정말 놀라운 퀄리티였다. 난 솔직히 런던 필이 이 정도로 잘해줄지 몰랐다. 전날 로열 오페라에서 발레를 볼때 오케스트라 반주가 음정이 안맞을 정도로 심하게 구려서 좀 충격을 먹었는데, 런던필이 탑 오케스트라 반주가 무엇인지 정말잘 보여줬다. 호른 파트는 삑사리 없이 중요한 부분을 모두 감탄이 나올만큼 잘해줬다. 여기에 합창단은 모두 젊은 성악가들로 이루어져서 패기가 넘쳤다. 3막에서 Wacht auf하는 장면은 깜짝 놀랄정도로 엄청난 성량을 뽐냈다. 셔틀 타고 루이스 돌아가는데 알고보니 옆에 앉은 사람이 합창단 단원이었다.
자고로 리뷰란 짧고 굵을 수록 좋은 법인데 왜 이렇게 길어지기만 할까.
공연이 끝나니 기분이 너무 싱숭생숭하다. 내가 명가수 후기를 쓰고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이 모든게 마치 한여름밤의 꿈 같다.
잡설: 야생의 드 니스가 나타났다!
사진기사들이 뭘 촬영하고 있길래 누구지 하고 봤더니 드 니스가 딱!
내가 놀래서 핸드폰 들고 찍으니까 날 바라보고 반갑게 인사해줬다.
저 사진에서도 진짜 날 보고 있는 거!
아 염치 불구하고 달려가서 같이 사진 한번이라도 찍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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