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오에서 루살카를 올린다고 했을 때 굉장히 기대했다. 하지만 연출에 김학민, 지휘자에 정치용, 오케스트라는 코리아 쿱 오케스트라라는 것이 발표되었을 때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 밖에 없었다. 예산상의 문제인가 했더니 순수 국내 인력으로만 오페라를 제작을 하겠다는 포부였다.
난 기본적으로 경제적 관점에서 보호 무역을 찬성하는 편이다. 국내 산업 발전을 위해선 국내 인력에게 충분한 시장과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 한다. 하지만 여러모로 방법이 잘못 되었다. 보호무역 속에서 소비자들이 울며겨자먹기로 품질 나쁜 국산 제품을 쓸지도 모르지만 질나쁜 공연을 굳이 찾아볼 관객은 없다. 국산을 고집하며 질적 하락이 생기는 순간 전체 시장 규모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단순히 국내 오페라 제작진에게 기회가 많이 간다고 그들의 실력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훌륭한 축구 지도자를 키워내겠다고 국대 감독과 코치진을 한국인으로만 채우는 격이다. 여기서 시행착오를 겪은다고 감독이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나? 차라리 해외에서 지도자 연수를 강도높게 받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거다.
여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학민 단장 본인이 연출을 맡기로 한 건, 국내 인력을 키우겠다는 취지에도 어긋난다. 국내 인력에게 프로덕션을 맡기면 그 인력들이 발전한다는 게 본인의 주장인데, 자기 스스로가 그 혜택의 수혜자가 되겠다는 꼴이다. 차라리 능력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한 신진 연출가들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하면 모르겠다. 단장 본인이 그렇게 강력하게 실행하는 오디션은 왜 연출가에겐 적용하지 못할까. 물론 연출가를 공모 형식으로 뽑는다는 건 나 역시 들어본적이 없지만, 최소한 루살카를 초연하는 것이라면 루살카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공모 식으로 선정할 수도 있었을 거다.
추가로 캐스팅 목록에 이름을 쓰는 법 역시 이상했다. 캐스팅 목록에 서선영이 이윤아 다음에 이름을 올렸길래 서선영이 B팀(금일) 일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A팀 (목토)였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기방식이다. 목금토일 공연을 하고 더블캐스팅이라면 당연히 이름이 먼저 나온 사람이 목토 공연이고 나중에 나온 사람이 금일 공연인 게 상식이다. 젊은 서선영과 권재희를 실질적인 A팀으로 배정하고 선배격인 이윤아와 김동원을 B팀에 배정하는 대신 모종의 이유(아마도 선배 성악가로서 예우?)로 이름을 앞에 넣어줬다라는 의심을 하게 한다. 애초에 A팀 캐스팅일 토요일 공연을 예매했고 서선영을 보기 위해 금요일 공연까지 예매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알게 된거라 다행이긴 했지만, 일종의 기만이라는 생각에 조금 화가 났다.
사소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잘못된 외래어 표기 방식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Dvořák는 드보르작이 아닌 드보르자크라고 써야한다. 그게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표기란 말이다. 거기다가 다음 작품인 오를란도 핀토 파쵸 역시 틀린 표기다. 오를란도 핀토 파초가 맞다. 치경구개음 ㅈ ㅉ ㅊ 뒤에 이중모음을 쓰지 않는다. 명색이 국립오페라단인데 기본적인 표기는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
이처럼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번 공연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연출에 대한 리뷰가 매우 비판적인 배경에는 이러한 연유가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밝히고 시작해야할 것 같다.
그래도 일단 좋았던 점부터 꼽아보고 싶다. 이 공연에서 가장 빛났던 존재는 당연히 타이틀 롤을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이다. 차이콥스키 콩쿨 우승에 빛나는 화려한 경력에 국내 첫 오페라 무대 데뷔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확실한 성량, 거기에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표현력 까지 모두 훌륭했다. 타이틀 롤의 비중이 매우 큰 편이고 아주 다양한 스타일을 노래해야하는데 그때그때 아주 잘 표현해주었다. 1막의 셈 차스토나 몌시츠쿠에선 서정적인 표현을, 2막 보드닉과의 장면에서 폭발 시키는 힘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Ó marno to je 부분은 정말 좋았다. 이미 바젤 극장에서도 루살카를 비롯해 카탸 카바노바와 같이 체코어 오페라를 소화했기 때문에 체코어 딕션도 기대할만 했는데 역시나 가장 훌륭했다. 체코어에서 가장 어려운 발음이 ř 발음인데, 혀굴리는 r발음과 z발음을 함께 내는 듯한 발음이다. 이 발음이 원래도 자주 등장하지만 특히 달에게 부르는 노래에서도 자주 나온다. Tell me, 혹은 Tell him 에 해당하는 Řekni mi, Řekni mu인데 여기서 발음을 대충 뭉개서 전동음 혀굴림을 안하고 그저 z 비슷하게만 발음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서선영은 이 부분 혀굴림을 기가막히게 처리해주었다. 플레밍이나 오폴라이스 같이 내로라하는 소프라노들도 그냥 뭉개는 부분인지라 특히 인상깊었다. 이 것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다른 가수들에 비해 발음이 훨씬 명확한 편이었다.
사냥터지기를 맡은 김재일은 조역이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오히려 노래 표현이 살아있었다. 2막 노래의 불길한 분위기를 살린다든가, 3막 예지바바를 찾아갈 때 유머러스한 연기 역시 일품이었다. 발음도 명확해서 체코어 특유의 거친 느낌이 잘 살았다 .
다른 가수는 전체적으로 무난했다. 사실 다른 오페라보다 바그너적인 접근, 즉 아름다운 선율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가사에 담겨있는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게 중요한 오페라인데 그런 느낌을 표현하는 게 좀 부족했던 건 아쉬웠다.
반면 오케스트라 반주는 실망스러웠다.
물론 코리아 쿱 오케스트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명성에 비해 괜찮은 연주력을 이끌어냈지만, 애초에 이 작품의 오케 비중이 굉장히 큰 편이라 여러모로 아쉬운 장면들이 많았다. 어떤 한국 오케가 반주를 맡든 항상 나타나는 빈약한 다이나믹. 거기에 현악기는 빠른 패시지가 나오면 음정이 갈라지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2막 피날레 처럼 오케가 폭발해야할 부분 역시 맥 빠지는 부분이었다. 오케스트라의 다른 파트 소리가 작다보니 타악기는 필요 이상으로 컸다. 처음 숲의 요정 노래 중간중간 등장하는 투티에서도 무슨 군악대마냥 큰북 소리만 들렸고, 폴로네이즈 부분에서도 선율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외에도 드보르자크 음악 특유의 독특한 아티큘레이션이나 액센트들이 잘 드러나지 않고 밋밋하게 처리된 점 역시 매우 아쉬웠다.
코리안 심포니나 프라임필이 맡았다고 해서 결과가 나아졌을 것 같진 않기 때문에 코리아 쿱 오케 보단 지휘자의 문제도 있을 것 같다. 정치용은 난해한 관현악을 단시간에 트레이닝 시켜 사고 없이 공연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지만 성향 자체가 오페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앙상블이 흐트러지더라도 템포가 가사 변화에 따라 고무줄처럼 변할 수 있어야 하고 듣는 사람의 감정을 흔들 수 있는 다이나믹 변화가 필요하다. 가수의 성량에 맞춰 오케스트라의 볼륨을 제어시키는 모습은 좋았지만 억제시킨만큼 터트리는 부분이 없었다는 게 좀 심각한 단점이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연출이었다.
처음에 프로젝터 영상을 자연스럽게 전환해서 들어가는 것은 나쁘지 않은 효과였지만 그 뒤에 등장하는 1막 무대부터 실망감을 주었다. 호수를 표현하기 위해 무대 가운데 물결 모영의 조형물이 있고 그 사이에서 보드닉과 루살카가 등장한다는 건 참 유치해보였다 . 상징적이지도 않고 사실적이지도 않고, 그냥 학예회 할 때 숲 그린다고 수풀 모양 오려서 붙여논 느낌을 주었다. 그냥 얕은 물만으로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을 왜 저렇게 표현했을까. 아니면 솅크처럼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던가.
극 전체적으로 연기자나 무용수가 계속 등장하는 것도 거슬렸다.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공간을 채우기 위해 등장한다는 인상이었다. 오페라에 연기자들을 넣지 않고 못 배기는 게 ‘순수 국내 프로덕션’의 특징이란 말인가. 처음 숲 요정들이 노래하는 대목이나 루살카가 노래할 때 뒤에 다른 엑스트라들이 있어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숲속의 호숫가에 등장 인물들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산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 그렇다고 그 컨셉이 일관되거나 논리적으로 적용된 것도 아니다. 루살카의 노래를 오히려 정신사납게 만드는 역효과도 있었다.
무엇보다 의상의 수준은 절망적이었다. 지금까지 국립 오페라단 공연에서 의상이 허접하다고 비판받던 파르지팔이나 돈조 때보다도 더 황당한 수준이었다. 일단 루살카를 비롯한 요정들과 보드닉, 예지바바 의상 사이에 어느정도의 통일성도 찾기 힘들었는데, 루살카와 요정의 복장은 무난한 복장인데 보드닉은 뜬금없이 로마 토가 형 옷을 입고 있고 예지바바는 그리스 제사장이라도 되는 듯한 복장이다. 아예 배경을 그리스로 옮기고 싶었으면 오히려 그 점을 훨씬 더 많이 이야기하고 이용했어야 한다.
2막 인간들과 1막의 말도 안되는 괴리는 컨셉이라고 넘어가자. 그렇다 하더라도 삼류 특촬물에 나올 것 같은 퀄리티의 옷을 입혀놀 필요는 없었을텐데 말이다. 2막에서 왕자, 공주를 포함한 모든 인간 배역들이 입고 있던 복장이 마치 1990년대 만화영화에서 우주 악당들이나 입고 나올 것 같은 옷이었다. 만약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컨셉이고 인간 문명에 경고를 한다는 게 연출 의도였으면 그냥 일상 현대복을 입혀놓는게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복장을 입혀놓으니 관객과 괴리가 생겨 어떤 관객도 그 인간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3막 처음에는 무슨 특수부대 처럼 생긴 사람들이 요정들을 추격하는 듯한 장면이 추가되었는데, 인간의 자연 파괴라는 건 컨셉이라니 그렇다 치더라도 2막 의상과 도대체라곤 통일성을 찾아볼 수 없어 황당했다.
거기다 2막의 인간세계를 상징하는 그 빨간색 사각형 무대는 싸구려같아 보였다. 자연은 둥근 원형! 현대인은 직각! 이라는 컨셉이라고 그렇게 해놨다지만 일단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메시지를 던져주지도 않다. 여기에 창문을 통해 모든 사람이 관음증 처럼 쳐다본다는 것 역시 쿠세이의 뮌헨 연출에 나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효과는 오히려 훨씬 떨어진다. 이 연출에선 그 기괴한 복장의 인간들이 현대인과 괴리가 심해 쿠세이가 의도한 비판적 효과를 전혀 얻지 못한다. 이렇게 인간 문명을 완전한 절대악 그 자체로 묘사하면서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게 압축되어버린다.
여기에 무대를 1막에서 2막으로 변형시키는게 아니라 1막의 자연 무대에 2막 인간 무대가 침입하는 형식으로 표현했다. 즉 루살카가 인간세계로 간게 아니라 인간이 자연으로 침입해온 셈인데, 후술하겠지만 별로 설득력 있지 않은 방법이었다.
안무가 인터뷰에서 2막에 섹스 파티를 넣어놨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아 역시 우리나라는 선비의 나라라는 걸 실감하게 됐다 이게 섹스 파티라니, 차라리 아이돌 춤이 더 야하겠다. 그냥 노출 심한 옷 입고 둘이 가까이 붙어서 춤추면 섹스파티가 되는건가?
거기다 난 기본적으로 자연은 순수 - 인간문명은 섹스에 탐닉하는 퇴폐적인 문명 라는 대입 자체가 작품의 오독이라고 본다. 기존 연구들은 오히려 루살카가 가지고 있는 성적 욕망을 지적하고 있다. 1막 루살카의 첫 아리아 셈 차스토의 가사를 보자.
왕자가 옷을 벗고 자신(호수)에게 뛰어든다. 하지만 나는 몸이 없으니까 왕자가 나를 못본다. 내가 인간이 돼서 왕자를 껴안을 수 있다면, 왕자도 나를 껴안고 열렬히 키스해줄텐데!
문제는 여기서 키스하다의 단어가 zulíbal인데, 이게 영어로는 키스로 번역되지만 그냥 입술에 키스를 한다는 게 아니라 아주 자유롭게 온 몸에 하는 키스라는 점이다. 말이 키스지 이런 행동을 우린 속된 말로 ‘물빨’이라고 하지 않나. 그냥 이 단어로도 굉장히 강한 표현인데 zulíbal mne prudce면, 나를 아주 열렬히 물빨해준다는 거다. 왕자가 알몸으로 호수에 온다는 것도 에로틱한 암시를 주는데, 이 표현은 그냥 빼도박도 못하게 성적인 표현이다. 루살카가 인간이 되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성적인 욕구라는 게 이 노래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거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참고로 크파빌은 이 작품에 키스를 뜻하는 7개의 다른 단어를 썼는데 이게 영어로는 다 kiss로 번역된다. 연출자가 그냥 영어 대본으로 공부해서 이런 점을 무시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점은 Timothy Cheek의 책과 Jasna Brackovic의 논문에서 다뤄졌다.
이렇게 강렬한 스킨십을 원한 루살카가 2막에 사람들의 ‘섹스 파티’에 충격을 먹는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 인간들이 변덕스럽고 문란한 걸 강조하려고 했다면 뭐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한다로 표현했을텐데 그런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2막 마지막 장면은 연출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부분이다. 보드닉이 왕자에게 저주를 걸고 공주 역시 왕자를 매정하게 버리는 장면인데 일단 왕자가 마법의 힘에 걸렸다는 걸 그 짧은 순간에 표현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 입장에서 봤을 때는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순간이 되기 쉽다. 발퀴레 2막 끝 보탄이 훈딩에게 Geh라고 외치는 장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이번 공연에서는 루살카가 내동댕이 쳐지니 보드닉이 뒤에서 걸어들어와 왕자 코앞에 다가와 직접 저주의 말을 하는 걸로 나왔다. 그런데 뒤에서 기다리다 들어오는 장면이 마치 괴롭힘당하는 고딩 딸 문제 해결해주려오는 아버지 느낌이라… 실제로 강력한 힘이 있을 것 보이는 것 과는 거리가 멀어서 어색했다. 의도적으로 보드닉의 행동을 평범한 인간 아버지처럼 보이게 한 것 같은데 애초에 보드닉의 캐릭터와 괴리감이 생긴다. 이 부분은 더 자세히 후술하겠다.
이 장면에서 왕자가 살려달라는 말을 최대한 불쌍하고 찌질하게 해야 공주가 지옥에나 가버리라고 하는 말이 좀 설득력이 있는데 그 점 역시 아쉬웠다.
3막에서 생긴 가장 큰 괴리는 루살카 뿐만 아니라 전체 자연이 파괴되었다는 컨셉이다. 루살카 뿐만 아니라 보드닉을 비롯한 다른 요정들도 다 노쇠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리브레토에도 숲이 인간에 의해 파괴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 점을 강조하면서 반대로 루살카 개인의 상황은 부각되지 못 했다. 아마 이번 공연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루살카가 3막에서 원래 Will-o'the-wisp과 같이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게 어색한 건 루살카의 외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루살카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이다. 인간이 되고자 하지만 목소리를 잃고 완벽한 인간이 되지 못하여 2막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고, 왕자에게 버림받고서는 3막에서 요정들에게도 버림받는 존재다. 그냥 왕자한테만 버림받은게 아니라 모든 세계에서 추방당한 존재다. Brackovic는 이게 루살카 작품 자체와도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는데, 체코에서는 너무 바그너스러운 오페라였고 독오에서는 너무 체코스러운 오페라였다. 아 물론 체코에서 그래도 인기는 많았지만. 말러가 빈에서 루살카를 의욕적으로 초연하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마 모든 세계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은 자신의 경험이 루살카와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루살카의 슬픔은 어느 새 숲 속의 모든 존재들이 공유하는 게 되고, 어느새 루살카의 고통은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되었다. 보드닉도 루살카를 챙겨주고, 예지바바도 루살카를 챙겨줌. 덕택에 불쌍해보여야 할 루살카가 외롭지 않아보였다. 실패한 루살카를 자연이 이렇게나 따뜻하게 보듬아준다면, 루살카가 왕자를 칼로 찔러 죽여 물의 요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깨비불이 되길 선택한 그 희생의 의미가 완전히 퇴색한다.
이 컨셉은 마지막에 왕자가 죽고나서 자연이 정화된다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이 때문에 마지막에 루살카가 칼이 아닌 키스로 왕자를 죽인다는 원작 결말이 설득력이 없어진다. 예지바바는 루살카가 물의 요정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왕자를 칼로 죽이는거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루살카는 이를 거부한 뒤 도깨비불이 된 다음에 왕자가 자신의 고통을 끝내달라고 올때야 키스해서 왕자를 죽인다. 왜 칼로 찔러죽이는 건 안되고 키스로 죽이는 건 괜찮은가? 그건 키스가 사랑의 표현이고 결실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으로서 구원이라는 개념은 바그너 오페라에서나 나올 법한 결말인데, 당연히 사람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문제로 남기 쉽다.
이 엔딩이 감동을 주는 건, 루살카나 왕자나 모두 저주에 빠져 해결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오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둘다 행복해질 방법이란 건 존재하질 않는다. 때문에 둘의 사랑은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사랑이 순수하게 빛날 수 있다. 루살카가 칼로 찔러 죽이지 않고 키스로 죽인 것은, 루살카가 왕자를 죽인다는 행위가 루살카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자와 자신의 사랑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독특한 루살카의 결말이 이번 공연에선는 빛이 바래지 않았나 싶다. 왕자의 죽음은 곧 자연의 정화로 이뤄지고, 루살카의 키스는 둘의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자연의 복구라는 대업을 위한 수단처럼 보인다. 거기다 루살카 혼자 빛나는 저편으로 떠난다는 연출은 루살카는 이제 잘먹고 잘살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루살카와 왕자라는 컨셉을 완전히 파괴한다. 저렇게 다른 세계로 나아갈 것이었다면 차라리 왕자를 칼로 찔러죽이고 물의 요정으로서 자연의 품속에 돌아가는 것이 옳다. 연출가는 ‘천길만길 고독의 길을 떠난다’고 하는데, 비가 내리고 빛이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걸 보고 누가 그걸 ‘천길만길 고독의 길’이라고 생각하겠나. 정말 그걸 의도하고 그렇게 표현한거라면, 자기 메시지를 완전히 반대로 전한 셈이다.
예지바바가 루살카를 꾸준히 위로하는 것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용숙 선생님이 기사에서 지적한대로 음악적인 모습을 봤을 때 예지바바와 자애로운 모습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지바바가 인간과 자연의 가운데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루살카와 깊은 연관이 있긴 하다. 하지만 예지바바가 루살카를 위로해줄 동기라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 모습을 통해 예지바바의 기존 텍스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없다. 연출과 음악이 따로 노는 것이다.
넓게 보았을 때 이 오페라를 자연-인간 대립으로 보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 지 모르겠다. 감동이 있나 교훈이 있나? 왕자 처럼 변덕 심하고 문란하면 망하니까 착하게 삽시다? 자연파괴를 막읍시다? 이 오페라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킵시다 하는 오페라였나? 루살카라는 캐릭터를 위해 배경이 존재하는 건데, 마치 배경을 위해 루살카가 존재하는 느낌이다.
인물을 새롭게 바라보았다는 연출자 노트도 아주 어색하다. 보드닉이 생각없는게 아니라 리골레토와 같이 딸의 고통에 슬퍼하는 세상 모든 아버지라니,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새로운 아이디어란 말인가. 파운트니는 1983년에 이미 보드닉을 루살카의 초자아의 일종으로 보는 해석을 내놓았고 쿠세이는 보드닉을 요제프 프리츨로 만들어놨고 헤어하임은 여성의 고통을 바라보는 오페라 청중과 같은 인물로 해석해놨다. 다른 사람들이 보드닉은 왜 Beda Beda슬프다고 물속에서 말만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가를 해석하고 있을때, 아 보드닉은 정말 많이 슬퍼하는구나, 참 자상한 아빠네! 라며 새로운 해석이라니 어이가 없다. 2막 끝에서 보드닉을 인간 아버지 처럼 묘사한 것도 이런 해석의 연장으로 보이는데, 역시 1막과 3막의 보드닉의 모습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외국 공주는 질투심에 행동하는 섹스심벌이 아니라 왕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마음을 얻지 못해 내적 질풍노도를 느끼는 인간이라는 설명도 황당하다. 이건 뭐 공주의 첫대사부터 깡그리 무시하겠다는 거다. 가뜩이나 리브레토 상 거의 이아고 급으로 남의 파멸만을 바라는 존재인데. 거기다 이 아이디어는 오히려 전체 컨셉에 반하는 거 아닌가?
오페라 연출에도 역사적 흐름이란 게 있다. 단순히 유행을 탄다는게 아니라, 수많은 연출가들과 음악학자들이 작품을 놓고 해부하고 분석한다는 의미다. 사서오경을 그냥 원본으로 공부하는게 아니라 원본도 보고 주자가 해석해논 것도 보고 그 뒤 수많은 다른 해석을 보고 공부하는 것 처럼 말이다.
루살카 역시 마찬가지다. 초기에 동화적인 환경에 집중했다면 나중에는 루살카 개인의 심리와 루살카가 겪는 비극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 프로그램에 나온대로 4음 모티프가 처음에는 ‘물의 마법’으로 분류되었지만 나중에 절규나 운명 모티프라고 분류하는 것 역시 그런 흐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Brackovic의 표현). 앞에 언급한 것 처럼 보드닉 하나를 해석하는 것만 봐도 솅크 때와 최근 연출가들이 완전히 다르다.
시중에 나온 루살카들이 죄다 독특한 해석을 담고 있는 것 역시 이런 이유다. 바그너 연출이 어렵듯이 루살카의 연출도 아주 어려운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연출들이 그냥 그렇게 나오는 것들이 아니라, 연출가들끼리 서로의 컨셉을 보고 비교하고 작품을 분석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봐야한다.
밖에서는 다들 이렇게 치열하게 해석하고 있는데, '우리손으로맨든' 오페라를 표방하며 일차원적인 해석을 새로운 시도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국내 오페라 팬으로서는 분통 터질 일이다. 국내 초연이니 전통적인 연출을 한다고 하면 차라리 이해가 갈텐데, 자기들도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애매모호한 해석으로 작품을 망쳐논 느낌이다.
김학민 단장 본인이 순수 국내 프로덕션을 표방하며, 이것이 우리 오페라계가 발전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해외 연출을 보는 것 대신 김학민 연출을 보는 것으로 관객이나 예술인들이 루살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했을 것 같진 않고, 남은 건 연출팀이 이번 공연으로 경험을 쌓았다는 것 밖에 없다. 거기다 외부의 시선으로 비판받지 않는다면 이번 연출이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가 없고 그렇다면 더 발전할 여지도 없다. 너무 심한 말이지만, 어쩌면 단장 본인의 능력 개발을 명목으로 국립오페라단과 관객들이 동원된 격이다.
정말로 한국 오페라계의 발전을 원한다면, 오페라 반주에 특화된 오케스트라를 육성해야하고 지휘와 연출 인재들이 유럽 극장 시스템에 참여하여 경험을 쌓을 수 있게 지원해줘야한다. 가수와 합창단, 오케스트라는 훌륭한 지휘자와 연출가 밑에서 공연하며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지만, 평범한 지휘자와 연출가가 이 좁은 우물에서 계속 기회를 얻는다고 해서 저절로 훌륭해지진 않는다.
이 걸로 고소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 국립오페라단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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