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제서야 이 작품을 봤을까.


러시아에 꽂혔으니 러시아로 달려보자. 러시아어로는 Пиковая дама(Pikovaya Dama), 알파벳으로는 오네긴과 마찬가지로 보통 불어로 표기해 Pique Dame으로 쓴다. 스페이드의 여왕을 예전부터 꼭 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이 블루레이가 장바구니에 안 들어가더라. 왠지 좀만 더 기다리면 오푸스 아르테 떨이로 풀릴 것 같고, 그렇다고 러시아 오페라 박스셋으로 사자니 5개 중에 3개나 겹치고. 그렇게 알라딘 보관함에 고이 썩혀둔 지가 한참인데 예상치 않게 샤이보이님의 은혜를 받아 블루레이를 볼 수 있게 됐다. 충성충성충성! 


한참 오네긴에 꽂혀 살 때 푸쉬킨의 원작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푸쉬킨의 작품 중 오네긴, 대령, 스페이드의 여왕이 함께 묶인 책이었는데 오네긴을 다 읽고 나서 스페이드의 여왕도 함께 읽었다. 솔직히 책으로 읽기에는 오네긴 보다 스페이드의 여왕이 짧고 굵어서 재밌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박 이야기다. 원작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주인공은 헤르만이라는 독일계 러시아군 장교다. 헤르만은 도박을 좋아하지만 가난해서 도박에 낄 돈도 없다. 이때 톰스키가 자기 할머니가 왕년에 잘나갈 때 생 제르망 백작으로터 도박을 이기는 마법의 카드 세 장에 대한 비밀을 배웠다고 말한다. 헤르만은 이 비밀을 알기 위해 할머니(Countess, 여백작인지 백작 부인인지는 몰라서 번역하기 개귀찮)에게 접근하기로 한다. 그래서 이 할머니의 피후견인인 리자라는 처녀를 꼬드겨 집으로 들어갈 방법을 얻는다. 그리고 할머니를 빈 총으로 협박해 카드의 비밀을 알아내려 하는데 할머니가 놀라서 죽는다. 장례식 이후에 할머니가 헤르만 앞에 나타나서 리자와 결혼하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도박을 끊는다는 조건으로 카드의 비밀을 알려준다. 3, 7, 그리고 에이스. 헤르만은 이 비밀을 이용해 도박에 두 번 성공하고 세번째로 에이스에 올인한다. 예림이 그 패 봐봐하고 카드를 까보는 순간 퀸이네? 퀸이야? 사쿠라 대신 할머니를 똑닮은 스페이드의 퀸이 헤르만을 보며 웃고 있다. 그리고 헤르만은 미쳐서 정신병원행에 가는 엔딩. 손모가지는 안 날라갔으니 다행인가...


하지만 오페라는 조금 다르다. 차이콥스키의 동생인 모데스트와 표트르 본인이 직접 리브레토를 썼다.

헤르만이 리자라는 부잣집 여자에게 반한다. 리자는 돈 많고 잘 생긴 옐레츠키 공작과 약혼한 사이다. 그래도 헤르만은 리자를 열심히 스토킹해서 노오오력으로 사랑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헤르만은 돈이 없다. 톰스키가 리자의 할머니인 Countess가 카드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알려준다. 헤르만은 저 비밀만 알면 떼돈을 벌어서 리자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리자를 만나러 리자 집에 갔다가 우연히 할머니를 마주친 헤르만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할머니를 협박한다. 그리곤 원작과 비슷하다. 좀 더 극적인 구성을 위해 마지막 도박은 리자의 전 약혼남인 공작과 함께하며,  도박에서 진 뒤 그 자리에서 자살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헤르만과 리자의 관계다. 원작에서 헤르만은 처음부터 도박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리자는 카드의 비밀을 알기 위해 접근한 것 뿐이다. 오페라에서 순서는 반대다. 헤르만이 도박장에서 돈은 안 걸고 맨날 구경만 한다는 언급이 처음에 나오긴 하지만, 처음에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순전히 리자에 대한 불타는 사랑 때문이다. 헤르만은 리자의 사랑을 얻지만 결국 돈이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욕망, 그리고 우연치 않게 리자네 할머니와 마주할 기회를 얻으면서 마음 속으로만 상상한 협박을 실천하게 된다.

오페라에서 헤르만의 협박에 의해 할머니가 죽었다는 자백을 듣고 리자는 헤르만의 본심을 의심한다. 날 좋아해서가 아니라 카드의 비밀을 얻기 위해서 날 좋아하는 척 한 것이구나. 하지만 이미 리자는 헤르만을 너무 사랑하고 있다. 리자는 헤르만과 평범하게 살고 싶고 오해를 풀기 위해 헤르만을 밤중에 불러낸다. 하지만 할머니의 유령에게서 카드의 비밀을 듣게 된 헤르만은 이미 도박에 온 정신이 팔려 리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헤르만이 타락하는 과정은 푸쉬킨의 원작보다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푸쉬킨의 원작에서 헤르만이 처음부터 이미 파멸이 예견된 존재였다면, 오페라에서는 사랑에 빠진 순수한 청년이 사랑을 눈 앞에 두고 잘못된 욕망으로 모든 것을 잃는 이야기가 된다. 부클릿에선 이를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을 받은 인물 설정이라고 평하는데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설명이다.  

물론 이 와중에 푸쉬킨의 원작에 담긴 섬세한 장치가 부숴지는 단점도 있다. 생 제르망 백작이 왕년의 할머니에게 카드의 비밀을 알려준 것은 하룻 밤의 사랑을 얻기 위한 댓가였다. 헤르만은 반대로 카드의 비밀을 알기 위해 리자에게 사랑을 약속하는 셈이다. 차이콥스키 역시 이 점을 의식했던지 마지막에 약혼녀를 잃고 도박장에 나타난 옐리츠키 공작이 '사랑에서 불행한 자는 카드에서 행운이 생긴다지 않던가'라는 대사를 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한 장치가 할머니가 비밀을 알게 된 일화에서 '사랑에 빠진 세번째 남자가 너에게 카드의 비밀을 묻는다면 넌 파멸 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는다는 것이다. 자기 남편과 자기 애인에게 비밀을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헤르만이 세번째가 되는 것. 이 예언은 헤르만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사랑에 빠진 자신이 예언에 나오는 바로 카드의 비밀을 물을 세번째 남자라는 생각, 그리고 자신이 물으면 할머니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할머니에게 카드의 비밀을 묻는 것이 예언으로 정해진 일종의 정당한 권리라고 착각하게 만들며 동시에 할머니가 죽을 거라는 걸 이미 잘 알면서도 끝내 비밀을 캐묻는 헤르만이 얼마나 미쳐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음악은 오네긴에 비해 상당히 독특하다. 차이콥스키답게 곳곳에서 선율이 넘쳐나며 반주 선율이 성악 선율과 별개로 진행되거나 성악의 빈 부분을 아름답게 연결해주는 부분이 많다. 아리아에서 비교적 일정한 반주 패턴을 유지하면서도 단조롭지 않게 관현악 색채를 조금씩 바꿔가는 것 역시 일품이다. 

이런 차이콥스키의 전형적인 특징들 이외에도 아예 음악의 스타일이 달라지는 부분이 여럿 등장한다. 1막 2장에서 리자가 친구들과 함께 노는 장면에서는 아예 피아노 반주로만 노래를 부르며 2막의 무도회 장면에서는 배경이 되는 18세기를 그대로 고증하듯 모차르트 풍의 음악이 나온다. 영락없이 차이콥스키의 관현악으로 즐기는 모차르트 음악이며 중간에 나오는 노래는 파파게노의 아리아와 케루비노의 아리아를 섞어놓은 느낌이다. 1막 1장에서 옐레츠키 공작과 헤르만이 듀엣을 부르다가 리자와 카운테스, 톰스키가 끼어들며 5중창으로 확장되는 부분은 1890년에 초연된 작품에겐 기대하기 힘든 고전적인 장면이다. 3막 끝에 헤르만이 자살하고 나서 합창단이 아카펠라로 부르는 레퀴엠 역시 독특하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 단어는 단연 '세 카드'다. 이 단어 три карты가 나올 때마다 오케스트라는 세 음으로 구성된 모티프를 들려주며 헤르만을 이 개념에 미치게 만든다.


명작의 기준을 뺄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는 작품이라고 친다면 이 작품은 무결하다고 평하기엔 어렵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프랑스 오페라의 영향을 받아서 곳곳에 극의 진행과 별 상관 없는 노래들이 등장한다. 특히나 2막 1장에 등장하는 전원극은 음악적으로도 차이콥스키 본연의 것이라고 하긴 힘들고, 차이콥스키의 모차르트 모방이라고 봐야하기에 이게 작품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적이다. 베르디 오페라의 발레 장면은 음악이라도 베르디답지, 이건 차이콥스키 답지도 않다 . 2막 1장 끝에 차르 부인이 등장하는 부분의 합창 역시 당시 러시아의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 이외에 별 의미가 없는 장면이다. 그랑 오페라에서 발레 장면을 삭제하고 공연하는 것 처럼 이 부분을 삭제하고 공연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유튭에서 잠깐 보니 오자와 빈 슈타츠오퍼 실황에서도 이 장면을 다 삭제하고 주역들 파트만 남겨놨다. 


2막 1장 전원극의 모습. 차이콥스키의 모덕 간증의 순간


하지만 그런 단점을 조금 덮고 넘어가면 이 작품은 간지가 휘몰아치는 작품이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중 단막인 이올란타(욜란타)를 제외하고서는 가장 뒤에 작곡된 작품이니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풀 스케일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헤르만이 미쳐가는 과정을 완벽하게 음악으로 그려낸다. 결과에 해당하는 마지막 도박 장면은 오히려 조금 약하게 느껴질 만큼 그 과정이 세세하게 묘사돼있다. 오케스트라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몇가지 음악적 모티프를 극 전반에 녹여내며 격정의 러시아를 그려낸다.

이것이 1막 1장의 피날레다. 이미 사람 한명 죽였을 것 같은 음악 아닌가.



이 근사한 작품을 지휘자 미하엘 보더Michael Boder가 놀라울 만큼 세련되게 뽑아냈다. 현음 전문 지휘자인 줄 알았던 그가 이렇게나 차이콥을 잘해낼 지 상상도 못했다. 역시 몇몇 지휘자들이 현음을 주로 파는 이유는 현음 밖에 못해서가 아니라 잘난 사람만 현음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가설이 맞는 건가 싶다. 바로 위의 클립은 게르기에프의 지휘인데 게르기에프가 오케스트라를 하나로 묶어 요동치는 감정을 만들어낸다면 보더는 각각의 파트를 훌륭하게 제어하며 극의 상황에 맞는 소리를 뽑아낸다. 현악기의 밸런스나 아티큘레이션 처리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 긴장감을 유발해야하는 부분에서 현악기가 알맞게 꼬집어서 긁어주거나 술 폰티첼로 느낌이 나게 연주하여 상황에 꼭 맞는 소리를 들려준다. 여기에 가수와 적절히 호흡해가며 선율을 숨 쉬게 하는 솜씨도 탁월하다.


가수 중에는 단연 헤르만 역의 미샤 디디크Misha Didyk가 빛난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수로 자기 홈페이지에는 리릭 테너라고 써붙였지만 역할에 필요한 만큼의 폭발력을 내주는 가수다. 이 작품을 보면서 러시아 레퍼토리를 할 때 가수들의 러시아어 실력의 중요성은 단순히 딕션의 문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다. 문장의 운율이 확실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이 헤르만이 노래하는 파트는 어떤 부분이든 또렷하게 프레이징되어 들리는 반면 비슬라브 계통의 가수들의 노래는 너무 밋밋하게 들린다. 여기에 타락해가는 헤르만의 감정 표현도 아주 훌륭하다. 처음에 옐리츠키 공작을 만났을 때 진짜 연적을 만나서 분노하는 그 표정이나, 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표정, 그리고 도박에 미친 표정까지 모두 관객을 흡입할 만큼 집중력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처럼 오페라를 보면서 러시아 네이티브와 비네이티브를 꽤나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이들의 차이는 명확했다. 리자 역의 에밀리 마기Emily Magee와 옐리츠키 공작 역의 루도빅 테지에Ludovic Tézier의 경우 이미 어느 나라 출신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선입관이 작용할 수 있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중요한 아리아를 부르는 사람 중에 톰스키 역은 러시아 인이 아닐 것 같다에 500원 걸고 싶었다. 발음이 분명하지 않은 것도 있고 이 때문에 노래가 상당히 밋밋해진다. 다 보고 찾아보니 이 역을 맡은 라도 아타넬리Lado Ataneli의 출신은... 애매하게도 조지아였다. 음 조지아는 조지아어를 쓰고 조지아어는 슬라브 어족이 아닌 카르트벨리어족이라고 하니 내가 맞은 걸로 치자. 

반대로 아 저 사람은 진짜 러시아인 같다 싶은 사람은 리자의 친구 파울리네 역을 맡은 엘레나 자렘바Elena Zaremba였다. 찾아보니 역시 러시아 사람 맞다. 내가 이 사람이 러시아 사람 같다고 느낀게 단순히 딕션의 문제가 아니라 창법의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네트렙코나 디아나 알리에바가 주는 그 거칠고 끈적이는 느낌 말이다. 비브라토도 상당히 많이 쓰는데 그게 거슬리지 않고 노래와 착 달라붙는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러시아 성악 스타일이 서유럽과 상당히 다른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 하나 러시아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역할은 어쩌면 타이틀 롤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할머니 역할의 에바 포들레스Ewa Podleś다. 물론 이름을 먼저 봤다면 절대 러시아 사람이라고 생각 안 했겠지만 일부러 오페라 볼 때는 이름을 안 찾아봤다. 안타깝게도 러시아 인은 아니고 폴란드 사람이었다. 폴란드 어도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일단 같은 슬라브 어족이니 비긴 셈 칩시다. 

이 오페라에서 헤르만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것은 맞지만, 가장 캐스팅하기 까다로운 역할은 이 할머니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극 중에서 80세가 넘는 노인 답게 메조 아니면 콘트랄토가 맡는 역할이다. 목소리에서 연륜이 쩍쩍 묻어나오면서 인물의 미스테리한 포스를 풍길 수 있으면서 동시에 오페라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프랑스어 아리아도 불러야 한다. 여러모로 전설적인 메조나 콘트랄토의 연금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배역이라 할 수 있다.

에바 포들레스는 이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목소리 부터 소름끼칠 정도이며 가사를 자기 스타일대로 씹어내는 능력도 훌륭하다. 프랑스어 딕션도 기대했던 것보다 상당히 훌륭하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이 독특한 목소리 만큼은 발군이다. 가끔 목소리가 뒤집어지는? 느낌도 80이 넘은 할머니를 노래하는데는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한다.


캐스팅 중 가장 이름값 높은 에밀리 마기와 루도빅 테지에는 노래를 너무 선율적으로만 부르는 듯 해 아쉬웠다. 


벨기에 출신의 질베르 데플로Gilbert Deflo의 연출은 전통적이면서도 무대 벽을 이용해 필요한 순간에 독립된 느낌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조명이 헤르만의 표정을 잘 잡아주는 순간이 종종 나온다. 


이 작품의 유일한 블루레이 타이틀이지만 부클릿도 빈약하고 부가 영상도 없다는 점은 좀 아쉽다. 작년에 네덜란드 오페라에서 헤어하임 연출에 얀손스가 지휘한 스페이드 여왕이 유튜브에도 전막이 올라와 있는데 블루레이 정식 발매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 작품에는 이야기와 벗어나는 듯한 장면들이 상당히 자주 등장하며 음악 역시 수상한 부분이 참으로 많은데 이런 부분이야 말로 헤어하임과 같은 연출가에게 좋은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이 우리나라에서 대단히 인기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오페라가 이토록 인기 없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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