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당과 빌 비올라, 물의 미학을 보여주다.


다시는 조르당을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이 공연 예매하면서 삼연벙 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작년에 조르당에게 코지와 펠멜에서 실망한 다음 + 내한공연이 별로였다는 소식에 이제 조르당 코인은 손절해야하는게 아닌가 했다. 그러면서도 이걸 보러가기로 한건, 파리에 있을때 트졸데를 하니 지휘랑 상관없이 일단 가는게 인지상정이었을 뿐이다.

과연 조르당이 이번에도 나를 물 먹일까 하는 걱정과, 그래도 바이로이트 지휘자인데 바그너는 잘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여있었다. 아 겔가놈도 내년에 바이로이트 데뷔하죠 ^^

바스티유 오페라는 해외에서 보러다닌 오페라 극장 중에 가장 가기 싫은 곳이다. 일단 내부가 안 예쁘고 너무 커서 음향도 구리다. 그래서 이번엔 그냥 극장 내부 사진도 안 찍었다. 여기에 말굽형 극장이랑 달리 적당한 시야제한으로 가성비를 노리는 선택도 불가능 하다. 100유로 이하의 티켓을 사려면 2층이나 3층에 앉아야 하는데 거기선 무슨 소리나 들릴련지 도저히 감도 안잡히는 극장이다. 그렇게 이번에도 또 비싼 자리를 앉으며 호갱이 됐다.



걱정반 기대반으로 전주곡이 시작됐다. 첫 목관 코드에서부터 어택이 둥글게둥글게 들어오는걸 보니 역시 조르당은 물라인이다. 어떻게 시작한지 5초만에 물라인 인증합니까...

하지만 겔가에게 당하고 온 뒤라 조르당의 이런 컨트롤도 나쁘지 않았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건 조르당이 의도해서 공을 들여 만들어낸 사운드다. 겔가의 무념무상한 반주 따위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전주곡은 그런 감탄의 순간들이었다. 어머나 지휘자가 프레이징이란 걸 하고 있어ㄷㄷ 미세한 아고긱도 잘 살아있었다. 긴 호흡에서 프레이징을 쌓아 올리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사운드가 확실하게 잡혀있었다. 바스티유 오페라가 참 구린 곳이지만 조르당은 이 극장에서 자기가 원하는 소리를 빚어내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겔가 반주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었던 그 에로틱하게 부풀어오르는 느낌이 정말 잘 살아있는 반주였다.

조르당의 지휘에 관해 계속 말해보자면 아주 수준급으로, 이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주였다. 조르당의 최근 명가수 반주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으로 ‘효과음’ 같은 모티프들을 충분히 강조해주며 또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성부를 꽤 부각시키는 편이다. 물 라인이라 계속 물맛만 보여줄 것 같지만 필요한 순간에 제대로 찔러주는 금관은 오히려 낙차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묘약을 마시는 장면에서 현악기의 장엄한 묘사는 극단적인 데타셰로 눌러줬는데 조르당 사운드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었다. 여기에 첼로 솔로나 비올라 솔로, 목관 솔로들에게 감정을 넣는 것도 탁월했다.

내가 실연으로 들은 바그너 오페라 반주 중 이렇게 섬세하고 야릇하기론 최고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수들은 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일단 주역들 중 유일하게 처음들어보는 가수가 이졸데 역의 마르티나 세라핀이었는데 걱정했던 약점들이 자주 드러났다.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향 디버프도 있겠지만 바그너 소프라노다운 두터운 목소리가 나지 않고 힘은 있지만 가볍고 메마른 느낌이 있었다. 이름 때문에 이탈리아 쪽인가 했는데 오스트리아 태생이다. 하지만 레퍼토리는 확실히 이탈리아가 주류. 오늘 공연에서도 그런 티가 났다. 투란도트 같은 건 괜찮겠지만 이졸데는 글쎄..

트리스탄은 요즘 뜨는 헬덴테너인 안드레아스 샤거가 불렀다. 파르지팔이 상당히 훌륭했어서 기억하고 있는데 실연에서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일단 (역시나 바스티유 디버프겠지만) 목소리가 조금 가볍게 느껴졌고, 기본적으로 웃는상이라 그런지 뭔가 진지한 연기가 잘 안된다고 해야할까. 지크나 파르지팔엔 잘어울릴 것 같은데 트리스탄 처럼 괴로운 걸 표현하기엔 목소리나 연기가 조금 어색했다. 기본적으로 성량이 워낙 뛰어난 가수라 1, 2막에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3막에서는 그마저도 지친 기색이 보여 마지막 환희의 발악은 힘이 많이 모자랐다.

브랑게네는 예카테리나 구바노바였는데 아마 서울시향 트졸데 콘체르탄테에서도 같은 역을 불렀던 걸로 기억한다. 바스티유 디버프가 있다는게 확실히 느껴진게 구바노바가 예당에서는 벨벳같은 목소리로 캐스팅 중 가장 뛰어난 노래를 들려줬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가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목소리가 좀 빈약하게 들렸다. 전반적으로 무난했고, 2막에서 오프스테이지 파트를 2층 박스석에서 불러 훨씬 괜찮게 들렸다.

마티아스 괴르네는 좀 충격적이었다. 캐스팅이 바뀌었나 싶을 정도. 원래 자주 듣는 가수는 아니지만, 저 목소리로 무슨 가곡을 부를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베이스 같은 걸걸한 소리가 나길래 뭔가 했는데 3막에서 들어보니 아예 목소리가 나가 있었다. 거친 소리가 나오는데 목이 제대로 안울리는 티가 확 날정도로 형편없는 소리였다. 당장 대타를 구했어야할 정도인데 왜 그렇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가장 빛났던 건 요새 슬슬 믿음을 져버리기 시작하는 르네 파페였다. 바스티유 디버프를 뚫어내고 자기 소리를 내는 유일한 가수였다. 내한 공연 구렸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요새 좋았다는 소리가 잘 안 들려 이제 슬슬 가나보다 했는데 오늘 공연은 의외였다. 셀라스의 연출포인트 중 하나가 마르케 왕의 인간적인 면모, 즉 트리스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훨씬 강렬하게 표현하고 그에 따른 배신감과 슬픔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게 했는데 파페가 이걸 잘 소화해냈다. 2막 마르케 독백 부분이 공연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로 꼽을만 했다. 프레이징이 잘 안되는 샤거, 이탈리안에 가까운 세라핀, 목소리 메롱인 괴르네, 뭔가 평범한 구바노바 사이에서 파페만 정통 바그너 가수 다운 느낌을 줬다고 해야하나. 파페만 조르당의 섬세한 프레이징을 함께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가수가 조금 아쉬웠지만 이를 메꿔주는게 바로 연출이었다. 피터 셀라스 연출에 빌 비올라의 영상을 사용했다. 수업 시간에 빌 비올라가 언급된 적이 있어서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이것이 바로 거장의 솜씨구나 감탄했다.

애초에 셀라스의 연출 비중이 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셀라스 30, 비올라 70의 기여가 아닌가 싶다.

셀라스의 지시가 돋보인 것은 1막 피날레였다. 콘월에 상륙할 때 합창단과 마르케, 멜로트가 모두 1층 객석으로 입장하며 객석이 환하게 켜져 ‘빛’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킨다. 여기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약에 빠진듯한 모습을 마르케가 매서운 눈으로 쳐다본다던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멜로트가 급하게 무대로 뛰어가 트리스탄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하는듯한 연기도 더했다.

2막에서 브랑게네가 오프스테이지로 경고할 때마다 멜롯과 마르케가 무대에 등장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찰하다 나갔다. 멜롯이 트리스탄을 칼로 찌르고 나서 이졸데와 마르케, 멜롯 모두가 당황하며 트리스탄을 껴안는것도 포인트였다. 멜롯이 트리스탄과 아주 친한 친구였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아마 트리스탄을 사랑하며) 이졸데에 대한 질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빌 비올라의 영상은 환상적이었다. 메인 컨셉은 물이었다. 물의 세계는 이 작품에서의 ‘밤’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세계이며 두 연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비현실의 세계이다.

1막에서 약물을 먹고 전주곡의 모티프들이 다시 등장하는 순간 영상 속 두연인은 물에 빠져 자유롭게 헤엄친다. 위아래가 없이 물속에서 떠다니는 두 연인의 영상을 보며 바그너의 음악을 듣고 있는 그 마음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건 내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감동이었다. 영상은 극의 내용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음악의 탁월한 시각화였다. 그건 할말을 잃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2막에서는 불과 물의 대립니다. 불은 대본과 똑같이 낮을 상징한다. 불을 뚫고 오는 남자의 모습은 아주 강렬하게 남았다. 낮이 오는 장면을 1막처럼 강렬하게 표현할거라 예상했지만 틀렸다. 아주 아름다운 자연에서 실제로 동이 터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존 연출에서 보여주는 갑작스런 빛의 습격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서서히 동이 터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고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라 두 연인, 그리고 마르케의 슬픔을 아이러니 하게 강조했다.

1막에 이은 또하나의 하이라이트는 피날레 사랑의 죽음이었다. 세라핀의 노래가 별로였지만 조르당의 느리고 서정적인 물 속성 지휘와 빌 비올라의 물 영상의 조합은 숭고한 경험을 만들어줬다. 비올라 특유의 긴 호흡의 슬로우 모션 영상이 음악과 기가 막히게 떨어졌다. 죽어서 바위위에 누워있는 남자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역재생한 영상이었다. 바닥의 물이 천천히 하늘로 떨어지기 시작하고 물줄기는 폭포마냥 강력해진다. 마지막 순간 남자의 몸이 물과 함께 하늘로 승천할 때, 이 음악에 담긴 마법의 힘을 이렇게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나 그저 압도될 뿐이었다. 이건 예술이다. 눈이 촉촉해지고 그저 입을 벌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게 바로 게잠트쿤스트베르크입니까. 내가 들은 가장 아름다운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악이었다.
(유튜브에 Bill Viola Tristan으로 검색하면 Tristan’s Ascension 이라는 영상이 나온다)

별의별 싸구려 프로젝션만 보다가 빌 비올라를 보니 이것이 정말 예술이라 불릴 수 있는 클래스구나 깨달았다. 거장의 솜씨는 이렇게 다른거구나.


전반적으로 가수가 구렸지만, 조르당의 실력을 확인했으며 빌 비올라와 바그너의 결합은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찾아보니 콘체르탄테에서도 셀라스 & 비올라 조합으로 공연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프로젝트 시작도 콘체르탄테였다) 서울시향 콘체르탄테 때 그렇지 않았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감히 ‘죽기 전에 꼭 봐야할 프로덕션’이라고 말해본다.


뻘이야기1.
당연하지만 파리라고 관객 매너가 좋은 건 아니다. 환절기라 기침 환자가 많은 건 그렇다치지만 가끔 특이한 빌런들이 나타난다. 저번 황혼 공연에서는 합창석에서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는데 플래시를 켜고(!) 1분 가량 몇번씩 촬영을 하는 관객이 있었다. 트리스탄 공연에서는 허밍 빌런이 있었다. 좀 유명한 선율이 시작할라 치면 뭔가 옆에서 허밍 비슷한 소리가 들리길래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분명히 누가 작지 않은 소리로 허밍을 하는거였다. 소리가 날 때 옆을 보니 손으로 지휘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마 그분이 바로 지휘 빌런에서 진화한 허밍 빌런이 아니었을까 싶다.

뻘이야기2.
인터미션이 길어서 옆에 혼자온 아저씨한테 말이나 걸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프랑스어로 바그너 좋아하냐고 물어볼까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그럼 Aimez vous Wagner?다. 무슨 사강 소설의 안티테제인가ㅋㅋㅋㅋㅋㅋ



내일부턴 유럽 오페라 극장 세곳의 시즌 첫 뉴프로덕션의 프리미어를 3일 연속으로 보게 된다. 이쯤 되면 유럽 특파원 급 아닙니까. 유럽의 최신 프로덕션을 누구보다 빨리 전달하는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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