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크를 연달아 듣다보니 자신감이 하락했다. 난 사실 오페라를 잘 모르는 거 아닐까. 오페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보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랑말랑한 걸로 하나 골라보았다. 메트 라이브의 호스트인 파트리샤 라세트도 이 작품을 "길티 플레저" 라고 소개하는데 이 표현에 이 만큼 어울리는 오페라도 없을 테다. 오페라 듣는 게 이렇게 쉽고 마음 편해도 괜찮은지, 이렇게 말랑말랑 달콤한 선율을 2시간 동안 듣고 있어도 되는 건지 이상한 죄책감이 든다. 아리아 선율 하나로 오페라 처음부터 끝까지 치트키 쓰는 작품이기도 하다.
메트가 잘할 수 있는 건 돈을 써서 좋은 캐스팅을 꾸리는 것이다. 진주조개잡이는 놀랍게도 주역 세 명 + 쩌리 베이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른 독창자가 전무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세 명만 잘 고르면 다른 가수를 섭외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물론 소프라노, 테너, 바리톤 이렇게 주역 세 명만 잘 부르면 나머지가 죽을 쒀도 잘 돌아가는 오페라들도 많다. 라 트라비아타라던가, 토스카라던가, 카르멘이라던가. 하지만 아예 다른 독창이 눈꼽만큼도 안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점에서 이 오페라는 주역 세 명만 잘 고르고 지휘자만 적당하면 망할 수가 없다.
그 힘든 일을 메트가 해낼 뻔 했다. 조연들이 없는 만큼 합창단의 비중이 큰데 합창단의 소리가 참 별로다. 뉴욕 메트 합창단이 아니라 어디 서울에 있는 메트 오페라 합창단을 데려다가 썼나... 아니면 반대로 내가 그동안 서울에서 보던 합창단이 정말 메트 오페라 합창단이었던걸까.
주르가 역의 마리우스 크비첸은 메이저 오페라 극장에서 인기 많은 가수이지만 여전히 그 매력을 잘 모르겠다. 저번 파리 오네긴을 보고나서 크비첸의 매력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좀 더 젊은 시절에 모국어에 가까운 러시아어라 그랬나보다. 노래에서 불어 딕션의 향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답답했다. 노래도 편하게 잘 부르는 느낌이 아니었는데 1막에서 고음 부분에서 메마른 목소리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래도 다행히 2막, 3막은 조금 더 나아진다.
나디르 역엔 매튜 폴렌자니가 나온다.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오페라에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별 기대 안 했지만 목소리도 적당히 가볍고 연기도 살아있다. 목소리 스타일이 여러 역할을 소화하기엔 좀 어려울 수 있지만 그래도 프랑스 리릭 쪽 역할엔 잘 어울린다.
담라우 역시 안정적이다. 목소리에 힘도 확실하게 실려있고 두 듀엣에서 각기 다른 느낌의 표현을 잘 살려낸다. 활발한 연기가 레일라 역할과 잘 어울리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법 하지만 그래도 캐릭터의 생명력이 살아있다. 폴렌자니와 2막의 듀엣에서는 살아있는 두 캐릭터의 합이 얼마나 멋진지를 보여준다.
미스터 담라우가 이번에도 끼워팔기로 출연한다. 다행히 비중은 별로 높지 않다.
노세다는 나사 꽉 조인 화력 반주를 보여준다. 이 처럼 날서고 폭력적인 사운드로 이 작품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니. 레치타티보 파트 반주 역시 단조로울 수 있는데 힘으로 해결해낸다. 화끈한 반주에 있어서 이제 노세다는 어느 누구에게도 부족하지 않는 것 같다. 메트 오케스트라 역시 노세다의 지휘를 상당히 잘 따른다. 메트에 대해 불만이 많지만 오케스트라가 아주 유연하게 지휘자에 잘 반응한다는 것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메트가 이 작품을 올린 건 거의 100년 전, 카루소를 주연으로 세웠을 때다. 부클릿에는 메트가 20세기 초에는 다양한 오페라들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있고, 카르멘에 밀려 그 동안 메트에서 상연되지 못 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비제 진주조개잡이를 올리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오페라베이스에서 찾아보니 2004-2019 동안 공연횟수 기준 자주 상연된 작품 59위인데 이걸 100년 동안 안 올렸다니, 메트의 작품 선정도 지독히 편향되있는 것 같다.
영국의 영화감독이자 오페라 연출가인 페니 울콕Penny Woolcock의 연출은 메트 관객들의 마음에 쏙 들만한 스타일이다. 바닷가의 마을을 묘사한 무대가 상당히 입체적이다. 여기에 바닷물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가지 무대 테크닉을 이용하는데, 전주곡에서 반투명 스크린과 프로젝션에 바다 이미지를 영사하고 와이어를 단 무용수를 써 바다 깊숙이 잠수해 내려가는 모습을 쓰는 것은 몽환적이면서 신비로운 장면이었다. 2막이 끝날 때 바다가 마을을 덮치는 모습이라던가 3막에서 실제로 불을 뿜는 무대 역시 압권이다. 화려한 볼거리로 작품의 극적 효과를 한껏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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