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기억해주시는 분들 중엔 제가 죽었나 살았나 싶어하실 텐데 어찌저찌 잘 살아있습니다. 공연장 근처에 자주 못간게 벌써 몇년이지만 카우프만 온다는데 제가 안갈 수가 있겠습니까. 중간에 탄호이저도 보러가고 죽음의 도시도 보고 아주 가끔 챙겨볼 건 챙겨봤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가서 라 스칼라도 보고왔죠(누가 이태리 오케 아니랄까봐 오케가 더럽게 못했습니다). 독일에 초청받아 갈일이 있어서 간 김에 뮌헨에서 살로메, 코지, 로엔그린을 보고 왔는데 살로메랑 로엔그린 지휘했던 FXR씨가 이제는 사라져버려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코지는 블라디미르 유롭스키가 지휘했는데 아주 대단했습니다. xx 카리스마있어 이러니까 관객들이 뻑이 가지..
여튼 그런 공연을 보고도 글 못 남겼지만 하지만 카우프만 보고나선 짧게나마 생존 신고를 해야겠습니다.
10년만의 내한. 나도 2018년 파리에서 가곡 리사이틀이 마지막이었다. 나도 까먹고 있다가 오늘 후기를 다시 읽었는데 그때 카우프만 가곡 리사이틀 보고나서 되게 현타가 왔었구나 싶다. 오늘은 반대였다.
성량이 어떻고 목상태가 어떻고 하기엔 공연장에 안 다닌지 오래됐다. 하지만 카우프만이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서의 노래를 잘 했다는것 만은 분명했다. 목이 더 쌩쌩하고 더 질러줬으면 하는 부분은 있었지만, 2015년 내한 공연 때 느꼈던 그 감동이 있었다. 긴 호흡으로 처리해줘야하는 부분은 잘 끌어줬고 모든 오페라 아리아 하나하나에 연기와 디테일, 표현이 살아있었다. 목소리 몇번 불안하게 나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게 또 카우프만 듣는 맛 아니겠습니까..
달라진게 있다면 10년전에 가난석에 앉았지만 이번에 35만원 짜리 얼빠석에 앉았다는 것. 유료회원은 아니어서 1열은 아니었지만 얼빠질 하기에 충분한 거리에서 관람했다. 2018년 내 후기를 보니까 무슨 카우프만 얼굴이 안보여서 슬펐다는 이야기만 있네... 오늘도 1부 보면서 안경 렌즈 열심히 안 닦은 걸 후회하고 인터미션때 깨끗이 닦았다. 안경에 묻은 얼룩 때문에 티켓값 5만원 정도 손해본것 같다.
오른쪽 블럭 대신 왼쪽 블럭에 앉았는데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른쪽 블럭 관객을 위해 무대를 좌우로 오가는 중도스러운 행보를 보여서 왼쪽에 앉아있는 좌파로서는 그때마다 아쉬웠지만, 대부분은 왼쪽에서 불러줬고, 다이렉트로 꽂히는 카우프만의 음색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맨날 카메라로만 봤던 그 샷이 내 눈앞에 있었다니까?? 노래부를 때 나오는 표정 하나하나가 너무나 친숙하다.
커튼콜하러 들어갈 때마다 내 눈앞을 지나가는데, 오늘 그 장면을 몇번 씩 보면서도 매번 '존나 잘생겼네...' 라는 생각만 떠올랐다. 뭐랄까 저 감탄은 다른 표현으로 순화할 수가 없음...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면 그게 쿠렌치스 음악듣고 카우프만 노래듣는 것이던 시절이 있었다. 삶이 힘들면,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카우프만 노래 들으면서 힘내던 때가 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구나.
오늘 모든 곡 하나하나에서 내가 카우프만의 음반과 영상을 보면서 행복하던 때가 떠올랐다. 레콘디타 아르모니아.. 카우프만이 불렀던 카바라도시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취리히에서 부른 모습,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장면들. 취리히 토스카때는 카우프만이 참 젊었는데, 이제는 벌써 나이가 이렇게 됐구나. 첼레스테 아이다를 들으면 그 음반 처음 스트리밍 올라왔을 때 설레면서 들었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카르멘을 보면 안토나치와 나왔던 로열 오페라 공연을, 그 때는 카우프만이 누군지도 잘 모른 채로 보다가 나중에 수업 시간에 틀어주면서 몇번이고 다시 봤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투리두를 들으면 내가 혼자 연구실에서 주말에 드레스덴 부활절 cav/pag 영상을 얼마나 전율하면서 보았는지가 떠오른다. 르 시드는 첫 내한 때 예당 가난석에서 들었던 기억, 안드레아 셰니에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영상이 나왔을 때 얼마나 즐겁게 기대하면서 보았는지가 떠오른다. 네순 도르마는 말해 무엇하나, 내가 한창 덕질할 때 푸치니 신보가 나와서 네순 도르마 부르는 영상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른다. 카우프만 최고의 장기 중 하나라 꼽아도 손색 없는 루체반 레 스텔레, 일본 가는 비행기에서 du bist di welt für mich 공연 영상 보면서 그 음반 푹 빠져서 겨울 내내 그 음반만 들었던 기억.. 혼자서 애들 돌보면서 la dolce vita 틀어두며 행복하게 감상했던 기억..
사실 공연을 가기 전에는 기대도 별로 없었다. 놓치면 아까울 것 같아서, 그래도 카우프만이 오는데 가야지 하고 예매해놓고 잊고 있었다.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 시간에 일을 더하는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런데 공연장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자니 옛날의 그 순간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카우프만 노래 들으면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슬프게도 나에게 그 시간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 때 나의 감정들을 이렇게 불러일으킬 노래를 해줄 카우프만도 사라질 거다. 이 짧은 밤이 앞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특별한 순간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나에게 아직 10년 전과 같은 감정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들이었기에 매 곡마다 눈물이 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난지 한참이 됐는데도 아직도 손바닥이 얼얼하다. 대학원 시절에 카우프만 덕택에 힘든 생활 중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서 그렇게 덕질하고 있을 여유도 없는 지금, 이렇게 한국에 찾아와 준 덕택에 그 행복한 시간들을 눈 앞에 펼칠 수 있었다.
남은 해야할 일들 목록을 보고 있으면 숨이 벅차지만, 오늘의 기분 만큼은 기록해두고 싶다.
카우프만 당신은 참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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