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오페라단이 현대 오페라 시리즈를 기획하여 첫 오페라로 브리튼의 Curlew River를 무대에 올렸다. 이전에 한국어로 ‘섬진강 나루’로 번안되어 상연한 적은 있지만 원어로 공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먼저 작품의 선정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브리튼은 20세기 오페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다. 독특한 음악 어법을 갖추었음에도 동시대의 다른 작품과 비교했을 때 듣기에 편한 편이라는 걸 생각하면 현대 오페라 시리즈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오페라다. 여기에 다른 오페라와 달리 영어로 돼있다는 점은 관객 대부분이 영어 이외의 외국어를 모르는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한 중요한 점이다. 


이건용 단장은 프로그램 북에 이 작품을 고른 이유를 꽤 상세히 설명해두었다. 브리튼의 오페라 중에서도 대규모 편성인 피터 그라임즈와 빌리 버드는 제끼고 앨버트 해링, 나사의 회전, 도요새의 강으로 후보를 좁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도요새의 강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이를 잃고 미친 어머니가 세상의 조롱을 받으면서 아이를 찾아 떠난다는 내용에서 세월호를 떠올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우리 사회에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훌륭한 선택이다. 도요새의 강이나 오를란도 핀토 파초나 듣보력은 비슷하지만 작품 선정의 세심함에서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이건용 단장이 공연 시작 시간에 15분~20분 가량 브리튼과 도요새의 강, 그리고 일본의 극 예술 ’노’에 대해서 설명했다. 보통 사전 설명이 있다면 공연 시간 앞에 별도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아예 공연의 일부로 편성한 셈이다. 작품이 1시간 10분 정도로 짧은 편이고 관객 대부분에게 생소한 오페라이니 나름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프로그램 북에 이미 나와있는 이야기도 많았지만 일본 ‘노’에 대한 설명을 자료와 함께 설명해준건 꽤 도움이 됐다. 제목을 도요새의 강으로 번역한 이유도 설명했는데, 그 동안 딱히 정해진 표기가 없었으니 아마 앞으로 이 이름으로 쭉 불리지 않을까. 


도요새의 강은 브리튼의 오페라 중에서도 독특한 편이다. 악기 편성이라든가, 남자 가수만 나온다든가, 극중극이라는 형식, 같은 모티프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든가.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미친 여자’가 괴한에 납치당한 자기 아들을 찾아 떠나다가 도요새의 강에 도착한다. 강을 건너려 배를 타려고 하지만 뱃사공은 조롱하면서 노래를 불러주면 태워주겠다 한다. 여자의 노래에 감동한 승객들이 뱃사공에게 부탁하여 여자는 배에 탑승한다. 강을 건너가며 뱃사공이 1년 전에 어떤 아이를 태운 이야기를 해준다. 어느 남자에게 끌려온 듯한 그 아이는 결국 버림받고 강 건너편에서 죽는다. 여자는 뱃사공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사실을 알게된 승객들은 아이의 무덤에서 함께 기도해주고, 여자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공연 퀄리티는 어떨까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야심차고 세심한 작품 선택이었지만 공연의 내용에는 아쉬움이 상당히 많이 남는다.



일단 처음에 수도승들이 입장하며 부르는 성가부터 상당히 불안했다. 무반주에다가 지휘도 없이 불러야하며 서로 일렬로 걸어가며 불러야한다는 점에서 어려운 작업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작품의 첫 시작 부분부터 삐끗하는 게 용납이 되는건 아니다. 서로 박자가 안맞아 자음 발음이 다른 건 이해하지만 음정이 엇나가는 건 좀 심했다. 성가의 경건하고 차분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아마 합창단이 객석에서부터 걸어서 입장하는 게 아니라 자리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부르거나 지휘자를 보고 불렀다면 이 정도로 나쁘진 않았을 거다. 연출의 잘못도 크다. 


이 작품은 극중극이기 때문에 수도승들의 성가와 극중극 사이에 기악 앙상블의 간주가 들어간다. 새로운 이야기의 분위기를 만들어줘야한 다는 점에서 이 간주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데, 이 부분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못했다. 악기들이 조용히 싱코페이션이 섞여 주고 받는 부분인데 다들 어떤 박자에 나와야할지 감을 못잡는지 곡 내내 흔들렸다. 이부분은 끝나기 전에 다시 등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뱃사공을 맡은 정일헌 씨는 성량이나 음정이나 딕션이나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했다. 처음 자기소개 부분이나, 배에서 아이 이야기를 해주는 부분은 오늘 공연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다른 역할은 그냥저냥이었지만 주인공인 미친 여자를 맡은 테너는 많이 아쉬웠다. 브리튼 테너 역할은 다른 오페라 역할에 비해서 리트 테너에 가깝다고 표현하고 싶다. 특히 소규모 편성인 나사의 회전이나 도요새의 강이라면 더더욱. 브리튼의 남자였던 피터 피어스 역시 브리튼의 작품을 제외하면 슈베르트나 슈만의 리트로 유명했고, 요즘의 예로는 이안 보스트리지를 들 수 있을 거다. 이탈리아 아리아 처럼 감정을 폭발 시키는 장면 보다 가곡 처럼 가사의 내면적 심리를 섬세하게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 공연은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배를 탑승하기전에 부르는 노래는 단조로웠으며 아이의 무덤을 발견한 뒤의 노래는 감정 과잉이었다. 일단 첫 등장부터 나와서 작품 내내 등장하는 상행 4도 글리산도의 처리가 미흡했다. 글리산도라기보다는 일반적인 포르타멘토 정도에 가까웠다. 이건 you mock me라는 가사에 붙어있는 음정으로 정말로 사람들이 미친 여자를 조롱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작품에서 가장 그로테스크 한 장면인 뱃사공과 합창단의 unless you entertain us 부분이나 온갖 군데서 등장하는 모티프인데 이 부분이 그냥 공연 내내 가수는 물론 연주자들도 제대로 통일되지 않았다. 남들의 조롱을 받는다는 건 미친 여자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고 이 모티프야 말로 그 조롱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인데 제대로 살아나지 않으니 듣는 재미가 없어졌다. 세트로 같이 나오는 하행 장7도 글리산도 역시 계속 불안했다.


또한 후반부에 오열하는 장면에서 비브라토가 너무 과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등장하는 광란의 아리아 장면처럼 해석했기에 브리튼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아쉬웠다. 또 딕션이 좀 어색한 부분이 많았는데, 예컨데 뱃사공이 어두의 r을 혀굴림으로 강조하는 것에 비해 r발음이 아쉬울 때가 있었다. 



듣는 것에 비해 실제 공연하기 어려운 음악이라는 점, 그리고 출연진들 모두에게 매우 생소한 음악어법이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연출은 쉴드를 치기 어렵다.


첫째, 끔찍한 의상과 분장. 수도승들은 눈가를 완전히 검은색으로 칠했고 뱃사공은 얼굴 전체를 빨간색으로 칠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복장을 입었다. 미친 여자는 새하얀 분장에 피눈물을 흘리는 듯 붉은 색으로 눈가를 분장했다. 


국오의 루살카 때도 그랬지만,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분장과 의상을 왜 쓰는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꼰대가 된건가 싶어서 내가 본 오페라 영상물들을 하나하나 복기해보아도 이런 시각 테러를 본적이 없다. 오토 솅크가 연출한 루살카의 초록색 물도깨비 분장이 참 끔찍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실제로 인물이 현실에 없는 존재라서 그렇기라도 하지.


분명 복장과 분장에서 인물의 성격과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내려고 한 시도였을테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상징성을 느낄 수 있지? 눈가를 검게 칠한 수도승들은 감정을 거세시킨 듯한 존재가 된 듯 하다. 그걸 의도한거라면 오히려 틀렸다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다. 극중극 안의 수도승들은 미친 여자를 조롱하지만 곧 여자의 노래에 마음이 움직여 뱃사공을 설득하고, 아이의 무덤을 위해 기도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감정 변화를 분장으로 아예 가려버린 셈이다. 만약 수도승들을 극중극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연기자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정말로 등장 인물이 아니라 코러스 처럼 배치하고 연기하게 할 수 있었을 테다.


피눈물 분장을 한 미친 여자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인물이라면 감정의 변화를 나타낼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의 표정에서 가장 중요한 눈을 저렇게 분장으로 고정시켜놓고 어떻게 연기라는 걸 할 수 있는건지. 인물의 애환은 몸짓과 연기와 노래로 표현해야하는거지 얼굴에다가 붉은점을 찍는다고 생겨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빨간색 페인트를 뒤집어쓴듯한 뱃사공은 가장 미스테리하다. 뱃사공의 캐릭터는 꽤나 독특한 편이고,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여러방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그냥 붉은색이라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고,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런 시각 테러를 감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하다. 



이런 의상들이 단순히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까는 게 아니다. 가장 심각한 건 이 이야기가 결국에 추상화되어버려 실재하지 않는 것 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에 저런 복장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저런 분장을 하고 다니는 인간도 없다. 우주 어딘가를 뒤져본다고 찾을 수 있을 법한 생김새도 아니다. 관객들이 바라보는 무대는, 결국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상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 오페라의 내용이 우리 사회와 가장 밀접했기에 선택했다는데, 어떻게 연출은 우리 사는 세상이랑 제일 동떨어져있단 말인가. 끔찍하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봐도, 이런 비현실적인 의상을 입은 오페라 공연을 떠올리기가 힘들다. 그나마 떠오르는게 피에르 오디의 반지나 마술 피리 연출인데, 그건 그나마 애초에 초현실적인 존재들 아닌가. 노이엔펠스가 로엔그린에서 쥐를 쓸때도 저것보다 보기에 아름다웠다.  


일본 노 연극처럼 인물들이 과장된 가면을 쓰고 있는 컨셉을 따라한건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니, 그래도 노의 복장은 당대 일본인의 복장이다. 


단순히 의상과 분장만이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연기라는 걸 찾아보기 힘들만큼 가수들의 동작과 동선이 단조로웠다. 미친 여자는 전혀 미친 여자 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슬퍼서 한탄하는 정도지, 저 사람은 정말 정신이 나갔구나라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없다. 대부분의 순간에 무대는 심각하게 정적이었다. 듣는 사람도 그냥 앉아있을 뿐이고, 노래하는 사람도 그냥 노래할 뿐이다. 비교적 소극장에서 공연하기 때문에 가수들의 표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 역시 끔찍한 분장에 이미 가려졌다. 후반부에 다 같이 기도하는 장면에서도 전형적인 옛날 오페라 방식으로 일렬횡대 느낌이 나게 서서 불렀다. 


일본 노 연극을 따라서 그런 과장된 복장과 분장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모든 감정과 이야기를 몸짓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어야한다. 그런데 그런 점을 느끼기 힘들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옛날 공연 영상 두개를 찾아봐도 오늘 공연보단 훨씬 긴장감 넘치는 표정과 몸짓을 보여준다. 난 솔직히 오페라 연출가에게 필요한 능력 중 음악이랑 연기 둘 중 하나만 꼭 선택하라고 한다면 연기를 꼽고 싶다. 음악은 지휘자가 말해줄 수 있지만 연기는 오로지 연출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연기는 모든 극 예술의 기본이다. 무대가 텅텅 비어있고 의상이 일상복이라 하더라도 가수들이 연기만 잘하면 거기서는 드라마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마지막에 아이의 목소리가 등장할 때, 아이의 실루엣이 나타나는 것 까진 괜찮았지만 조명을 받고 진짜로 등장하는 건 정말 깼다. 역시나 부자연스러운 분장을 하고 말이다.


무대는 나름 괜찮았지만, 안타깝지만 이 작품은 무대가 딱히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정식 명칭도 오페라라고 하지 않고 Church Parable 이다.  공연 시작전 설명을 듣고 안 사실이지만 일본 노는 작품에 상관없이 무대 구조와 무대 배경이 고정돼있다고 한다. 도요새의 강 역시 중세 교회에서 종교 의식의 일부로 행하던 연극으로 표현한 것이고 실제로도 교회에서 초연됐다. 사실은 무대 장치 거의 없이 공연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중간 중간에 조명 효과는 조금 인위적이거나 자극적이라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극적이긴 했다. 하지만 무대와 마찬가지로 조명 역시 연기 자체에 비하면 부차적인 요소다.



연출 이야기를 더 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해석도 하나 있었다. 뱃사공이 미친 여자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킨 뒤, 미친 여자는 이 강에 날아다니는 새들에 대한 노래를 한다. 그리곤 뱃사공에게 저 새들을 뭐라고 부르냐고 묻고, 그냥 보통 갈매긴데요 하는 뱃사공에게 ‘이곳 도요새의 강에서는 저 새들을 꼭 도요새라고 불러달라’고 말한다. 여기에 뱃사공은 ‘죄송합니다. 이렇게 유명한 곳에 살면서 저것 들을 도요새라고 부르는 줄 알았어야 했네요’라고 대답한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비꼬는 것 같은데, 연출가는 이걸 뱃사공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걸로 표현했다.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일단 사람들이 뱃사공한테 여자를 태워주자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까지는 뱃사공이 아직 여자를 태울 마음이 없다는 게 이야기 진행상 자연스럽다. 둘째로, ‘i should have known to call them curlew’ 라고 하는 부분에서 curlew 를 앞서 언급한 mock 모티프로 글리산도로 노래한다는 점이다. 이건 진짜 미안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비꼬는 거다.



사소한거지만 자막에도 좀 황당한 오역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목의 일부인데 ‘Let me remind you of the famous traveler who once made a riddle in this very place’라는 부분에서 this very place 를 ‘이 대단한 곳에’라고 번역해놨다. 네???? 뒤에 여행자가 한번 더 ‘at this very place’라고 이야기하는 대목도 ‘이 특별한 장소’라고 해논걸 보니 실수라고 하기엔 진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혹시나 내가 모르던 뜻이 있었나 사전 까지 다시 찾아봤다. 자막 감수에 연출자 본인 이름이 써져있던데…. 




훌륭한 작품을 선택한 의미있는 도전이었지만 그 결과는 아쉬움이 더 많았다. 한국인 음악가로만 출연진을 짜는 서울시오페라단 입장에서 브리튼 작품에 경험있는 사람을 캐스팅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을 테다. 이 정도 퀄리티면 출연진들의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출은 브리튼이 어려워서 못 했다고 쉴드 치긴 힘들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브리튼의 오페라를 접해보겠는가. 도요새의 강 역시 이 공연이 아니었으면 찾아볼 생각도 못했을 거다. 다음 현대 오페라 시리즈는 더 나은 모습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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