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현대판 보리스.
처음으로 쓰는 정규 영상물이 아닌 공연 리뷰. 위 영상 그대로입니다. 유튜브에서 오페라 전막을 보는 것도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유튜브 영상이 다 있으니 캡처와 플레이 타임 기록도 한껏 활용해보고 싶었지만 감상한 지 좀 지나서 그렇게 까지 하긴 귀찮아졌다.
보리스 고두노프 감상은 이제 끝내려고 했지만, 그레이엄 빅Graham Vick이 연출을 맡은 이 공연은 건너뛰기 아쉬운 매력이 있었다. 배경을 현대로 옮긴 보리스는 여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리 데커 연출의 리세우 공연은 모두 현대 의상을 입고 있지만 무대가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현대 배경의 현실적인 보리스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열어보니 특별히 도발적인 해석 없이 배경 설정만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합창단 개개인의 개성은 현대 의상을 입었을 때 훨씬 두드러진다. 프롤로그 셰칼로프의 독백을 비롯해 수많은 ‘발표’를 발언대 위에 서서 노래하는 것은 사소하지만 극에 묘한 생동감을 불어넣어준다. 마지막 장에서 보야르들이 의회 의석에 앉아 노래하는 것 역시 오페라 연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취향 저격이다. 바실리 성당 장면에서 유명한 хлеба(빵!)가 압권이었다. 무장경찰이 나와 시민들을 몰아내며 저지선을 만들고, 비싼 양복과 모피를 걸친 상류층들이 여유롭게 웃으며 무대를 가로 지른다. 이 때 터져나오는 시민들의 함성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다.
공연을 보면서 관객이 공감을 느낀다는 건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며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행동이다. 그런 점에서 관객이 무대 위의 인물에 강한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 필요가 있다. 오페라의 배경을 현대로 옮기는 건 이 점에서 유리하다. 비록 모든 이야기가 어느 시대의 인간이나 공감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건 이런 종이 한 장 두께의 디테일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굶주린 러시아 백성들이 차르에게 빵을 달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서는 저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뇌에서 한번 처리를 거쳐야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돈을 물 쓰듯 쓰는 상류층에게 데모하는 것은 그런 과정이 필요 없다. 이 때는 피부로 와닿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레이엄 빅의 연출은 이 어드밴티지를 잘 살려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현대 러시아에서 차르를 추대한다는 게 다소 엉뚱해보이긴 하지만 현대인들이 영국의 왕실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옛 러시아 차르의 위엄과 영광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허영심이라고 해야할까. 대관식에서 보리스가 돈다발을 뿌려대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다.
세세한 디테일. 크렘린 궁 장면에서 보리스가 차르로서의 힘든 점을 이야기할 때 표도르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책상 위의 보드카를 몰래 치워놓는다. 반대로 슈이스키는 보리스의 감정을 끌어내려는지 그 보드카를 다시 책상 위로 올려놓는다. 보리스가 드미트리의 환상을 보는 장면에서 보리스가 실제로는 표도르를 보는 것으로 표현했다. 표도르에 대한 애정과 드미트리에 대한 죄책감이 보리스 안에서 겹쳐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개연성 있으면서 암시적인 해석이었다.
오케스트라 녹음 상태가 구려 평가하긴 뭐하지만, 게르기예프의 반주는 선이 굵다고 해야할까. 오케스트레이션의 디테일함보다는 그 합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더 집중하였으며 아기자기한 장식보단 거침없는 흐름에 집중했다. 대체로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는 부분이 많았다.
보리스는 예브게니 니키틴이 맡았다. 사실 처음엔 못알아보고 명색이 마린스키 & 게르기예프 공연인데 이마에 주름 하나 안 잡힌 놈이 보리스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손에 그려진 문신이 분장이 아니라는 건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이 작품의 형식이 바그너와 많이 비슷하기 때문에 바그너 잘 부르는 가수면 무소륵스키 잘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나마 큰 차이가 러시아어인데 니키틴은 러시아 네이티브잖아. 그러니까 탑클래스 바그너 가수인 니키틴이 보리스를 잘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일텐데, 문제는 니키틴의 음역대가 보리스를 부르기는 조금 높다라는 것이다. 원래 진퉁 베이스가 아니라 베이스 바리톤이니까. 목소리 뿐만 아니라 언급한대로 주름이 없어도 너무 없는 얼굴이라 닳고 닳은 권력자의 모습이라기엔 너무 젊고 패기가 넘친다. 차르라기 보단 마피아 보스에 가까운 느낌이다. 너무 에너지가 넘쳐서 마지막에 어떻게 죽을까 걱정했는데, 정신병으로 죽기에는 너무 건장해보여 연출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르기예프의 지휘 때문인지 완급 조절도 조금 아쉽다 멋진 목소리에 명확한 딕션, 연극적인 노래 표현이 갖춰진 가수라 어느정도 흡입력이 있다. 하지만 아직 보리스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 외의 가수는 대체로 무난하게 잘해준다. 슈이스키는 연출의 비중에 비해 딱딱한 연기가 아쉽다. 바를람은 술주정뱅이가 아니라 꽤나 잘생긴 마초로 나와서 신선했다. 표도르 역에는 보이 소프라노를 썼는데 노래도 좋고 비중이 늘어난 연기도 상당히 잘 소화해냈다.
판본은 1869년에 여관주인 노래를 첨가했다. 대체로 러시아가 제일 판본 선택에 보수적인 성향인데 바덴바덴과 합작 프로덕션이라서 그런지 1869년 판본을 선택했다.
영상이 정식 발매되면 또 살만한 작품이다. 유튭 영상에 자막이 있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이 영상은 불어 자막이 있어 자막이 없는 것보단 훨씬 편하게 봤다.
이 걸로 블로그에 쓴 보리스 고두노프 글이 9개가 된다. 그 다음으로 자주 태그 된 작품이 루살카(5개)이니 이 기록을 넘을 일은 당분간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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