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조르당이다. 정작 내한은 못봤으면서 2017년부터 매해 유럽에서 보고 있다. 

원래 월요일 공연을 보려고 했었고 같은 날에 하딩과 파리 오케스트라의 브리튼 레퀴엠 공연이 있어 조금 고민했다. 하딩도 궁금했지만 브퀴엠은 대전시향으로라도 실연으로 접해봤지만 베를리오즈 레퀴엠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빈에 왔으니 빈 오케스트라를 봐야하지 않겠나. 슈타츠오퍼의 차기 감독이 된 조르당이 빈에선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빈 심포니가 내한 때 구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조르당이 트졸데를 잘해주긴 했지만 나를 두 번 물먹인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시간이 없어 작품 예습도 거의 못했다. 틈틈히 좀 듣다가 출국하는 날 스코어 보면서 한번 본게 다였다. 모퀴엠이나 베퀴엠 같은 걸 빼면 평소에 종교합창곡을 잘 안 듣는데 베를리오즈 레퀴엠 역시 재미를 못붙였다. 선율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투바 미룸이 화려하다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베를리오즈의 작품 중 겁벌이나 트로이인 같은 작품을 아주 재밌게 듣진 않았던 걸 떠올리며 베를리오즈랑 나랑 잘 안 맞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테너로 브라이언 히멜이 나오기로 했는데 캔슬해서 사이미르 피르구가 나왔다. 히멜 놈 벌써 나한테 두번째 캔슬이다??

무지크페라인 내부는 참 별게 없다. 내가 못찾은건지 간단한 간식 파는 곳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사진찍기 여념없는 슈타츠오퍼와 달리 아주 수수한 편이다. 

 

낮에 본 당통의 죽음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데다 저녁으로 사먹은 버거 까지 맛이 별로였다. 무지크페라인 내부에 앉았는데 생각보다 시야가 많이 가려서 지휘자가 보일지 걱정해야할 정도였다. 라 페니체에 들어갔을 때는 아름다움에 넋이 나갔는데 황금홀은 기대가 컸던지 생각보다 놀랍지 않았다. 특별히 할일이 없어 일찍 들어가서 앉아있었는데, 비행기 내내 앉아있다가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공연 두개를 보고 있자니 허리도 아파왔다. 현타가 오기에 필요한 조건은 다 갖추었다.

전주가 끝나고 Requiem Aeternam을 부르기 시작하자 이 공연의 주인공이 빈 심포니가 아니라 빈 징페라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무지크페라인의 음향은 역시 명성대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무지크페라인 음향 따라했다는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이랑 비교하면 울림이 훨씬 정돈된 편이었다. 합창단의 가사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전달됐다. 무엇보다 블렌딩이 아름다웠다. 소리가 커지더라도 깨지지 않았고 딕션은 통일 됐으면서 각각의 성부끼리의 밸런스도 훌륭했다. 여러 합창단이 모인 것이 아니라 단일 합창단의 단원들이다 보니 소리의 질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소리였다. 심심하다고 생각했던 베를리오즈의 선율을 이런 소리로 들으니 다르게 다가왔다.

조르당은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극적인 에너지를 꽉 채웠다. 너무 처지지 않게 프레이징을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투바 미룸의 팀파니 롤 역시 굉음이라기보다는 웅장한 느낌에 방점을 두었다. 

하나하나가 훌륭했지만 라크리모사는 조르당의 설계가 더 빛난던 부분이었다. 초연인가 재연 당시 라크리모사가 관객들에게 특히 반응이 좋았다고 하는데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부터 나는 거의 무장해제가 되었다.

최근에 공연 불감증이 생긴 건지, 썩 마음에 드는 공연이 별로 없었다. 공연이 마음에 들어도 감정의 변화가 특별히 크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 공연은 달랐다. 징페라인이 이 황금홀에서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그동안 무지했구나를 느꼈다. 나에게 연주에서 소리의 질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물론 쿠렌치스 사운드를 좋아하고 카우프만의 음색을 좋아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평범한 사운드, 조금 거친 소리에서도 프레이징 설계만 잘 하면 뛰어난 연주라고 생각했다. 프레이징에 비하면 음색은 너무 주관적인 환상이 들어갈 여지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사운드, 소리의 질이야 말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걸 이 공연을 들으면서 느꼈다. 내 자리에서 조르당의 지휘 모습이 보이냐 안 보이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휘자의 몸짓에서 읽어낼 수 있는 지시보다 징페라인이 내는 그 소리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사운드가 다는 아니지'라는 말은 정말 제대로된 소리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할 수 있던 말이었다. 잘 조탁된 음향은 그 자체만으로 넘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빈이 음악의 도시라는 걸 과대평가된 소리로 치부했다. 관광객들에게나 먹히는 이야기? 음악의 도시라고 해서 하는거라곤 오브리 단원들 모아 모차르트 분장시켜서 공연해서 관광객 지갑 터는 거밖에 더 있나 싶었다. 미국 오케스트라들의 몰락처럼 빈이 특별했던 시절도 다 옛말이라고 생각했다. 전통이란 사라지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시아엔 없고 유럽에만 있는 것, 특히나 빈 처럼 콧대높은 그 자존심이란 건 다 허황된 것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언젠가 사라질 격차라고 믿고 싶었다. 근데 그 근본력의 차이를 느꼈다. 징페라인의 소리가 황금홀에서 찬란하게 울려퍼질 때 이게 바로 소리의 블렌딩이라는 걸 체감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합창 전통 덕인지, 홀 덕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우리나라엔 둘 다 없다는 거였다.

 

최근에 바빠서 공연을 자주 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국내 공연도 열심히 기웃거렸다. 건질 건 별로 없었지만 발가락이 닮았다 셈 치고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해외 나와서 좋은 공연 골라가는 거랑 그냥 기회되는 대로 보는 국내 공연이랑 비교가 되겠냐만 오늘은 특별히 더 슬펐다. 나는 왜 여태 이런 소리를 못 들어보고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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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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