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냐코프와 쿠렌치스의 훌륭한 협업
마지막으로 무슨 영상을 봐야 후회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믿고보는 ‘오알못’ 쿠렌치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느낀 건 쿠렌치스를 볼려고 선택하면 쿠렌치스만 돋보이는 게 아니라 연출이나 작품도 함께 빛난다는 것이다.
이 영상에선 드미트리 체르냐코프의 천재성이 작품을 이끌어나간다. 기억을 되짚어 봤을 때 체르냐코프의 연출을 처음 접한 건 엑상프로방스의 돈 조반니였다. 그때 인상은 상당히 독특하고 도발적이지만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체르냐코프의 연출에서 아주 중요한 점이다. 돈 조반니의 마지막 석상 장면을 이렇게 현실적으로 말이 되게 풀어낸 사람은 체르냐코프 밖에 보지 못했다.
맥베스에서 체르냐코프는 이 장점을 잘 발휘한다. 마녀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대중이 되었다. 신비스러운 환상도 없고 반코의 유령도 등장하지 않는다. 스코치아의 왕권을 둘러 싼 이야기는 한 도시의 권력 다툼 정도로 줄여졌고, 맥베스와 둔카노는 친족 내지는 마피아 패밀리 정도의 관계로 보인다. 체르냐코프는 맥베스와 레이디를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최대한 평범한 사람이 타락해가는 과정을 공감가도록 그려낸다,
몇가지 아주 효과적인 장치들을 언급해보자. 1막 2장에서 레이디가 편지를 읽는 장면은 맥베스가 미리 녹음한 소리로 처리했다. 그리고 편지 낭독이 끝나고 프로젝션이 걷히면 Ambizioso spirito, tu sei Macbetto를 말하는 장면은 레이디와 막베토가 함께 등장한다. 즉 1막 2장 레이디의 레치타티보와 카바티나 카발레타가 혼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레이디가 막베토에게 말하는 노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레이디의 사실적인 연기는 이 부부의 관계가 ‘남편의 성공을 바라는 부인’의 전형적인 예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노래하는 컨텍스트를 바꾸는 게 또 한 번 등장하는 것이 2막의 암살자 합창이다. 동네 건달들이 공터에서 반코를 둘러싸고 위협하며 부르기 때문에 노래에서 극적인 긴장감이 생기게 된다. 반코가 암살당하는 장면 역시 군중이 휘몰아치며 걸어가면 반코가 혼자 쓰러져있는 것으로 연출했는데, 평범한 연출가들에게 기대하기 힘든 세련된 장면이었다. 반코가 죽을 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군중 안에서의 조용한 살인’으로 표현해냈을 때 관객도 그 공포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맥비커도 그렇지만, 체르냐코프의 연기 지도도 탁월하기 이를 데 없다. 체르냐코프의 연기는 맥비커에 비해 훨씬 더 거칠고 연극적이다. 맥비커가 아름답고 우아한 영화적 표현을 활용한다면 체르냐코프는 분노하거나 공포에 떠는 인간을 잘 그려낸다. 안드레아 셰니에와 맥베스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두 연출가 모두 영상물로 출시한 바 있는 일 트로바토레에서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1막 피날레에서 막두프가 시신을 발견했을 때의 연기부터 그 이후에 이어지는 시퀀스는 마치 추리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마냥 사실적이다. 2막에서 맥베스가 반코의 유령을 보는 장면 역시 주위 사람들의 반응과 맥베스를 말리는 레이디의 동작까지 모두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역시 마지막 피날레였다. 맥베스의 피날레가 좀 매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것 같다. 맥베스의 죽음 이후 등장하는 마지막 합창은 해방된 사람들의 기쁨도 아니고 어째 긴장감 가득한 행진곡이다. 체르냐코프는 아주 설득력있는 해석을 들려준다. 맥베스 혼자 집에 남아있고 합창단이 오프스테이지에서 노래하는 동안 무대의 벽(맥베스의 집)을 정말 망치로 부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맥베스의 입장에서 음악을 듣게되고, 그때야 그 피날레 음악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체르냐코프의 다른 연출과 마찬가지로 무대가 훌륭하다. 체르냐코프는 극을 실내의 좁은 공간으로 옮기는 것을 좋아한다. 일 트로바토레는 완전히 실내극으로 만들어냈고 돈 조반니도 비슷하다.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츠의 전설도 약간 이런 면이 있는 듯하다. 이렇게 좁은 실내로 바꾸는 건 사건의 배경을 굉장히 현실, 사실적으로 만들어주며 상대적으로 인물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어준다. 인물이 공간을 꽉 채우게 된다. 맥베스와 같은 심리극에서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여기에 마치 창문을 통해 바라보게 만드는 프로젝션 연출도 초점을 좁히는 역할을 했다.
또 다른 배경인 공터가 주는 느낌도 매력적이다. 이걸 딱 보는 순간 셰로와 페두치의 신들의 황혼 3막이 생각났다. 회색빛의 넓은 공터, 이리저리 움직이는 군중들. 평범한 군중처럼 보이지만 도대체 무슨 속인지 알 수 없는 듯한 디테일이 그들을 ‘마녀 같은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외딴 곳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자신에게만 묘한 눈빛을 줄때의 섬뜩함이라고 해야할까.
쿠렌치스는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자신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공연을 한 2009년이면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감독으로 한국에 카르멘을 하러 왔던 해다! ‘쿠렌치스 내한 오던 시절’이라니…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다. 이 공연 역시 파리 오페라와 노보시브르스크 오페라의 공동 제작이다.
사실 1막 앞부분은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다. 의도적인지 모르겠지만 나사를 덜 조였고 기합을 넣지도 않는다. 이탈리아 오페라 특유의 마지막 아첼레란도도 넣지 않아 심심한 느낌도 난다. 하지만 1장의 마지막인 마녀들의 퇴장 합창 S’allontanarono! 에서 대놓고 템포를 꼬아버리며 이제부터 시동건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2장 레이디 아리아부터는 쿠렌치스 특유의 현악기 아티큘레이션이 빛을 발한다.
가장 중요한 듀엣 장면에서는 베르디가 써놓은 약음기를 무시하고 레이디가 나오는 장면부터 약음기를 낀 듯하다. 그렇다고 맥베스가 너무 심하게 노래지르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한 건 각 막의 피날레로 큰 흐름을 끌고 가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막 초반에는 어느 정도 힘을 아끼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가다가 막의 후반이 될 때 극적인 폭발을 만들어낸다. 3막의 발레가 빠진 건 좀 아쉬운 부분이다. 다른 데도 아니고 파리 오페라에서 하는 건데 당연히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ㅠㅠ
가수들 역시 훌륭하다. 타이틀 롤을 맡은 디미트리스 틸리아코스Dimitris Tiliakos는 쿠렌치스 돈 조반니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가수로, 그리스에서 쿠렌치스와 같은 선생님 밑에서 성악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성악적인 기교가 특출난 가수는 아니지만 필요한 만큼의 연기와 노래를 잘 소화해내는 모범적인 가수다. 지휘, 연출빨 잘 받는 가수라고 할까. 레이디를 맡은 비올레타 우르마나Violeta Urmana는 가면 무도회에서 좀 실망스러웠지만 이번에는 놀라울 만큼 잘 해낸다. 강렬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일단 레이디에 합격점인데 쿠렌치스와 만나서 그런지 상당히 간명한 프레이징을 보여준다. 체르냐코프의 연출에 대한 이해도도 아주 높아서, 연기력도 놀라울 만큼 훌륭하다.
반코 역의 페루초 푸를라네토Ferruccio Furlanetto는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목소리이지만 반코의 진중한 노래를 표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한창일 때 노래도 한번 찾아 들어야할텐데.. 막두프 역의 스테파노 세코Stefano Secco는 상당히 아름다운 목소리의 테너로 기억에 남았다.
30분 간의 다큐가 상당히 흥미롭다. 체르냐코프가 이 오페라를 어떻게 접근했는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꽤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음악이나 연기 리허설 과정도 잘 드러나있다. 아주 모범적인 부가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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