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음악 매거진이 뽑은 '가장 사치스럽고, 가장 논쟁적이며,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기억될 만한 오페라 프로덕션"



포다 예습할 생각으로 포다의 대표작이라는 타이스를 찾아봤다. 어디선가 저 위의 홍보문구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게 포다의 대표작인가 보다 싶었다.

떡밥을 던졌으니 다른 이야기부터 해보자. 타이스는 명상곡이라는 불후의 명곡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요부 타이스와 그를 숭배하는 수도사 아나타엘 만으로 줄거리가 설명 가능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타이스라는 창녀가 이름을 날리며 알렉산드리아의 퇴폐를 이끄니 아나타엘이 타이스를 교화시키겠다며 떠난다. 아타나엘의 말빨이 무슨 제갈량이라도 되는지 한창 잘나가는 창녀를 설득시켜 사막의 수도원으로 데리고 오는데 성공한다. 타이스는 수도원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데 타이스가 죽을 때가 되자 아타나엘은 그제서야 ㅆ선비 코스프레를 때려치고 타이스 없는 세상은 존재 가치가 없다며 울부짖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니까 타이스로 상징되는 사랑과 욕망, 아타나엘로 상징되는 종교와 신성이 줄다리기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타이스의 초연이 1894년이니 상당히 늦은 작품이다. 이보다 2년 뒤에 라보엠이 있고, 같은 프랑스 오페라인 카르멘 보다는 19년 뒤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오페라의 대표작인 카르멘, 진주조개잡이, 삼손과 달릴라, 라크메 등과 마찬가지로 이국적인 배경을 살려 독특한 음악을 선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마스네의 관현악은 확실히 시대의 흐름에 맞춰 관능적이며 신선하다. 1900년에 가까운 오페라 답게 극은 전반적으로 음악적인 대화를 통해 꾸준히 진행되며 몇가지 핵심적인 아리아들이 중심을 잡아주는 구성이다. 바리톤과 소프라노가 극의 중심을 맡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노세다의 능력은 오케스트라 반주가 '교향악'스러워질 수록 더 빛난다. 반대로 그가 모차르트를 제대로 지휘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선율을 분명하게 표현하면서 관현악의 색채를 충분히 잘 표현한다. 특히 알레산드리아에서 오리엔탈 느낌 물씬 나는 리드미컬한 음악들을 참 맛깔나게 잘 표현한다.

타이틀 롤을 맡은 바르바라 프리톨리Barbara Frittoli는 종종 본 가수인데 프랑스어 배역을 맡은 건 처음 들었다. 역시나 딕션이 별로다. 2막 아리아 부를 땐 그냥 불어 자막을 켜놓고 보는데도 발음이 안 들리더라. 그래도 이리나 룽구보다 훨씬 나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하나. 부드럽게 노래는 잘하는 편이지만 비브라토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예쁘게 부르는 편이라 알레산드리아를 제패한 팜므파탈적 패기는 거의 느낄 수 없다.

아타나엘 역의 라도 아타넬리Lado Ataneli는 불어가 좀 어색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항상 불어처럼 들리게 노래하더라. 그냥 목소리가 안정적이고 노래를 무난하게 하는 편이라 별 생각 없이 듣기 좋다. 

니시아스 역의 알레산드로 리베라토레Alessandro Liberatore는 염소 목소리 같은 비브라토가 좀 거슬린다.


이제 음악 이야기를 다했으니 연출을 맘 놓고 까야지.


다시 가져와보자.  "BBC 음악 매거진이 뽑은 '가장 사치스럽고, 가장 논쟁적이며,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기억될 만한 오페라 프로덕션"

제대로 낚였다. 

이 프로덕션을 보고 확신했다. 포다는 내가 가장 안 좋아하는 유형의 연출가다.

(검색하다보니 찾았는데 iMac님 블로그에도 2009년에 이 프로덕션이 언급돼있다.)


포다가 그려낸 인물은 생명력이 없다고 앞선 이도메네오 리뷰에서 언급했다. 이 연출에선 이 단점이 심각할 정도로 드러난다. 그냥 무대 위에 연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가수들이 자리에 서서 망부석 처럼 서서 노래한다. 포다가 가수들한테 꼼짝말고 있지 않으면 전차를 몰고가서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21세기 공연에서 이런 동선이 나올 수가 없다.

이 오페라 줄거리를 들으면 딱 연출 포인트가 보인다. 타이스가 아타나엘에게 설득돼서 따라가는 것을 얼마나 말이 되게 그려낼 것인가, 아타나엘이 마지막에 결국 타이스의 아름다움에 굴복하는 걸 어떻게 극 전반에 걸쳐 표현할 것인가이다. 오페라 연출은 원작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부자연스러움을 해결하거나 감추거나 관객이 무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한다.


하지만 아타나엘이 목석처럼 이야기를 하는 이 연출에서 타이스가 설득된다는 건 도대체가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아타나엘은 고매한 수도사니까 엄근진 하게 노래를 불러도 된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연출하면 마지막에 아타나엘이 타이스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정말 어색해진다. 결말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아니 그리고 애초에 창녀를 기어이 교화시키겠다는 수도사를 보면서 과연 저게 100% 순수한 의도라고 믿는 관객이 어딨겠냐만, 여튼 관객들은 아타나엘이 타이스를 설득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위험에 처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타이스는 아타나엘에게 흔들리고 아타나엘인 타이스에게 흔들린다. 이 연출에서 3막에서 아타나엘이 보이는 태세 전환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돈을 더럽게 많이 쓴 연출이지만 정작 아타나엘과 타이스의 가장 중요한 2막 듀엣에선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뒤에 나오는 명상곡에서 타이스가 일종의 종교적인 환상을 보게 만들긴 한다. 하지만 너무 상징주의적이다. 여기서 포다 스타일의 양날이 드러난다. 너무 추상적이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면 그냥 지나가기라도 하는데, 뭔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걸 막 집어넣어서 궁금하게 만드는데 해답은 안 주는 것이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나 싶었는데 바흐트랙에 있는 오텔로 리뷰도 지적 하더라. "but his staging, frustratingly, raises more questions than it answers." 또 다른 리뷰(파우스트)는 이렇게 지적한다. "However, overflowing symbolism sometimes made it too academic, and the visual effects were suggestive if not properly enchanting."(과도한 상징주의로 인해 종종 연출이 너무 탁상공론처럼 느껴졌고 시각적 효과는 매혹적이라기 보단 도발적이었다)

차라리 나라면 타이스가 '거울 아리아'에서 자신의 미모가 영원하길 갈망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이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결국 시간의 흐름 뒤에 남는 것은 신의 사랑밖에 없다는 걸 보여줬을 것 같다. 뭐 너무 직설적일 수 있지만 늙은 타이스 대역이 지나가는 장면을 바라본다거나,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의 경건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본다거나 말이다. 하지만 포다가 보여주는 환상에는 천장에 거꾸로 메달린 인간들이라든가, 임신한 여자라든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이 혼재한다.

쓰다보니 괜히 내가 이해 못 하니까 연출가를 욕하는 것 같은데, 난 이 사람이 확고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다. 헤어하임의 연출을 보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엄청나게 많지만 구체적인 연기를 통해 논리를 구축하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연기가 없는 인물은 공감할 수가 없다. 공감할 수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내가 저 상징들을 이해해야 하냔 말이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상징이 과연 내가 노력한다고 이해할 수 있긴 한 것인가? 

이런 류의 연출이 포다와 피치 말고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피에르 오디다. 피에르 오디가 연출한 네덜란드 반지를 보면 뭔가 이상한 상징적 시각 요소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정작 연기는 제대로 된 게 없어서 극 전체가 노잼이 된다. 오디나 피치나 몬테베르디나 글루크 처럼 인물의 감정선이 확실한 그리스 신화 기반의 오페라에서는 생각보다 대박을 친다. 하지만 이 처럼 감정의 줄다리기를 표현해야하는 작품에선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다.


한 가지 좋았던 장면은 타이스가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오는 오케스트라 간주곡 장면이다. 무용수들이 구슬을 잡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지만 결국 시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음악과도 잘 어울린다. 


사치스럽긴 정말 사치스럽다. 1막에 알렉산드리아의 퇴폐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무대가 올라가며 알렉산드리아를 보여준다. 근데 이거 딱 이 장면 하나에만 이렇게 쓰인다.



보고나서 도대체 BBC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걸 대단하다고 말했는지 너무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이렇다. 애초에 프로덕션을 하나 딱 꼽은 게 아니라 20개를 꼽은 것 중 하나 들어있는 것이고 논쟁적이고 폭력적이고 기억될 만하다는 수사는 그냥 20개 전체를 수식하는 표현이다. 무엇보다 저 리스트에서 르파주 메트 반지와 나란히 있다는 점에서 피식했다. 저 둘은 그냥 20개 중에서 "가장 사치스러운"을 담당하고 있는 프로덕션이지 뭐.


하하하하하하 공연 보기 전에 이번 국립오페라단 보리스 고두노프 연출이 망삘일 것 같은 이유를 줄줄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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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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