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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실황과 영화의 결합
발매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찍어두었던 오페라다.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성에 있는 바로크 극장은 250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성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 유산인데 그 중에서 이 바로크 극장은 나같은 사람에게 더더욱 진귀한 존재다. 아주 오랫동안 묻혀진 극장이지만 2011년에 주세페 스카를라티의 '사랑이 있는 곳에 질투가 있다Dove è amore è gelosia'를 공연하며 이 극장에서 여전히 오페라 상연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냈다. 이 작품은 1768년에 같은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이기도 하며 250년이 지나 같은 장소에서 상연된 이 공연은 오푸스 아르테에서 영상물로 발매됐다. 18세기 바로로크 극장의 구조와 무대 장치를 그대로 재현해냈기에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심지어 오케스트라도 가발을 쓰고 연주하며 지휘봉 대신 악보뭉치를 사용한다.
이런 극장에서 비슷한 컨셉의 새로운 영상물이 발매됐다니 관심이 가는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작 구입은 한참 뒤에 프클 바로크 할인을 할때 했다. 아트하우스 풀프라이스 블루레이라 선뜻 구매하기 어려웠다. 베준 메타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반주를 맡은 콜레기움 1704 역시 처음 들어보는 단체였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시작했다.
글루크는 오페라 역사에 있어 보석같은 존재다. 몬테베르디가 보여준 음악과 극의 조화는 바로크 오페라를 거치며 퇴색되었다가 글루크에 의해서야 다시 복원되었다. 글루크가 보여준 오페라의 이상은 모차르트가 완성하였고 다시 벨 칸토 오페라라는 불균형을 지나쳐 바그너가 새롭게 완성했다. 글루크 오페라는 이전의 오페라 세리아와도, 이후의 벨 칸토 오페라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앞서 퍼셀의 음악이 매우 단정하며 간결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글루크는 여기에 플롯의 간결함 까지 갖추었다. 블로그에서 예전에 리뷰한 두 이피제니에서 나타나듯이 각각의 인물이 겪는 갈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기에 관객은 즉각적으로 인물과 교감할 수 있다.
오르페오 영상을 처음 본 건 2014년이었다. 라 푸라 델스 바우스가 연출을 맡은 공연으로 오케스트라 연주자 모두가 무대 위에 등장해 연기를 해가며 반주하는 파격적인 공연이다. 라 푸라의 연출에 독특한 게 많다지만 이 공연은 오페라를 새로운 극 장르로 옮겨놓은 시도라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 마저 극의 주요 요소가 된다는 점은 글루크가 생각한 방향을 확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연출의 독특함이라면 이 체스키 크룸로프 공연 역시 라 푸라에 못지 않다. 이 영상은 극장 안에서 촬영한 오페라 영화다. 연출가 온드제이 하벨카Ondřej Havelka가 이전에 작업한 '사랑이 있는 곳에 질투가 있다' 영상이 공연을 영화처럼 찍은 것에 가깝다면, 오르페오는 극장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영화다. 1막은 바로크 공연의 완벽한 재현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 때 까지는 전작과 비슷한 컨셉의 연출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오르페오가 지옥에 내려가는 장면부터 완전히 달라진다. 더 이상 무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장의 계단을 통해 정말로 지하 공간에 내려간다. 그렇게 다시 에우리디체와 지상으로 완전히 나오기 전까지는 무대가 아니라 극장 안의 지하 공간, 복도, 계단 등에서 영상이 진행된다.
기묘하다. 단순히 이 영상이 공연 실황도 아니고 오페라 영화도 아닌 잡종이기 때문이 아니다. 1막에서 2막으로의 전이는 일종의 패러다임 탈피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오르페오는 가수다. 어는 누구도 그를 진짜 오르페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오르페오로 분한 베준 메타일 뿐이다. 영상을 보며 관객은 자신이 18세기로 돌아가 오페라 공연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르페오가 무대 위에서 극장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베준 메타는 오르페오를 맡은 가수가 아니라 오르페오 자체가 된다. 가수가 연기를 하기 위해 무대 밑으로 내려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출가는 극 예술과 영화 예술의 차이를 교묘하게 활용한다. 단정지어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만, 대체로 영화 속 공간은 무대 보다 사실적이다. 극 예술을 볼때 관객은 사건이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언제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안의 공간은 우리가 숨쉬는 공간이다. 실제로 그 공간이 물리적으로는 극장의 무대보다도 더 분리된 공간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영화를 '실제 일어났던 일의 기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한 공간(체스키 크룸로프 극장) 안에서 계속 찍었음에도 무대 위에서 찍은 장면은 공연 실황처럼 느껴지고 무대 밖에서 찍은 장면은 영화로 느껴진다. 그냥 계단을 내려갔을 뿐인데 말이다.
이 오르페오 영상은 내게 짓궂은 질문을 던진다. "공연 실황과 영화판은 어떤 차이가 있지?" 난 오페라 영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제피렐리나 포넬의 영화 말이다. 이게 오페라 영화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불만인지 아니면 저 오래된 영화 연출들에 대한 불만인지 선뜻 구분하지 못하겠다. 뮤지컬 영화는 꽤 좋아하고, 비교적 최근 나온 마탄의 사수 영화판인 'Hunter's Bride'도 상당히 좋게 봤다. 반대로 제피렐리 스타일로 만든 라 보엠 영화판은 썩 재밌진 않았다.
오페라 영화는 공연 실황보다 사실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실제 일상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다른 영화와 달리 사람이 노래로 대화하는 건 무대 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서 그럴까? 하지만 이 영상을 볼 때, 2막 시작과 동시에 이 게 공연 실황이라는 기대가 깨지는 동시에 베준 메타는 영상 속에서 진짜 오르페오가 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그렇게 바라보게 된다.
똑같은 표현을 되풀이하는 것 같은데 그 만큼 이 작품이 나의 관점을 흔들어놨기 때문이다. 내가 오페라를 보며 당연하게 바라보았던 무대라는 공간이 얼마나 괴상한 공간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무대에선 사람들이 가짜를 진짜처럼 꾸며내며 모든 사람이 그 가짜를 진짜로 믿는다. 그 동안 난 오페라가 무대 위에 있을 때만 '진짜'가 된다고 생각했다. 오페라 영화에서는 가짜 오케스트라가 배경 음악을 연주하고, 가수들이 가짜로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이 오르페오에서는 반대로 무대를 벗어나는 순간 인물이 진짜가 되어버린다. 그동안 난 무대 위의 진짜를 기록한 가짜 영상에서 진짜의 향기를 맡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던 게 아닐까.
영화의 충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3막에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결국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고, 다시 무대 위에 등장한다. 피날레를 연주하는 동안 베준 메타는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려와 공연을 바라본다. 그리곤 공연이 끝나면 기나긴 통로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1막에서 2막의 변환이 공연에서 영화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었다면 이 마지막 장면은 다시 영화의 영역에서 공연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진짜 오르페오라고 믿었던 그 인물이 그냥 오르페오 역을 맡은 가수로 돌아가버린 셈이다. 오르페오가 지하에서 겪었던 일은 무대 위의 가상이 아니라 영화적 진실이었는데, 사실은 그것도 그저 연기의 일부였을 뿐이다. 어쩌면 이걸 메타 오페라 영화 -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을 바라보는 오페라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부클릿의 글은 이 마지막 트릭을 해석하는데 단서를 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오르페오는 외부의 존재이다. 어쩌면 정말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오 본인이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첫 오프닝 장면은 오르페오가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의도치 않게 호출된다는 느낌을 준다. 오르페오는 바로크 극장에서 자기의 역할을 다 해낸다. 그리고는 다시 객석으로 나와 무대를 바라봄으로써 이 모든 것이 극장의 허구라는 것을 폭로한다. 그가 퇴장하는 통로에는 미지의 출구가 있는데, 이 곳은 오페라가 바로크 전통에서 벗어난 글루크의 이상향을 상징한다. 글루크의 예술과 연관 짓는 것이 살짝 많이 나갔다는 인상도 있지만, 오페라에서 '진짜'를 만들어내려고 한 글루크의 노력과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가 공유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이렇게 오페라와 영상의 조합으로 다양한 층위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그 충격은 잊기 어렵다. 바로크 무대 장치와 미술, 심지어 촛불 조명까지 다시 복원한 전작 '사랑이 있는 곳에 질투가 있다'가 바로크 극장의 재현이 주는 '가장 오래된 것의 신선함'을 보여주었다면 이 작품은 오페라를 담아내는 그릇, 무대와 영상이라는 두 개념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연주와 노래 역시 훌륭하다. 그 동안 베준 메타의 노래나 연기에 확신이 없었는데, 정말 최고 수준의 예술가라는 걸 절감했다. 카운터테너 중에도 특별히 뚜렷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데다가 차분한 프레이징을 선보이는데 글루크 음악에 딱이다. 그 전에 보았던 시오도라나 Written on Skin 에서 맡았던 역할이 상당히 난해해서 확 와닿지 않았지만 연기 역시 훌륭하다.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오르페오를 표현해낸다.
에우리디체 역의 에파 리바우Eva Liebau도 베준 메타 만큼은 아니지만 노래와 연기 모두 괜찮다. 다만 사랑 역을 맡은 레굴라 뮐레만Regula Mühlemann은 좀 많이 부족하다. 일단 이탈리아어 딕션이 너무 안 좋고 레치타티보 처리도 미숙해서 그냥 학생이 부른 느낌이 들 정도다. 이 가수는 Hunter's Bride에서 앤헨 역으로 나와 연기나 노래 모두 좋아 정말 인상깊었는데 배신당한 느낌. 오페라 영화 출연 경력도 있고 외모나 연기가 괜찮은 편이라 뽑은 것 같은데 노래는 정말 끔찍하다. 내가 지금까지 영상으로 본 가수 중에 이탈리아어 딕션이 제일 구리다. 콜레기움 1704는 체코의 바로크 전문단체인데 반주가 상당히 훌륭하다.
영화 촬영때 노래나 연주를 모두 라이브로 했다는데 그럼에도 가끔 싱크가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거슬리는 장면은 별로 없는 편이다. 가끔 영상에 뽀샤시 효과가 과한 부분이 있고 2막의 합창단과 무용수들의 복장이 B급 영화를 보는 듯한 퀄리티라 좀 아쉽다. 플레이 타임이 다른 음반에 비해 짧은데 합창의 길이를 줄이고 무용 몇개가 잘렸다. 볼때는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유명한 정령들의 춤도 짤린 것 같다.
표지에 베준 메타 사인 카드가 들어있다길래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진짜 들어있다.
싸인도 정말 펜으로 직접 했다. 뭔가 처음 보는 마케팅이라 새롭다. 70분짜리 오페라 46,800원에 팔아먹으면 이런 거라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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