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갔다 돌아오고 처음으로 본 영상물이다. 더 보고 싶은 영상물이 쌓여있지만 봐야할 영상물 비율 상 익숙한 오페라를 보면 새로운 오페라도 한편 봐야하기에 새로운 작품을 골랐다. 오리 백작은 로시니의 작품 중에서도 꽤나 유명한 편인데, 메트에서 플로레스, 담라우, 디도나토 주연으로 상연한 적이 있어 나에게도 익숙했다. 물론 아직 그 공연은 아직 보지 못했다.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의 영상화 초기 작품들은 아트하우스에서 발매되었는데 네 작품을 묶어 박스로 발매했다. 오리 백작, 시지스몬도, 보르고냐의 아델라이데, 데메트로와 폴리비오인데 오리백작 빼고는 모두 듣보 작품이다.


오리 백작은 로시니의 마지막 희극 오페라로 Le comte Ory 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 듯이 불어 작품이다. 사실 별 생각 없이 오페라를 틀었다가 불어로 노래하는 걸 듣고 살짝 놀랐다.


작품의 리브레토는 무난한 편이다. 십자군 원정을 떠나 남자들이 없는 마을에 난봉꾼 오리 백작이 여자들을 유혹하러 왔다가 좌절하는 내용이다. 1막에서의 처음 시도가 좌절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고 2막에서는 또 전혀 새로운 계획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점이 기존 오페라 부파와 많이 비슷하다. 레치타티보 세코가 없고 오페라 코미크의 대화체 대사도 없으니 희극 오페라치고는 진보적인 편이라 할 수 있다. 

자기표절의 대가 로시니 답게 오리 백작의 음악은 절반 이상이 '랭스로의 여행'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대신 단순히 복붙해온 게 아니라 아리아의 각 부분들을 절묘하게 짜깁기해서 가져온 분량에 비해 비슷하다는 느낌이 훨씬 덜 든다고 한다. 아직 랭스로의 여행을 보지 못해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로시니의 후기 작품 답게 음악은 재밌는 부분들이 많다. 시뇨르 브루스키노에서 음악이 단순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는데 오리 백작은 그 점에서 훨씬 나았다. 


출연진 중에서는 이지에 쉬가 단연 빛난다. 이지에 쉬의 꿀같은 목소리와 시원시원한 고음은 정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싶을 정도다. 뭔가 오페라가 루즈해진다 싶으면 이지에 쉬가 나와서 노래를 불러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다른 가수들도 모두 훌륭하지만 이지에 쉬는 빛나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다. 세련된 프레이징에서 묻어나오는 감성의 전달력이 남다르다. 불어 딕션은 라 파보리트를 생각하면 살짝 아쉬운데, 생각해보면 반대로 2009년에 조금 아쉬웠던 딕션이 2014년 공연에서 더 나아졌으니 (프랑스 공연이었으니 더 지도를 많이 받았겠지만) 5년간 실력이 더 발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소프라노 마리아 호세 모레노María José Moreno 역시 감정 표현이 조금 아쉽지만 기교와 목소리가 훌륭하다. 다른 가수들도 모두 훌륭한 편이다. 지휘 파올로 카리냐니Paolo Carignani는 이미 블로그에서 두번이나 리뷰했던 적이 있는 지휘자다. 휘몰아치는 느낌은 없지만 로시니의 독특한 리듬을 잘 살려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다만 연출은 상당히 아쉽다. 오리 백작을 호텔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으로 만들었는데, 그 개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지 못하다. 극을 보는 내내 이게 극 밖의 일을 표현하려고 한건지 극 안의 내용으로 표현한건지가 모호할 때가 많았고, 전체 컨셉을 통해 세부 장면에서 이득을 보는 부분도 없었다. 가수들의 동선과 연기는 평범했는데, 평범한 건 혹평받아야 할 일이다. 대체로 가수들에게 자세한 지시 없이 그냥 전체적인 방향만 지시한 것 같은 장면이 많았다. 거기다 오페라 부파인데 웃음을 주는 장면이 적다. 영국에서 팔스타프를 보고 느낀 점인데 웃겨야할 것을 웃기게 못만드는 건 능력 부족이다. 그렇다고 크리슈토프 로이의 후궁탈출처럼 아예 진지한 이야기로 바꾼 것도 아니고. 다만 바지 역할인 이졸리에를 마치 여자가 연극을 위해 남장한 것으로 표현하여 마지막 삼중창에서 섹슈얼한 긴장감을 준다는 점이다. 이 장면에서 이졸리에가 여백작으로 분장하는 건 여자 가수가 남자 역할을 맡지만 그 남자 역할이 극중에서 또다시 여장을 하는 케이스로 후에 장미의 기사 옥타비안에서도 재현된다. 꽤나 흥미로운 부분인데, 이 연출에서 이졸리에역 가수의 여자 속옷을 보여주며 이 인물이 원래 여자라는 걸 오히려 더 강조하는 것과 마지막 피날레에 다 같이 무지개 깃발을 흔드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부클릿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세트와 의상 디자인까지 연출이 모두 도맡아서 했다. 이런 연출가의 작품 중에 좋은 결과물을 찾기 힘들다는 사례가 하나 더 늘었다.

25분 정도의 메이킹 필름이 있는데 상당히 알차다. 특히 페스티벌 감독을 맡은 할아버지의 로시니 사랑은 놀라울 정도다. 아마 이 페스티벌이 이 정도의 높은 예술성을 갖추게 된 것은 로시니에 헌신하는 감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터뷰가 이탈리아어로 진행되는데, 4명의 가수 인터뷰가 포함돼있는데 안타깝게도 이지에 쉬의 분량은 전혀 없다. 이탈리아어로 인터뷰를 못해서 그러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타이틀롤을 맡은 가수인데 없다는 건 좀 심했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컵 드는 장면에서 박지성이나 오카자키만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던 것 처럼 의도적인 인종차별적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