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도살자요? 바로 한국에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기꾼들이다.

공연장에서 온갖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수 있지만 오늘만큼 끔찍한 일은 없었다. 2막에서 굴리엘모와 도라벨라의 이중창이 끝나고 갑자기 객석에 불이 들어왔다. 관객들은 물론 지휘자 역시 당황했다. 이중창 중에 무대 뒷쪽 오른편에 있는 슬라이딩 무대에 불이 들어온걸 보고 잠시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문제였나보다. 그때가 9시 37분 경이었다. 무대 장치에 이상이 있어 10분간 휴식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있었다. 10분이 지나자 10시에 시작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나는 돌아가는 차편의 시간을 다시 바꿨다. 대책없이 기다리는 관객을 보며, 오케스트라가 서곡 정도라도 다시 연주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0시가 다됐을 무렵 무대에서 무언가를 미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공연이 재개한다는 말이 나오고, 지휘자가 다시 입장했다. 25분이 넘는 공백이 있었다.


무대에는 굴리엘모, 페란도, 돈 알폰소가 등장해 레치타티보로 시작했다. 어라? 뭔가 이상했다. 순서가 이게 맞나? 여기에 자막도 나오지 않았다. 자막팀이 공연 다시 시작할 준비를 못했나?

그러다 돈 알폰소가 코지 판 투테를 노래하는 장면에서야 자막이 다시 나옸다.


아. 


자막이 안 나온게 아니라, 안 내보낸거구나. 대화내용을 들으면 관객들이 중간에 뭐가 짤렸구나라는 걸 빨리 알아챌 수 있으니 조심하려는 속셈이었을 테다.


그렇게 2막의 꽃인 페란도와 피오르딜리지의 이중창과 아리아를 모두 다 짤라버리고 (도라벨라와 굴리엘모의 아리아도 들어있다) 바로 ‘코지판투테’ 부분과 결혼식으로 넘어갔다. 25분이 넘게 지연됐지만 공연이 끝난 시간은 귀신같이 예정 시간을 딱 맞췄다.


공연에는 온갖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출연진이 교체되는 건 예삿일이고 공연장에 비가 새서 공연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테너가 목소리가 아예 나갔는데 대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계속 부르는 경우도 있다. 국립오페라단은 무대 뒤에 불도 내봤다.


문제는 사후 대처다. 무대 장치에 문제가 생겨서 무대 전환이 불가하면 빨리 결정했어야 한다. 일단 무대 장치가 복구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무대 전환이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상식적이라면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콘체르탄테 형식으로라도 할거다. 어차피 무대 제대로 쓰는 것도 없고, 둘이 유혹하고 화내고 아리아 부르는 것들이니 동선을 없애고 제자리에서 부르게 해서 큰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인간들은 지연된 만큼 장면을 다 짤라버리기로 한다. 그 급박한 순간에 그걸 결정했다는 게 참 놀랍다. 무대위에 대충 서서하던, 커튼 내리고 보면대 놨두고 콘체르탄테로 하던, 공연이 11시가 넘어서 끝나던, 어쨌든 관객에게 들려줄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들려줘야했다. 그게 관객과의 약속이다.


거기다가 이 사실을 관객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심지어 중간에 짤렸다는 걸 숨기고 관객을 속여먹을 생각으로 레치타티보의 자막을 틀지 않았다. 모르는 관객들은 그냥 오페라 자체가 그렇게 흘러간 줄 알거 아닌가. 오페라 도살자라고 욕먹는 연출가들도 울고갈 능욕이다. 


그래놓고 정상 진행이 되지 않아 전액 환불한다고? 그 부분이 가장 빡쳤다.

마지막 까지도 자기들이 오페라를 어떻게 난도질했는지 말도 하지 않고, 전액환불로 일을 무마하려는 것. 공연을 보러 시간을 쓰고 힘들게 공연장까지 오고 공연에 기대하고 결국 실망하게 되고 오페라를 능욕하는 걸 눈앞에서 보게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돈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니.


더 어이없는 건, 심지어 자기들 돈도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나 쉽게 공연을 포기해버린 데에는 그게 자기들 돈이 아니라서도 분명 한몫 했을 테다. 관객 전원 환불이면 아무리 못해도 천만원대는 가뿐히 넘어갈텐데, 그거 다 누구 돈으로 메꿀 건가? 국립오페라단 예산에서 티켓수입 빠지면, 공연제작에 쓰라고 국가 세금에서 준 지원을 빼다 써야할 거 아닌가? “정상 진행”이 안되게 한 사람들이 이 일에 조금이라도 이 일을 책임질까? ‘그냥 30분 짜르고 전액환불해버리자’ 라고 결정했던 그 사람은 환불 비용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 무대 시설 관계자들에게 피해보상이라도 청구할 건가?


민간 오페라단이 공연하는데 그런 일이 생겼으면, 과연 극의 하이라이트인 30분을 몰래 짤라먹고 쿨하게 전액 환불해드리겠습니다라고 쉽게 말했을까? 상황이 정말 여의치 않아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관객들에게 트집 안잡히게 최대한 노력하고나서 환불은 최후의 수단으로 삼았을 테다. 자기들 돈일 테니까. 가수들한테 사정사정을 해서라도 무대 위에서 어떻게든 노래를 하게 했을 거다.



정말 비겁한 건 관련된 사람들 중 아무도 무대 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라오면 야유라도 한껏 보내주려고 했더니 아예 등장하지도 않고 안내방송만 한다. 공연 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직접 나와서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게 상식이다. 내가 예전에 대구에 헨델 아시스와 갈라테아를 보러갔을 때, 오페라에 딱 세명 나오는 가수 중 한명인 주역 테너가 공연 중에 목이 완전히 나갔다. 관계자는 1막이 끝나고 직접 나와서 사과했고, 그 가수는 커튼콜때 객석에 사죄의 절을 올렸다. 그걸 보고도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이번 사건은 국립오페라단이 오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국가 지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준 단적인 사건이었다. 무대 장치의 이상을 미리 점검하지 못한건 그 이후의 대처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다. 국립오페라단에게 오페라란 수틀리면 가장 중요한 장면을 다 짤라먹어도 괜찮고, 관객들이 눈치 못 채게 적당히 숨기면 되는 것이다. 오페라 관람이라는게 관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경험인지 따윈 신경쓰지 않고 그저 티켓값이나 환불해주면 된다.


그 전부터 답이 없는 단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최악이다. 실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사기와 우롱은 용납할 수 없다.




——— 

공연 내용을 리뷰할 필요가 있나 싶다. 간략하게 적어보자면, 연출은 이탈리안 디자이너-연출가 치고 괜찮게 뽑혔다. 의상도 화려하고 무대 구성도 신경을 썼다. 데스피나를 사장으로 승격시킨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그 외엔 평범한 편이다. 2막에서 도라벨라와 피오르딜리지가 옷갈아 입는 장면은 그 의도는 이해하지만 굳이 노출을 그 정도로 해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1막 의사 장면도 그렇고  유머코드가 썩 세련되지 못한 느낌이다. 아리아 중 동선 역시 특별하진 않다.


지휘자는 뭔가 애매했다. 부분부분 보자면 소리를 상당히 그럴싸하게 만들어냈다. 부드러운 멜로디를 잘 다듬고 오케스트라가 가수를 덮지 않도록 무던히 애썼다. 가수와 함께 호흡하는 부분에서도 괜찮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어떤 노래든 너무 예쁘고 조심스럽게만 연주했다. 오케스트라가 살짝만 흥분해도 가수와 엇나가는게 티가 나서 일부러 그런거인가 싶기도 했다. 피날레 앙상블에서는 한방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너무 늦은 반격이었다. 모페라 반주는 그 자체로 완결성 있는 음악이라 좀더 전면에 나왔어도 좋았을텐데, 이 지휘자의 스타일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페란도와 피오르딜리지는 제일 중요한 장면들이 다 짤렸으니 어떻게 평가를 할 수도 없다. 도라벨라와 굴리엘모 커플 보다는 이 쪽이 훨씬 더 나았을 것 같다. 오늘 사건이 터지기 전 마지막 장면인 바테 바테 듀엣을 그렇게 느낌없게 부르는 굴리엘모는 처음봤다.

기대했던 로드 길프리는 나이가 든걸 숨길 수 없었다. 그래도 확실히 짬에서 오는 바이브가 있어 능청스러운 연기나 표현도 좋고 딕션도 훌륭했다(이건 오늘 가수들 전반적으로 모두 흠잡을 데 없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집에서 블루레이 보세요. 블루레이는 최소한 갑자기 30분 짤라먹고 아무일 없었다고 사기치진 않을 거 아녜요. 블루레이 디스크가 튀는 게 차라리 정신건강에 훨씬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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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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