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가 현대 오페라로 장사하는 법.
집에 내려오면서 볼 블루레이를 못 챙겨왔다. 새해 0시가 시작됐을 때 상큼하게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 NAS에서 파일 하나를 챙겼다.
토마스 아데스의 템페스트. 마젤의 1984와 함께 쌍둥이로 묶고 싶은 작품이다. 연관성이 없는 작품이지만 공통점이 아주 많다. 둘 다 비교적 최근에 공연한 주제에 블루레이로는 안나오고 디비디로만 나왔고, 둘 다 작곡가가 직접 지휘하였으며, 둘 다 영국 로열 오페라에서 초연했고, 둘 다 영국 작가 작품을 원작으로 했고, 둘 다 사이먼 킨리사이드가 주연이고, 둘 다 로베르 르파주가 연출을 맡았다.
난 사이먼 킨리사이드를 상당히 좋아한다. 앞 글에서 언급한 킨리사이드 입덕 영상인 메트 햄릿을 메가박스 가서 3만원 주고 봤거든. 내가 그 때 닥터후에 빠져 살 때라 영국 특유의 아가리 파이터 캐릭을 아주 좋아했는데, 킨리사이드가 보여준 햄릿이 딱 그런 캐릭터였다. 특히 그 곤자고 연극 하면서 미친 연기 하는 대목. 내가 그 때는 정말 오알못이던 시절이었는데 그 순간 부터 사이먼 킨리사이드라는 이름은 절대 안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뒤로 이렇게 오페라를 많이 보면서도 토마 오페라는 단 한개도 못 봄ㅋㅋㅋㅋㅋ
그렇다고 막 카우프만 모으듯이 킨리사이드를 모은 건 아니고, 오 킨리사이드네? 믿고 살만하겠군 이런 느낌이었다. 근데 사실 정작 블루레이 산건 별로 없는 게 함정. 그래도 로열 오페라 오네긴 나왔을 땐 홀텐 + 킨리사이드 보고 바로 질렀다. 맥베스도 샀구나. 그러고 나서는 사실 잘 알다시피 킨리사이드가 빈 슈타츠오퍼에서 리골레토 공연 중에 대형사고를 치기도 했고 돈 카를로 디비디도 보고 돈 조반니 디비디도 봤지만, 사실 또 킨리사이드가 막 그렇게 대단한 바리톤은 아니잖아? 굳이 열심히 모으진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 하일트님 블로그에 푹 빠져서.. 왠지 평소에 나도 킨리사이드를 엄청 빨아왔던 것 같은 착각도 들고... 맨날 우리 오빠놈 노래 못한다고 까는 글을 보니 얘가 진짜 노래를 못했던가 싶기도 하고...
템페스트와 1984 중에 템페스트를 고른 건, 내가 최근에 이 오페라를 보려고 셰익스피어 원작을 읽기도 했다는 점이 첫 째였고 둘 째로 이 오페라가 더 짧다는 이유였다. 1984는 원작도 참 길잖아? 그거 언제 다 읽고 언제 오페라 보지ㅋㅋㅋ
오페라의 내용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대부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대선 큰 차이점이 하나 있는데 프로스페로가 자기 딸 미란다를 퍼디난드와 의도적으로 엮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둘이 눈이 맞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딸을 원수의 아들에게 뺏겨 슬퍼하는 것이 오페라 후반부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다.
사실 난 토마스 아데스Thomas Adès가 당연히 어디 뭐 프랑스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영국인이 왜 성에다가 è를 쓰는거지. 그래서 발음도 아데가 맞는 줄 알았는데... 이거 보기 전까지 아데스에 관해 아는 거라곤 래틀이 베를린필 투어 할 때 연주곡목에 넣었다 정도?
아데스의 음악은 상당히 오묘하다. 미국 미니멀리즘은 아니지만 조성적 느낌이 꽤 많이 나는 편이다. 관현악법이나 조성적인 면은 난해한 면이 있지만 아방가르드와는 거리가 꽤 멀어서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 관객들에게 상당히 어필할 만한 매력을 가진 작곡가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현대 음악에서 기대하는 비정상적인 기발함이라든가 그로테스크함은 좀 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20세기 초반 음악이라고 해도 딱히 놀라지 않을 느낌이다.
잠깐 들어본 다른 작품들에 비해 특히나 템페스트가 단조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성악 파트의 리듬이 대체로 상당히 단순하며 템포 변화가 크지 않다. 공기의 정령인 에어리얼의 파트는 매우 독특하지만 나머지 파트는 대체로 비슷하다. 한 박에 한 음절씩 규칙적으로 나오는 장면이 너무 많다. 음정의 변화가 그나마 독특한 편이지만 기본적으로 말을 하는 리듬이 너무 단조롭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리듬의 단조로움은 오케스트라에도 이어지는데, 레치타티보 스타일의 장면에서 오케스트라 반주 역시 성악파트와 정확히 똑같이 가는 부분들이 종종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반주가 이렇게 성악과 완전히 같은 흐름으로 가는 장면이 많은 점이 다른 오페라와 큰 차이점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로맨틱한 장면에서 브리튼 처럼 갑자기 태세전환해서 아주 단아하며 절제된 낭만적 음악을 들려줘서 관객의 입맛에 맞춘다. 브리튼 까지는 어울리지만 21세기 오페라에서 까지 굳이 이런 장면을 봐야할까 싶다. 브리튼을 이을 영국 작곡가라고 홍보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제2의 브리튼이 되는 건 좀 아니잖아?
르파주의 연출 역시 메트 관객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다. 내가 반지에 막 입문할 때 메트에서 화려한 연출로 엄청난 이목을 끌었고 나 역시 르파주의 연출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라인골트는 분명히 기발한 장면이 몇개 있었다. 하지만 이후 작품부터 르파주는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고 오토 솅크와 경쟁할 만큼의 쓰레기를 만들었다. 음 차라리 솅크는 뭐 나름대로 가치라도 있지 르파주는 메트가 오페라를 바라보는 수준이 얼마나 얄팍한지 반증해버렸을 뿐이다.
르파주는 오페라를 해석해내는 재능은 별로 없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무대 기술에만 능력치를 몰빵한 케이스다. 르파주가 나와서 뭐 작품의 메시지에 관해 가끔 인터뷰하는 걸 봤는데 그걸 들으면 뭔가 그럴싸 하면서 얘도 연출가로서 능력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사실 그런거 없다. 연출가로서 작품 해석 능력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21세기에 그런 바그너를 내놓을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르파주가 인기 있는 오페라 연출가가 될 수 있는건, 그 무대 기술 능력이 남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만렙이기 때문이다. 사실 애초에 르파주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무대 특수효과 감독이라고 하는게 맞지 않을까. 자기가 세운 엑스 마키나나 연출 맡았던 태양의 서커스를 생각해보자. 엘지에서 종종 르파주 연출의 연극을 공연하는데, 갔다온 선배의 평은 극한으로 끌어올린 기술은 곧 예술이 된다 라는 논지로 기억한다. 그 연극 작품을 보지 않았지만 이 말은 르파주의 오페라 연출에도 똑같이 해당한다.
르파주는 프로스페로가 밀라노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온갖 마법이 등장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무대를 라 스칼라로 설정했다. 오페라 무대야 말로 온갖 마법이 등장하는 곳인데 르파주에게는 특히나 그럴 것이다. 첫 서곡에서부터 무대 위는 재미난 볼거리로 가득차있다. 샹들리에에 매달린 에어리얼은 서커스를 연상시키며 푸른 천과 무용수로 표현한 파도의 폭풍도 멋지다. 무대 속 오페라 극장의 프롬프터 박스는 트랩도어 역할을 하며 에어리얼은 르파주의 회사 이름 '엑스 마키나'마냥 무대의 기계 장치위에서만 존재한다. 마지막 피날레에서 프로스페로의 지팡이가 갑자기 한줌 먼지가 되서 사라지는 건 진짜 소름돋았다. 어떻게 한거지...
바그너 처럼 리브레토를 그대로 옮겼을 때 중구난방이 되는 극과 달리 템페스트는 잘 짜여진 서사를 가지고 있고 이 점은 르파주에게 참 다행이다. 르파주가 이번 시즌에도 메트에서 현대 오페라 연출을 맡았던데, 차라리 리브레토가 추가적인 해석이 덜 필요할 때 르파주의 능력은 빛날 수 있다.
르파주의 화려한 무대도 중요하지만, 등장하는 가수들 역시 '노렸다'는 느낌이 물씬 난다. 일단 프로스페로 역 킨리사이드를 활용한 얼빠 장사를 제대로 한다. 어깨 한쪽을 벗겨 놓은 상반신 노출은 물론이요,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장면에도 계속 무대에 등장해준다. 메트 측에서 "킨리사이드는 노래 부르라고 캐스팅한게 아니라 벗겨서 무대 위에 올려놓을려고 데려 온 겁니다. 노래 부르든 말든 일단 벗겨서 올려놓으세요. 그래야 관객이 늘고 후원금이 늘어납니다" 라고 주문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의 블로그에는 이미 템페스트의 킨리 슴가 캡쳐가 많이 올라와있다. 여기에 커플 역인 미란다와 퍼디난드 역 가수 역시 얼굴 보고 뽑은 게 아닐까 싶었다.
가수들 중에는 킨리사이드가 제일 빛난다. 얼마나 못할까 걱정반 기대반이었는데 잘 해서 놀랐다. 성량 작다고 맨날 까던데 성량도 제일 크더라. 솔직히 캐스팅에서 킨리랑 비슷한 급이라 칭할만한 가수가 없긴 하지만.. 메트에서 마이크 게인으로 장난친건 아닐까도 조금 의심스럽다. 안정적이며 너무 발산하진 않은 채 적당히 그 고통을 안으로 한번 곱씹어 뱉는 듯한 노래와 연기였다. 곁다리지만 초연 때는 킨리 이외에 캘리번 역에 이안 보스트리지, 세바스티안 역에 크리스토퍼 몰트만이 나와 꽤나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했다. 여기에 늙은 왕 역에는 나이가 한참 먹긴 했지만 필립 랑그리지가 나왔다고..
에어리엘 역의 오드리 루나Audrey Luna는 이 살인적인 역할을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강렬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다. 찾아보니 아데스의 오페라를 세 편이나 공연했더라. 기교가 비현실적이라 현대음악 쪽으로 확실한 포지션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캘러번 역을 맡은 앨런 오크Alan Oke는 마침 저번 그라임스에서 본 가수다. 에어리얼과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역할인데 잘 소화해낸다. 그 외에 곤잘로 역을 맡은 베이스 존 델 카를로John del Carlo가 길지 않은 파트를 맡았음에도 빛난다. 카운터테너 이스틴 데이비스Iestyn Davies 역시 작은 역할임에도 돋보이는 노래를 들려준다.
프로스페로의 동생인 안토니오 역을 맡은 토비 스펜스Toby Specne는 브리튼의 글로리아나와 나사의 회전에서 본 가수라 기억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상당히 힘겨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역을 맡기에는 음역이 안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상한 건 초연 때부터 스펜스가 이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지휘는 작곡가 본인이 맡았는데, 다른 장르에 비해 오페라에는 훨씬 다양한 지휘 테크닉이 필요하다는 걸 감안했을 때 무리 없이 잘해낸다. 리듬 구조가 어렵지 않은 점이 아무래도 지휘할 때 편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줄 요약. 메트 답게 현대 오페라이지만 듣기 쉽고 보기 좋다. 그게 장점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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