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13일 영화 호빗 3부작의 첫번째 편인 '뜻하지 않은 여정'이 개봉하였다.
HFR과 같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상당한 호평을 받기도 하였고, 전작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혹평들도 있었다.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하자면 길테니, 영화 음악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춰보겠다.
이번 호빗의 음악은 전작 반지의 제왕과 마찬가지로 하워드 쇼어가 맡았다. 참고로 피터 잭슨과 하워드 쇼어는 영화 킹콩의 작업을 같이하다 쇼어가 중간에 하차한 일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호빗의 음악은 하워드 쇼어가 다시 맡게 되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으로, 하워드 쇼어가 아니고선 호빗의 음악을 완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하워드 쇼어의 능력이 다른 영화 음악 작곡가들에 비해서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유도 동기를 이용해 영화음악을 구성하는 거의 유일한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유도 동기 기법이야 말로 영화 반지의 제왕의 음악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스코어로 만든 주된 요인이다.
그렇다면 유도 동기(Leading Motive, Leitmotiv)란 무엇인가?
유도 동기란 극 중에서 특정 인물, 사물, 감정 등에 연관된 테마, 혹은 동기를 뜻한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바그너에 앞서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에서 고정 악상(Idée fixe)이라는 이름으로 시도한 바 있다. 바그너가 유도 동기라는 개념을 사용한 이래 많은 오페라, 영화 음악 작곡가들이 영향을 받았다.
영화음악을 예시로 좀 더 쉽게 이야기해보자.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에 음악을 입힌다고 할 때 그 음악들이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아주 간단한 단계의 음악 : 음악의 분위기가 이야기의 분위기와 어울리면 된다.
행복한 장면이라면 밝은 분위기의 음악, 슬픈 장면이라면 어두운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감정의 크기에 따라 음악이 함께 고조되면 될 것이다. '배경음악'이라고 할 때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음악이다. 바로크 시대 부터 있었던 'Word Painting'은 가사의 단어 하나하나에 걸맞는 음악을 붙이는 방법인데, 이 또한 음악의 분위기를 이야기의 분위기에 맞추는 기법을 섬세하게 적용시킨 예라고 할 수 있다.
한 선율이 하나의 인물, 사물, 개념 등을 나타내는 음악 : Yoda's theme, Love theme 등의 제목이 붙은 음악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떤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같은 선율을 반복적으로 재현시켜 관객들이 선율과 인물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뮤지컬이자 최근에 영화로도 개봉한 '레 미제라블'의 음악도 이와 같다. 각각의 인물은 고유의 선율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자신의 선율을 부른다든지, 혹은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인물들이 똑같은 선율을 부른다. 대부분의 영화에도 이러한 '테마송' 개념의 배경음악이 자주 사용된다. 클래식 음악에선 베를리오즈의 고정 악상, 베르디와 베버의 회상 동기 등이 이와 비슷하다.
유도 동기 : 인물, 사물, 개념 등의 관계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다. 앞서 '테마송'개념의 회상 동기와 마찬가지로 유도 동기 또한 하나의 동기가 하나의 인물, 사물 등을 나타낸다. 하지만 단순히 이렇게 음악과 인물이 일대일 대응 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물 간의 관계가 음악적으로도 표현되어야만 유도 동기라고 할 수 있다. A라는 인물과 B라는 인물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A,B를 나타내는 각각의 동기도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또한 A의 동기는 A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해가며, 이런 변형 속에서 새로운 동기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음악사에서 바그너가 처음으로 사용한 기법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예를 들자면, 백색의 간달프와 백색의 사루만은 각기 다른 인물이니 다른 선율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백색의 이스타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선율간에도 공통점이 존재해야 한다. 실제로 두 인물을 나타내는 선율은 똑같은 음형의 세 음으로 시작한다.
반지를 대표하는 부드러운 선율을 악센트와 다이나믹 변화를 주면 사우론과 바랏-두르를 나타내는 동기가 된다. 반지와 사우론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반지원정대의 선율은 원정대가 발전해가고, 해체되어감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뀌며 상황을 전달해 준다. 원정대의 선율은 조금씩 소개되다가 깊은골에서 엘론드가 'Nine companions. So be it. You shall be the Fellowship of the Ring' 이라고 원정대의 결성을 선언할 때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를 뛰게 된다. 그후 간달프와 보로미르의 죽음으로 원정대가 깨지고 나서 완전한 형태로 연주되지 않고 다시금 조각나서 연주된다. 원정대를 나타내는 선율에 합창까지 가세하여 최고조로 발전하는 형태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원정대의 결속과 믿음이 가장 강력해진 시점, 모란논 앞에서 아라고른이 'For Frodo'라고 외치며 달려가는 부분이다.
이처럼 동기들의 변형은 이야기의 흐름과 논리와 정확히 일치하게 되며 음악의 진행에 필연성을 부여하게 된다. 또한 음악만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하게 자세히 설명할 수 있으니 음악 자체가 이야기와 동일시 될 수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음악이 그토록 사랑받고, Live to Projection(오케스트라 공연장에서 실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영화에 맞추어 모든 배경음악을 실황으로 연주하는 것)이라는 공연까지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유도 동기 기법인 것이다.
(간달프, 에오메르, 엔트의 등장 등, 영화의 명장면 속에서 다 같이 박수를 칠 수 있다는 묘미도 있다)
유도 동기는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극 중 반복되어 등장하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기의 변형을 통해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고정 악상 또한 형태가 변화하며 이야기의 진행을 만들어 내지만 극 중 고정 악상이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동기라고 하기에는 길이가 길다는 점에서 유도 동기와 다르다. 베르디와 베버의 회상 동기는 같은 선율이 반복될 뿐 변형이 없다는 점에서 유도 동기와 다르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호빗의 음악이 얼마나 잘 짜여져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주의 : 장면 설명에 따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이트모티프, 유도 동기, 선율, 테마, 주제 등 다양한 표현 대신 길이와 상관 없이 '동기'라는 표현으로 통일하였습니다.)
1. 전작 동기의 반복
유도 동기의 장점은 엄청나게 긴 분량의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이어주는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작품이 너무 짧으면 동기들이 발전하고 얽힐만한 기회가 없기 때문에 유도 동기의 묘미를 살려내기 힘들다. 긴 작품의 경우 여러 동기들을 소개하고 발전시킬 여유가 생기게 되며, 작품이 길어지면서 서로 간의 연관성이 희박해지는 것을 유도 동기가 음악적으로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에 긴 작품과 유도 동기의 관계는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도 유도 동기가 가장 활발하게 쓰인 예가 니벨룽의 반지 사이클이라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영화 호빗에서 유도 동기의 큰 역할 중 하나는 바로 전작 반지의 제왕의 이야기와 호빗을 이어준다는 점이다. 관객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반지의 제왕에 대한 추억을 음악을 통해 이끌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절대 무리한 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야기 자체에 남아있는 공통점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절대 전작의 음악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반지의 제왕에도 등장하였고, 호빗에서도 다시 쓰인 음악을 살펴보겠다.
1) 샤이어, 호빗
쇼어는 유도 동기는 개개인의 인물 보다는 '문화권', '집단' 단위로 쓰였다. 때문에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대표적인 동기들은 각각 샤이어, 로한, 곤도르, 모르도르, 아이센가드, 깊은골, 로리엔, 모리아, 원정대 등을 나타낸다. 이에 따라 각각의 지역에 사는 인물들도 지역의 동기들로 표현된다.
이 중에서 샤이어의 동기는 반지의 제왕 3부작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많이, 중요하게 쓰인 모티프이다. 영화의 처음 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변형되어가며 이야기를 전달한 동기이다. 샤이어의 동기는 곧 호빗의 동기이기도 하고, 이 영화 '호빗'에서도 중요하게 쓰이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샤이어의 모티프는 호빗이나 샤이어에 대한 장면에서 다양하게 변형되어 사용된다. 이러한 변형들은 전작에서 한번 제시된 것들도 있고, 새롭게 변형된 것들도 있다. 사용된 장면을 모두 열거할 순 없고, 그 중 특히 쇼어의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들을 살펴보겠다.
① 동기의 등장
자 그럼 이 동기가 영화 속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언제일까?
바로 영화의 첫 시작, 제작사와 배급사의 로고가 올라간 이후 'The Hobbit'이라는 타이틀 로고가 나타날 때 이다. 전작 반지의 제왕에서는 타이틀이 올라갈 때 항상 제목에 맞게 반지의 동기가 나왔으니 당연히 호빗에서도 제목에 걸맞게 호빗의 동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 순간에 비로소 가운데땅이 다시 한 번 영화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참고로, 이 때에 나타나는 형태를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② An Unexpected Party, A Long-Expected Party
톨킨의 원작 챕터 제목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호빗의 첫 챕터의 이름은 'An Unexpected Party'고 반지의 제왕의 첫 챕터 이름은 'A Long-Expected Party'라는 점이다. 실제로 두 소설 모두 골목쟁이집에서 '잔치'로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이렇게 재치있게 대조시킨 것이다. 영화 호빗에서는 처음 빌보의 회상 장면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잔치' 부분이 나오기 때문에 두 장면이 이어져서 나오게 된다.
쇼어는 이 차이 또한 센스 있게 짚어낸다. 잔치라는 공통점과, '뜻하지 않은'이라는 차이를 이용해서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음악을 연결시킨다. 짧고 스타카토의 액센트가 있는 리듬 형태는 유지한 형태에서 선율과 화성을 바꾼 것이다.
③ A Hobbit's Understanding
간달프가 빌보에게 '스팅'을 주면서 용기는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릴 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빌보는 골룸을 살려둔 채로 탈출하게 된다. 빌보가 골룸을 살려준 것의 중요성은 반지의 제왕에서도 계속 언급되었던 것으로 영화에서도 이 부분을 극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원작에 없던 간달프의 대사를 추가하였고 빌보가 골룸을 살려준 것을 관객들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빌보가 골룸을 죽이려다 살려주기로 결심한 순간, 그가 간달프의 말을 다시 떠올려서 살려주었다는 '증거'는 없다(물론 관객들 대부분은 이 장면에서 앞선 대사를 떠올렸겠지만). 이 점을 보다 확실히 하려고 했으면, 잠시 플래시백을 통해 간달프의 대사 순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영화 두 개의 탑에서 간달프가 에오메르를 데리고 헬름 협곡으로 오는 장면에서 처럼(아라고른이 창문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간달프의 말을 떠올린다) 간달프의 대사만이라도 다시 재현해서 들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쇼어와 피터 잭슨은 이 부분에서 훨씬 세련된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장면을 직접적으로 회상하는 대신 그 때 사용된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 때 사용된 동기는 이미 반지의 제왕에서도 사용된 동기이다. 바로 Hobbit's Understanding으로, 호빗들이 여정을 통해 세상을 깨달아가는 장면들에 등장하는 변형이다.
④ I'm going on an adventure!
개인적으로 영화 호빗에서 음악이 가장 빛났던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영화 초반부, 난쟁이들이 다 떠나버리고 혼자 집에 남아있는 빌보가 계약서를 보고 고민하다 집을 뛰쳐나가는 장면이다. 일단 음악이 완전히 최고 크기로 등장하는 부분인데다 익숙한 샤이어 동기의 새로운 변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지원정대에서 메리와 피핀을 만나 급하게 농장에서 도망치는 부분(Shortcut to Mushrooms)을 연상케 하는 빠른 템포와 반짝이는 둘시머의 음색이 돋보인다. 중간에 샤이어 동기의 선율이 명확하게 등장하는 부분도 하이라이트.
이 외에도 새로운 변형들이 많이 등장한다. CD로 발매된 영화 OST 트랙들을 살펴보았을 때 몇가지 새로운 변형이 만들어졌으나 제대로 쓰이지 못한 것들도 있는 것 같다.
2) 반지, 사우론
전작에서 중요한 동기이자, 타이틀 장면에 쓰였던 반지/사우론 동기는 호빗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된다. 반지가 등장하거나, 빌보가 반지를 끼는 것과 같은 장면에서 쓰이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이 외에도 반지/사우론을 암시하는 역할로 사용된 장면들이 있다. 굳이 대사나 화면으로 표현하지 않고 음악만으로도 이야기를 암시할 수 있는 것이다.
① 백색 회의
라다가스트가 간달프에게, 그리고 간달프가 백색회의에서, 모르굴 칼날을 꺼낼 때 마다 모르굴의 동기가 등장한다. 이어서, 갈라드리엘이 모르굴 칼날은 루다우르에 묻혔다고 설명하자 엘론드는 그 무덤에는 강한 마법이 걸려 있으며 절대 열릴 수 없다고 답한다.
이 부분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사우론을 나타내는 바랏-두르의 동기(반지 동기의 변형이다)가 흘러 나온다. 이 음악만으로, 무덤을 누가 열었는지는 충분히 설명된 것이다.
② 빌보의 반지
빌보가 고블린 동굴에서 빠져나왔을 때 난쟁이들은 그에게 어떻게 탈출했냐고 묻는다. 빌보가 답하려는 참에 간달프는 말을 끊는데 이때 반지의 동기가 흘러나오다가 간달프의 말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관객들이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반지의 동기를 기대하게 된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했다.
※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2,3편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3) 골룸
골룸의 등장은 많은 관객들에게 환호성을 자아내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쇼어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의 이중성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개의 대비되는 동기를 사용하였다. 바로 슬픔과 악의 이다. 골룸은 불쌍한 존재이자 악의에 가득 찬 존재이기 때문에 두 가지의 다른 동기로 이를 표현한 것이다. 이 두 동기는 영화에서 골룸의 이중인격이 명확히 묘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 확실히 구분되어서 사용된다.
호빗에서도 이와 같은 점이 잘 적용되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을 소개할 때 처음 나왔던 선율은 골룸의 '슬픔'이고, 훨씬 더 명확한 선율을 가지고 있고 자주 쓰였기 때문에 골룸을 대표하는 동기로 기억된다. 그래서 호빗에서 골룸이 등장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 '슬픔' 동기가 나올 거 같지만 처음에 골룸의 등장에 나온느 동기는 '악의'의 동기다. 이 동기는 헝가리 민속 악기인 침발롬(호빗을 나타내는 둘시머와 비슷한 악기다)을 통해 매우 독특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악의 동기가 먼저 등장하는 이유는 이 장면에서 골룸은 악의로 가득찬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슬픔/악의의 대비는 스미골/골룸에 각각 대응하여 사용되는데, 수수께끼 장면에서 동기가 번갈아가면서 나오다가 '슬픔'의 동기가 완전하게 등장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골룸이 반지를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부분이다.
4) 요정
반지의 제왕에서 요정들을 나타내는 음악은 깊은골의 동기와 로리엔의 동기가 있었다. 둘은 모두 요정들의 도시이지만 분명 구분 되어서 사용된다. 물론 요정이라는 공통점을 여성 합창으로 표현하여 그 둘의 동기에 연관성을 부여하였다. 호빗에서는 임라드리스, 깊은골의 모습이 나올 때 깊은골의 동기가 나오고 백색 회의에서 갈라드리엘을 만날 때 로리엔의 동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요정의 동기가 예외적인 방법으로 사용된 곳이 있다. 바로 소린 일행이 와그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엘론드와 요정들이 나타나서 도와주는 장면이다. 전작 반지의 제왕을 본 관객이라면 쉽게 눈치챘겠지만 이 때 나오는 음악은 헬름 협곡에서 할디르가 로리엔의 군대를 이끌고 등장하는 장면에 쓰인 음악이다. 로리엔의 동기를 금관으로 화려하게, 그리고 군대 행진곡에 걸맞게 악센트를 둔 것이다.
이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영화 호빗에서 나온 장면에서 분명 로리엔 출신의 요정은 없다. 갈라드리엘이 엘론드에게 구원을 부탁했다면 모를까,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전작에서의) 동기 사용을 생각해보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작곡가와 감독이 '위기 상황에서 등장하는 요정들의 도움'이라는 효과를 극적으로 더 강조하기 위해 관객들에게 여전히 명장면으로 꼽히는 '헬름 협곡에 들어오는 로리엔의 원병'에 쓰인 음악을 차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헬름 협곡에 등장한 로리엔의 병사들은 원작에 나오지 않았고, 로리엔과 헬름협곡의 거리를 생각할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그런 장면을 추가해서 원작 팬을 비롯한 많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쇼어가 이 장면에서 논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동기를 사용한 것도 이해가 될 것이다.
5) 자연
전작 영화를 몇번 본 사람들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이 자연의 동기도 역시 영화 속에서 재현되었다. 바로 독수리의 등장 부분이다. 왕의 귀환에서도 잊혀지지 않을 명대사인 'Eagles are coming!'은 호빗 3부작의 마지막 편인 'There and Back Again'에 다시 한번 등장할 것이다. 물론 음악도 똑같이 재현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2. 새로운 동기의 등장
호빗에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나 지역도 많기 때문에 새로운 동기들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동기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동기들이 흥미롭게 사용된 부분들이 어디인지 살펴보겠다.
1) 난쟁이 (에레보르/소린/소린 일행)
① 에레보르
처음 빌보의 회상 장면에서 에레보르가 나타날 때 소개되는 동기이다. 후에 소린 일행이 에레보르를 떠올릴 때나, 영화 마지막에 에레보르가 보일 때에도 등장한다. 에레보르를 잃고 나서는 그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호른이 아니라 잉글리시 호른으로도 연주된다.
② 소린
이 동기가 소린만을 나타내는지, 혹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 소린 일행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순간에도 조금씩 등장한다. 다만 에레보르 회상 장면에서 에레보르 선율에 바로 이어져, 소린의 얼굴이 나타날 때 소개되는 멜로디이며 소린이 골목쟁이집에 들어오는 순간에도 나오기 때문에 소린을 나타내는 동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동기의 재밌는 점은 두 번의 상향 음정 뒤에 하강 하는 형태라는 것인데, 소린의 모습이 왕에 가까워지는 순간에는 하강하지 않고 다시 한번 상승하며 솟아 오르는 음형이 된다. 이렇게 상향과 하향의 대조는 전작에서 곤도르의 동기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었다. 힘이 없고 쇠퇴해 가는 곤도르를 표현할 때는 하향 동기를, 다시 옛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다가가는 순간에는 상향 동기가 사용되었다.
영화 속에서 소린 동기의 상향 변형이 사용된 것은 발린과 소린이 골목쟁이집에서 에레보르 탈환을 확고히 결심할 때, 발린이 아자눌비자르 전투를 회상하며 아조그를 물리친 소린의 모습이 등장할 때, 마지막 소린 일행이 에레보르를 발견할 때와 같은 부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동기가 반지의 제왕에서도 한 번 등장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샘이 쉴롭을 물리치고 나서 잠이 든 프로도를 보고 죽은 것으로 착각하는 부분이다. '소중한 것을 잃은 슬픔'이라는 점에서 프로도를 잃은 샘이나 에레보르를 잃은 소린도 어느정도 공통점이 있을 것이고, 이러한 느낌이 나는 동기를 차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③ 소린 일행
전작에 가장 대표적인 동기 중 하나로 원정대의 동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원정대가 등장하지 않으니 아무리 전작에서 인상깊게 쓰인 동기라고 하여도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후에 레골라스가 등장한다면 글로인과 만나는 장면에서 팬서비스 차원에서 쓰일지도 모르겠다). 호빗에는 이 원정대 동기에 해당하는 동기가 바로 '소린 일행' 동기이다. 원정대의 동기가 원정대의 결성과 함께 완성되었으니, 소린 일행의 동기도 소린 일행이 모였을 때 등장한다. 첫 등장은 바로 영화 속 명장면으로 꼽히는 'Far over the Misty Mountains cold'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 노래의 멜로디가 바로 소린 일행을 나타내는 동기인 것이다.
이 동기는 이후 난쟁이들이 여행길을 걷거나 무기를 들고 돌진하는 장면에서 계속 사용된다.
소린의 동기와 비슷하게 이 동기도 전작 반지의 제왕과 관련이 있다. 바로 피핀이 곤도르에서 부르는 노래로 'Home is behind, the world ahead'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이는 원래 원작에서 프로도, 피핀, 샘이 샤이어에서 여행을 떠나며 부르는 노래로 빌보가 지었다고 설명이 된다. 이 노래가 소린 일행 동기와 어떻게 연관이 있을까?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 음형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영화 속에도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바로 빌보가 일행에 합류하고 나서, 간달프가 빌보에게 이제 샤이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간달프는 'Home is now behind you, the world is ahead'라는 대사를 말한다. 이 때 함께 흘러 나오는 소린 일행의 동기를 통해서, 관객들은 어렴풋이 피핀의 노래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2) 간달프
간달프는 전작에서도 등장하였지만 호빗에서는 새로운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 회상 장면이 끝나고 간달프와 빌보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 동기가 처음으로 소개된다. 이 동기는 정확하게 간달프가 자신의 이름을 간달프라고 말하는 순간에 오보에의 연주로 함께 나오게 된다. 이 후에 간달프가 문제를 해결하거나 등장하는 장면에는 모두 이 선율이 등장하게 된다.
이 후에 등장하는 장면들 중 깨알같은 부분을 꼽아보자.
① 드왈린의 입장
드왈린이 골목쟁이집에 들어와서 음식이 준비되어있을 거라고 '그'가 말해줬다고 설명한다. 이 때 빌보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데, 이 때에도 '그'가 간달프라는 것을 음악으로 설명해준다.
② 트롤
트롤에게 일행이 모두 잡혀 있을 때 빌보가 시간을 끄는 사이 간달프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간달프가 근처를 재빠르게 지나가는 장면이 아주 살짝 나온다. 이 때 간달프의 동기가 자연스럽게 함께 잠깐 등장한다. 그리고 간달프가 멋지게 등장해 바위를 쪼개며 햇빛을 비추는 장면에서는 호른으로 강렬한 변형이 연주된다.
③ 고블린 마을
소린 일행이 곤경에 쳐했을 때 간달프가 모든 것을 날려버리며 등장하는 순간에도 역시 같이 연주된다. 이 때에는 고요하게 바이올린이 선율을 맡았다.
그 외에 라다가스트에 대해 설명해주는 장면에도 등장한다.
3) 아조그/돌 굴두르
이번 편에서 가장 중요한 악당으로 등장한 아조그 또한 고유의 동기가 있다. 하지만 사용되는 장면과 전작에서 동기를 할당하는 단위를 보았을 때 더 넓은 의미에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동기의 첫 등장은 분명 발린이 아조그를 설명할 때이다. 이후 아조그가 등장하거나, 아조그의 수하들이 등장할 때 똑같이 등장한다.
이 동기는 매우 흥미롭게 돌 굴두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라다가스트가 처음으로 돌 굴두르를 찾아가는 장면에 돌 굴두르가 모습을 나타냄과 동시에 매우 또렷하게 이 동기가 등장한다. 이후 라다가스트가 간달프를 찾아와 돌 굴두르를 이야기할 때에도 시종일관 오스티나토 처럼 사용된다. 이 동기가 아조그의 동기이자 돌 굴두르의 동기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사실 이 동기 또한 반지의 제왕에서 자주 쓰였던 동기이다. '하강 3도' 반주 음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동기는 모르도르의 동기가 나올 때 반주로 굉장히 자주 등장한 동기이다. 쇼어는 반주에 불과했던 이 동기를 새롭게 재활용한 것이다.
아조그와 돌 굴두르가 같은 동기로 표현된다는 것은 이 둘의 관계를 매우 직접적으로 암시해준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나쁜 놈은 매한가지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쇼어는 반지의 제왕에서 오크들을 확실히 구별했다. 모르도르의 오크와 아이센가드의 오크, 모리아에서 등장한 오크 등은 모두 각각 다른 동기로 표현되었다.
영화의 설정에 따르면 아조그는 군다바드 산에서 온 오크이다. 돌 굴두르와 '똑같은 동기'를 사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을 덧붙이자면 영화 호빗에 나즈굴의 동기도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잠깐 나오는 마술사왕의 등장 장면이 아니라 아조그와 소린의 결투 장면에서! 영화 마지막 소린이 불타는 나무들 사이로 아조그에게 돌진할 때 나즈굴의 동기가 합창으로 등장한다. 아조그-돌 굴두르- 나즈굴은 음악적으로 굉장히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적인 연관성에, 영화에서 추가된 대사들을 통해 이들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①아조그는 '군다바드' 출신 오크이다. 원작에선 그냥 모리아를 점거하던 오크였다. ②소린은 아조그가 아자눌비자르 전투에서 죽었다 라고 말한다. 참고로 이 장면에서 간달프만이 유독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아는 눈치이다. ③ 간달프가 돌 굴두르의 강령술사가 '죽은 자'를 불러낼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라다가스트도 죽은 영혼을 불러올 수 있는 자라고 말한다). Necromancer라는 것이 보통 그런 마법사를 의미하지만 톨킨은 이를 단순히 '흑마법사'의 일종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이 대사 때문에 강령술사의 능력에 대한 영화내에서 조금 수정되었다. ④ 아조그의 새로운 본거지는 다름 아닌 바람마루. 반지원정대에서 나즈굴이 프로도를 찔렀던 그 곳이다. ⑤ 아조그의 동기는 돌 굴두르의 동기와 같고, 마지막 소린이 아조그에게 돌진하는 장면에서는 나즈굴의 동기가 등장한다. ⑥ 아조그는 스라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떠오르는 가설들은 아래와 같다.
① 아조그는 아자눌비자르 전투에서 죽었다가 강령술사가 다시 살려낸 존재이다.
아조그가 죽었다고 말하는 장면을 왜 삽입했을까? 관객들에게 '죽은 줄 알았던 악당이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누구나 의심할만큼 간달프의 표졍 변화를 클로즈업 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강령술사가 죽은 자를 살려 낼 수 있다고 하는, 원작에 없던 설명을 덧붙인 것도 이런 가설에 가능성이 있다.
② 아조그는 돌 굴두르에서 강령술사, 혹은 나즈굴과 접촉하였다. 그리고 스라인이 돌 굴두르에서 죽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혹은 스라인을 돌 굴두르에 잡아온 주체거나, 직접 죽인 장본인일 지도). 간달프는 스라인에게 열쇠와 지도를 받을 때 아조그를 보았고, 때문에 소린이 아조그가 죽었다라고 말할 때 표정이 변한 것이다.
유도 동기가 쓰인 것만 보았을 때 '아조그는 사실 나즈굴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있는 추측은 이정도가 아닐까 싶다. 확실하게 예언할 수 있는 것은, 2편에서 아조그와 강령술사-나즈굴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는 점이다.
이 외에 백색회의 도중 간달프가 '스마우그 보다 사악한 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이 동기가 나온다. 아마 아조그가 아니라 돌 굴두르의 세력을 뜻할 것이다.
3. 후속편에 등장할 것이라고 추측되는 동기들
1) 어둠숲
에레보르 회상 장면에서 스란두일이 등장하는 부분이 있다. 이 때 여성 합창으로 이루어진 동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요정을 나타내는 동기들의 공통점으로서 2편에 등장할 어둠숲의 동기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2) 스마우그
에레보르 회상 장면에서 스마우그가 등장하며 에레보르를 불태우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반지를 대표하는 동기가 상승하는 단2도라면, 스마우그를 나타내는 동기는 하강하는 단2도이다. 이 둘은 간달프가 오래 전부터 걱정하던 두 개의 거대한 악이고 이 둘이 세력을 합치면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쇼어는 이 둘의 공통점을 '음정'으로 표현하였다. 물론 후속작에서는 스마우그의 모티프가 다른 것으로 사용될 수 있다.
4. 맺음말
이처럼 쇼어의 영화음악 속에는 무궁무진한 연관성이 숨겨져 있다. 단순히 감정 전달을 위한 배경음악에서 머무르지 않고 음악을 이야기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주인공이 다시 등장할 때 같은 음악이 사용되는 것은 수도 없이 사용되었던 기법이다. 하지만 쇼어의 음악은 훨씬 더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고 세부를 들여볼다 볼 수록 새로운 연결 고리들이 나타난다.
이렇게 섬세한 음악을 위해서는 10시간을 가뿐히 넘는 거대한 음악적 캔버스가 필요하다. 톨킨의 장대한 소설이었기에 가능한 음악이었고, 톨킨의 세계를 현실로 가져와준 것도 음악이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음악은 영화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호빗 3부작 또한 영화 팬들을 감탄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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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나 확장판이 발매되면 다시 영화를 보고 내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