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올스타가 무너져 내렸다.
샤이가 라 스칼라의 감독을 맡은 첫 데뷔 공연이 영상물로 발매됐다. (아마도 유일한) 외국인 감독 바렌보임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샤이가 중책을 맡았으니 공연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슈템메, 안토넨코, 아그레스타라는 스타 라인업이 출동하여 1926년 바로 같은 극장에서 초연되었던 투란도트를 상연했다.
21세기에 들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꼽자면 단연 투란도트일 테다. "요즘 가수들은 ㅉㅉ" 드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점은 부정할 수 없을 테다. 투란도트와 칼라프라는 살인적인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정말로 멸종해버린 것만 같다.
이 투란도트의 소식을 듣고 가장 기대했던 건 니나 슈템메의 투란도트였다. 슈템메는 분명 현재 활동하는 가수 중 가장 뛰어난 브륀힐데 중 한 명이며 베르디와 푸치니 레퍼토리도 곧잘 소화해내는 가수다. 비르기트 닐손의 포스에 감히 도전해볼만한 유일한 가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슈템메는 음표 하나하나를 틀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내는 정도였고 그 어디에도 얼음 공주, 팜므 파탈로서의 카리스마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투란도트들에서 보이는 지저분한 비브라토가 없다는 점은 분명히 슈템메의 대단한 장점이지만 그만큼 파워가 사라졌다. 고음의 도약을 준비하느라 정점의 음표는 조금씩 늦게 나온다. 중간에 실수를 하는 걸 보면 이날 컨디션이 유독 안좋았나 싶을 정도다.
굳이 닐손이나 서덜랜드 까지 갈 필요 없이 88년 에바 마튼 선에서 해결이 된다.
안토넨코의 목소리는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다. 열정에 가득차 소리지르는 모습은 훌륭하지만 네순 도르마에서 기대하는 서정적이며 기품있는 프레이징에는 젬병이다. 안토넨코가 오텔로를 비롯해 드라마티코 배역을 많이 맡지만 그의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힘은 전통적인 드라마티코의 강렬함 처럼 목소리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요상한 표현과 비브라토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그 점에서 헬덴테너로 활동하는 랜스 라이언과 닮아있다.
역시 요즘 투란도트에서 가장 빛날 수밖에 없는 건 류다. 류를 잘 부를 수 있는 가수는 투란도트와 칼라프에 비해 여전히 많다. 류를 맡은 가수가 특별히 다들 잘해서라기보다는, 그저 투란도트와 칼라프라는 역할이 가수를 너무나 잡아먹는 것 뿐이다. 류를 맡은 마리아 아그레스타Maria Agresta는 첫 아리아 Ascolta signore에서는 류 치고 목소리가 조금 무겁다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3막의 아리아 Tu che di gel sei cinta에서는 제대로 초점 잡힌 소리를 들려준다. 커튼콜에서도 역시나 가장 많은 환호를 받았다.
티무르 역의 알렉산더 침발류크Alexander Tsymbalyuk는 뮌헨 보리스 고두노프로 접했던 가수인데, 특별한 인상을 주기에는 조금 부족해보인다.
기대했던 샤이의 반주도 흐느적 거린다. 가수가 물 같으니 지휘도 같이 물이 되어버린걸까. 샤이의 스타일이 극단적인 표현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극 곳곳이 포인트 없이 흘러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2막에서 계속 등장하는 합창 선율 같은 경우에도 밋밋하게 지나간다. 라보엠에서 풍성한 선율을 살려냈던 그 장점도 투란도트에서는 충분히 살아나지 못 했다.
알파노 완성본 대신 베리오 완성본을 사용했다는 점이 이 공연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아무리 베리오라고 하더라도 이 답답한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풀어내진 못한다. 투란도트의 마지막 장면은 지크프리트 3막 3장에서 브륀힐데와 지크프리트의 다툼 장면과 비슷하다고 보는데, 바그너는 어떻게 나름의 논리를 갖추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반면 투란도트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남자의 키스 한번에 무너지는, 지극히 "너가 남자 맛을 몰라서 그래"라는 유치한 이야기에서 끝난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고치의 동화, 신화적인 장면은 이름, 즉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장면일 테다. 출신지와 계급으로 구분되는 구혼자들이 이름으로 불릴 때에만 사랑받을 수 있는 개인이 되는 셈이다. 칼라프가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모두 맞추고 '내 이름을 알아맞춰라' 라고 하는 장면에서 실제로 칼라프가 요청하는 것은 이름을 '알아맞추는 것'이 아니다. "Il mio nome non sai. Dimmi il mio nome." 즉 '내 이름을 불러줘'에 가까운 것이다. 이방인 왕자가 아니라 한명의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생각이었을 테고, 투란도트의 '사랑'이라는 대답 역시 여기에 어울리는 낭만적인 대답이었겠지만, 이 사이에 류의 죽음이 껴들면서 공허하고 설득력 없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건 어쩔수 없다.
렌호프의 연출은 마음에 들었던 적이 손에 꼽는다. 잘츠부르크 엘렉트라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무대와 의상은 역시 렌호프 답다. 이런 불편한 이미지를 꾸준히 밀어붙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테다. 하지만 데이빗 파운트니 연출의 베리오 판본 잘츠부르크 공연에 비하면 기계적이고 끔찍한 이미지가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도 아니다. 메시지는 불분명한데 이미지는 불편하다. 렌호프의 연출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나 카르멜파 수녀들 처럼 프랑스 레퍼토리에서는 차분하며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잘 만들어주지만 독일 오페라 쪽에서는 기괴한 순간이 많아보인다. 투란도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차가운 연출이다. 보고있는데 너무 불편했는데 오죽하면 메트 제피렐리 연출만 봐도 힐링되는 것 같더라. 하지만 렌호프는 이 공연 3개월 뒤에 타계하였다. 그래도 좋은 연출 더 뽑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 블루레이에서 제일 멋있는 건 부클릿 뒷면에 인쇄돼있는 라 스칼라 포스터다. 이건 어떻게 깔 수가 없다.
투란도트 영상이 나올 때마다 기대에 차서 구입하지만 언제나 갈증만을 내놓는다. 좋은 칼라프는 카우프만이 데뷔할 때 까지 기다려야할 것 같고, 투란도트로서 기대해볼 만한 가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륀힐데 이레네 테오린이 남아있다. 지구인들아 이들에게 힘을 모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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