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스타 캐스팅과 자신감 있는 연출.


바로크 오페라는 가수빨을 많이 탄다. 비중이 적은 역할이라도 꽤나 긴 아리아 한 두개 씩은 가지기 마련이고 오케스트라의 간주곡이나 합창, 혹은 앙상블로 숨어 들어갈 구석도 없다. 보리스 고두노프 캐스팅 짜기가 어렵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바로크 오페라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잘츠부르크나 엑상프로방스 같은 페스티벌에서 올스타 캐스팅으로 헨델을 공연하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이벤트다. 


이 타이틀이 발매됐을 때 바로 구입하긴 했지만 좀 미뤄두고 있었다. 아직 못본 헨델 오페라도 많은데 굳이 제일 잘 아는 알치나를 또 봐야하나 싶었으니까. 그러다가 바로 집어들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지휘 안드레아 마르콘 때문이다. 


곧 블로그에도 올리겠지만, 여행 일정을 잡고 있다. 원래 독일 오페라 극장 순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슈투트가르트에서 다음 도시로 이동할 때 뮌헨에 가나 스위스 취리히나 바젤에 가나 비슷하더라. 마침 취리히나 바젤이나 둘다 큰 공연이 있다. 취리히에서는 GMD인 파비오 루이지가 역시나 극장감독인 히모키와 함께 베찰라를 주역으로 레하르의 <미소의 나라>를 공연하고 바젤에선 마르콘이 알치나를 공연한다. 


현재 마음은 거의 바젤 쪽으로 기울긴 했는데, 뭐 이 고민을 끝내려면 마르콘 헨델을 직접 들어보는 게 제일 좋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보니 마르콘 지휘의 유일한 헨델 오페라 영상이 마침 이 알치나였다. 거기다 바젤에서 브라다만테를 맡기로 한 카타리나 브라디치Katarina Bradić가 같은 역으로 출연한다. 오케스트라는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지만 바소 콘티누오 중 첼로를 제외한 쳄발로와 두 명의 테오르보는 모두 바젤의 라 체트라La Cetra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바젤 공연에도 참가한다.


알치나는 2015년에 테아트로 레알에서 데이빗 올든 연출의 공연을 보며 매우 익숙해진 작품이다. 그 때 예습한다고 진짜 열심히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오페라 세리아가 아닐까 싶다. 알치나 영상이 꽤 많길래 헨델 오페라에서 자주 공연되는 편인가 보다 했는데 오페라베이스를 확인하니 줄리오 체사레를 제치고 공연수 1등이다. 순위는 알치나 - 줄리오 체사레 - 세르세 - 리날도 - 오를란도 - 아그리피나 순이다. 여튼 공연 수로 전체 순위 100위 권에 드는 유일한 헨델 오페라다.


이 엑상프로방스 공연은 일단 영국인 케이티 미첼Katie Mitchell의 연출이 가장 큰 논란이 됐다. 시작부터 야하다. 모르가나는 침대에 양손 양발을 묶고 M을 보여주질 않나, 알치나는 루제로 위에 올라타질 않나. 뒤엔 채찍도 나오고 남자 벨트를 풀어서 여자 손을 묶는 실용적인 방법까지 소개된다. 알치나나 모르가나가 부르는 아리아의 높은 꾸밈음은 마치 교성을 내는 것 처럼 연출된다.

썸네일에서 보이지만 공공장소에서 보면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컨셉은 공간의 분리다. 정 가운데에는 밝고 아름다운 침실이 있지만 그 옆방이나 2층은 어둡고 음침하다. 알치나와 모르가나의 마법은 침실에서만 작동하며 그들이 다른 공간으로 움직이면 늙고 추한 존재가 된다. 각각 나이든 대역 배우가 있어 문을 지나갈 때 가수와 교대하는 식이다. 멜리소가 루제로의 환상을 깨주는 장면은 바로 늙은 알치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알치나와 모르가나는 마법의 힘을 통해서만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고 남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존재로 표현된다. 그들은 욕망의 주체이며 SM기질을 숨기지 않는다. 늙는 것은 추한 것이며 특히 여성에게는 그렇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화장을 강요하는 것 처럼, 알치나와 모르가나는 마법의 힘을 통해 젊음을 얻을 때야만 침실에 있을 수 있다.


미첼은 아리아를 부르는 모든 시간을 그냥 허투루 흘러가게 두지 않는다. 대부분의 노래에서 연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성적인 장면이라든가, 난데없는 살해 위협이라든가, 옷을 벗기거나 입히거나, 폭탄을 설치하거나 뭐 그런 거 말이다. 때문에 아리아가 계속해서 이어져도 연극적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가수가 혼자 가만히 서서 노래하지 않게 내버려두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노래에 연출을 채워넣으려다보니 무리수라고 생각되는 장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딱히 노래의 내용과 별로 상관없어보이는 연출이 진행된다든가, 아니면 젼혀 다른 등장인물들이 너무 중요해보이는 일을 하고 있다든가. 그래서 그냥 아리아가 배경음악으로 깔린 연극을 보는 듯한 장면이 여럿 생긴다는 것이다. 

이게 좀 오페라 꼰대 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음악과 가수에 대한 포커스를 잃으면서 대신 얻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헤어하임처럼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정도도 아니고, 결국 전체 이야기 얼개는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면서 디테일을 표현해주는 정도인데 굳이 아리아를 소외시켜가면서 까지 그렇게 해야하나 싶었다. 

그래도 연기 지도 하나는 확실하다. 묵역으로 나오는 모든 배우들 역시 표정 처리 하나하나가 뛰어나고 가수들의 표정연기도 사실적이다. 멜리소의 경우 노래 부르는 것보다 무대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은데 표정으로 캐릭터가 충분히 표현될 정도였다. 또한 오론테가 모르가나의 본모습을 볼 수 있음에도 끝까지 사랑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것은 원작에 없는 멜랑콜리한 감정선을 만들어냈다. 알치나-루제로-브라다만테 3중창 장면에서 알치나가 루제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암시한 장면은 또 어떤가. 




하지만 공연을 보면서 제일 많이 드는 생각은 '안나 프로하스카 정말 예쁘다'. 두 번째가 '프로하스카 노래 잘한다'. 세 번째는 '프로하스카 공연 영상 더 안 나오나'. 위그모어 홀에서 공연보고 기다려서 어떻게든 사인이라도 받을 걸ㅠㅠ


그래서 시작한 안나 프로하스카 덕질

사라 윌리스가 자기 프로그램 게스트로 안나 프로하스카를 초청했다. 그런데 프로하스카 복장이ㅋㅋㅋㅋㅋㅋ 저것보다 더 심하게 아예 검은색 립스틱을 칠할 때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오디션 볼때도 저렇게 입고 갔다고.... 알치나 연출 보면서 '아 우리 안나 쨩한테 저게 뭐하는 짓이냐능'이라는 생각했는데ㅋㅋㅋㅋ 살베 레지나 기가 막히게 부르는 락덕이라니... 

여기에 람슈타인 팬이라서 사라가 특별 게스트로 람슈타인 드러머인 크리스토프 슈나이더를 불렀음ㅋㅋㅋㅋ 영상에 나오지만 안나 아빠랑 크리스토프 아빠랑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그 장면 회상하는 안나 모습 졸귀... 식탁에 앉아있는 사람 다른 여주 두명은 프로하스카 친구. 긴 머리가 호주 출신 오보에 연주자, 짧은 머리를 한 사람은 베를린에서 연극을 하는 안나 쿠벨릭. 와 성이 쿠벨릭이네 했는데 대화에 나오지만 쿠벨릭 손녀라고 한다. 

중간에 슈나이더를 위해 노래도 두곡 뽑는다. 피가로 수잔나의 Deh vieni와 다울랜드의 sorrowful song. 모차르트는 원래 오보에 솔로가 있는데 악기가 없으니 사라 윌리스한테 즉석으로 시킨다. 

사라 윌리스가 프로하스카와의 첫만남을 회상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베를린 탄호이저 공연 때 오프스테이지 호른으로 참여해서 무대 뒤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는데 (사라 왈 이때 호른 주자들끼리는 피트 밖에 있는게 씐나서 합창단에 누가 예쁘네 뭐 이런 잡담이나 나눈다고 한다) 목동이 노래를 부르니까 일동 침묵하고 귀기울였다고 한다. 이 때 목동을 부른 가수가 바로 안나 프로하스카. 어... 그러니까 사라 윌리스 정도의 호른 주자가 오프 스테이지 호른을 부르고 프로하스카가 목동 역을 맡은 공연이 있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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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가수들은 역시 훌륭하다. 파트리샤 프티봉Patricia Petibon은 명성이 아쉽지 않은 노래를 들려준다. 알치나에서 가장 유명한 ah mio cor schernito sei에서 첫음부터 놀라운 호흡조절과 미세한 변화로 관객을 완전히 흡입한다. 다카포에서 꾸밈음 처리도 환상적이다. 이런 독특한 프레이징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다니.


자루스키 역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카운터테너의 면모를 보여준다. 달콤하면서 아름다운 목소리, 길고 안정적인 호흡.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가수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뛰어난 가수임을 부정할 수 없다.



카타리나 브라디치는 아주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메조다. 자루스키랑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어색한 게, 여자 목소리를 내는 남자와 남자 목소리를 내는 여자가 노래하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노래 부르면서 유독 연출가가 화장을 하라느니 폭탄을 조립하라느니 시키는 게 많았는데도 잘 소화하더라. 

콜로라투라 패시지도 훌륭하게 해낸다.  


오론테 역의 앤소니 그레고리Anthony Gregory나 멜리 소역의 크리슈토프 바직Krzysztof Baczyk도 무난하게 자기 파트를 잘 소화해낸다. 둘다 노래도 좋지만 연기가 상당히 뛰어나다. 그 외에 오베르토 역으로 나온 보이 소프라노 엘리아스 매들러Eliad Mädler가 신스틸러로 활약한다.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아리아 중에 Barbara가 짤려서 너무 슬프다. 보이 소프라노라곤 믿기지 않을 안정적인 노래를 들려준다.


여담인데 자루스키 팬사이트에 올라온 리뷰가 엄청 재밌다. 역시 전문 리뷰어들이 쓴 글보다 빠들이 쓴 글이 재밌는 법이다. 

"연출 가지고 현대적이다고 지랄하던데, 난 뭐 오페라 무대에서 살아있는 닭을 잡는 장면이 나오거나 바로크 오페라 배경이 핵발전소라든가 하는 정도가 아니면 눈 하나 꿈뻑안함"

"알치나에서 섹스 나오는 거 가지고 지랄하는 애들은 레미제라블 보고 와서 '프랑스 혁명이 나와서 불편했다'라든가 발퀴레 보고 와서 '근친상간이 있어서 싫었다'라고 말할 놈들임"

"알치나랑 루제로 러브씬이 야하다고 해봤자 내가 본 러브씬 중에 옷 제일 많이 입은 장면이었음. '프로 불편러'들을 위해서 아예 불을 끄거나 2인용 텐트라도 마련해야 됐으려나?"

"그래도 다음 장면은 좀 나았는데, 루제로가 망설였지만 잠깐이나마 자기 얼굴을 알치나 치마 속으로 들이밀었거든. 마치 버릇없는 애완용 개처럼 말이야. 여자 행복하게 하는 법에 대해 내가 책을 쓰면 이건 적어도 챕터2에는 들어갈거임"


음 저런 여성향 포인트를 캐치해내는걸 보면 이 연출은 확실히 <헨델의 50가지 그림자>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에.

"불만사항: 묶을라면 좀 제대로 묶어라. 그게 뭐냐 ㅉㅉ 그리고 무대에 총 가지고 나오려면 탄알집 끼는 법은 제대로 아는 사람 좀 써라"

그리곤 저 총이 무엇인지, 탄알집이 왜 저 모양으로 생겼는지, 저 총에는 무슨 탄알이 들어가는지 공부해서 써놨다. 역시 덕중의 덕은 양덕이니라...


루제로가 알치나 임신시킨 이야기 하면서는 이런 짤방도 곁들여준다. 

와 무슨 약을 해야 저런 짤방과 오비디우스, 셰익스피어 인용이 섞인 포스팅을 할 수 있지...



이 블로그에서 마르콘 반주가 너무 크다고 까더라. 하지만 이미 내 뇌 속에서 마르콘은 21세기 현존 최고의 헨델 지휘자다. 내가 보러갈 거니까. "테아터 바젤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거장, 이탈리아 오페라의 적자 안드레아 마르콘과 그의 수족과 같은 라 체르타 오케스트라 반주로 알치나를 보았다"라는 스토리를 위해선 마르콘은 위대한 지휘자여야만 한다.


이미 뇌내 바이어스가 작용했다는 걸 감안하고 읽으시길. 마르콘의 지휘에 강약 변화가 크지 않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있는 비판이다. 내 생각에 마르콘은 바로크 음악에서 하나의 음악, 하나의 감정 이라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오페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대비가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곡과 곡 사이의 대비는 상당히 뚜렷하다. 다만 같은 곡에서 한 부분 안에서 극적인 변화를 주는 편은 아니다. A-B-A에서 B가 아주 뚜렷하게 차이가 날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음량이나 느낌이 아니라 미세한 늬앙스에서 차이를 준다. 마르콘의 반주를 듣고 있으면 마치 반주에 이탈리아어 가사가 붙어있는 느낌이다. 이런 게 바로 이탈리아 바로크 전문가의 능력일까. 각각의 프레이즈마다 이 프레이즈가 어떤 이디엄인지 뚜렷하게 꿰뚫고 있는 느낌이다. 

또한 안토니니와 달리 바소 콘티누오를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풍성하며 동시에 리드미컬한 음악을 들려준다. 엑상프로방스 공연장이 크다보니 오케스트라 편성도 프라이부르크 기본 편성보다 훨씬 큰 것 같다. 풍성한 오케스트라로 음악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극을 이끄는 모습이 크리스티의 헨델과도 닮아있다.  마르콘이 비록 카르미뇰라와 함께 기악 음악 쪽으로 활동이 유명한 편이지만 오페라 반주도 아주 훌륭하다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다 쓰고보니 프로하스카 덕질과 자루스키 양덕 이야기와 마르콘 찬양으로 이어진 잡탕이다. 

유럽 가서 프로하스카를 보고 싶지만 공연이 없으니 아쉬운대로 마르콘이라도 보고 올 수 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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