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페기다의 고장입니까.



독일 도착 후 쉴틈 없는 여정이 계속됐다. 첫날은 공항에 도착한지 1시간 반만에 공연을 보았고 그 뒤로 3일 간은 8개의 공연을 봤다. 평소에도 종종 유럽 시간대로 활동하는 지라 시차 적응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공연장에서 졸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 전날을 기점으로 하루에 공연을 여러개 보는 강행군은 끝났다. 앞으론 저녁에 공연 한 개만 보면 되는 널널한 일정인 셈이다. 하노버에서 오페라를 가며 ‘오늘까지만 버티면 된다’라고 스스로를 재촉했다.


하지만 공연을 한 개밖에 보지 않는다고 해도 기차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날 하노버에서 드레스덴을 움직이는 여정은 일정 중에서도 가장 긴 편이었다. 기차에 올라 타니 나의 동선이 얼마나 골치 아픈지 확연하게 보였다. 기차는 하노버를 떠나 브라운슈바이크와 라이프치히를 거쳐 드레스덴으로 갔다. 브라운슈바이크는 그 다음날 갈 도시였고 라이프치히는 이틀전에 간 도시이고 드레스덴이 지금가는 도시이니, 실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여정이었다.


원래 4시간이 걸리기로 예정된 기차였다. 어느 순간 연착이 되기 시작하더니 다른 기차를 제 시간에 보내기 위해 우리 기차는 점점 더 늦어졌다. 어차피 늦은 놈이 더 늦기로 하자 이건가. 드레스덴에는 예정된 시간보다 40분이 넘게 도착했다. 이런 건 우리 KTX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다행히 공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별지장이 없었다. 공연을 보러가야하는데 늦는 거였다면 승무원한테 되지도 않는 항의 한번 하고 가는 내내 불안증세를 보였을 테다.


드레스덴은 둘러볼 만한 장소가 많은 도시다. 마침 일정도 여유로워졌으니 이제 드디어 관광이라는 걸 좀 해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기차도 연착되고 호텔을 체크인하는데 헷갈려서 한참을 빙빙 돌았다. 방에 들어왔을 땐 오후 4시였는데 공연은 7시였다. 무엇보다 기차를 5시간 가까이 타다 방에 들어오니 너무 눕고 싶더라. 관광 그 까짓거. 오페라 보다가 졸지도 모른데 관광이 다 무슨 소용이냐.



그래도 후배와 5시에 젬퍼오퍼 앞에서 만나기로 해서 오래 누워있지도 못했다. 라이프치히에서 만난 그 후배다. 드레스덴은 생각보다 커서 중앙역과 오페라 극장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다. 나에게 한 도시의 크기란 중앙역에서 오페라 극장까지의 거리다.



오페라 극장이 폼 나려면 주위가 비어있야 한다. 유럽 극장을 돌아다니며 느낀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예를들어 함부르크는 주위 건물들과 똑같아서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하는데 반해 하노버 극장은 주위가 텅텅 비어있고 옛날 양식의 건물이라 눈에 띈다. 


오페라 극장이 가질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 극장의 권력이라면, 젬퍼오퍼는 이 점에서 최고였다. 이날 드레스덴은 구름 한 점 없었는데, 젬퍼오퍼 앞의 광장은 참으로 광활해보였다. 눈에 들어오는 건 오로지 젬퍼 오퍼 뿐이다. 반이슬람인 페기다의 시위가 항상 젬퍼오퍼 앞에서 열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극장에서는 대부분 당일에 학생 티켓을 구하기로 했지만 하필 이 드레스덴 미망인은 몇달 전부터 표가 몇개 남아있지 않아 5층 티켓을 미리 예매했다. 표도 있겠다 시간이 남았으니 오퍼 주변의 드레스덴 구도심을 둘러보았다. 후배는 드레스덴에 이틀 더 일찍 왔던 지라 자기가 투어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설명해줬다. 드레스덴 공습으로 무너졌던 건물이 많지만 모두 다시 재건했다. 공연 장소로도 유명한 성모교회 역시 재건된지 얼마 안된 곳이었다. 

성모교회 외부와 내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다시 젬퍼오퍼로 왔다. 오퍼에 왔으니 인증샷 하나는 찍어야 하지 않겠나. 후배와 둘이 젬퍼오퍼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으려고 할 때였다.



바로 뒤에서 한 사람이 입술로 조롱하는 소리를 내고 지나갔다.  어이가 없어 한국어로 욕이 나왔는데 그 거구의 백인 남성은 자기 여자친구를 껴안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유있게 지나갔다. 해외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 사례를 읽을 때마다 분노가 생기고 저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생각했지만 실제로 경험하니 그저 어이가 없어 아무런 대응도 할 수가 없었다. 


여태 유럽을 돌아다니며 이런 모욕적인 조롱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내 동선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못 배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돌아다니는 곳이 대부분 오페라 극장이나 박물관이다보니 그곳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오히려 어린 아시아인이 오페라 보는 게 신기한 건지 대견한 건지 항상 친절하게 대해줬다. 바이로이트 1주일 동안 하루내내 나를 데리고 다니며 챙겨준 바이로이트 아저씨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젬퍼오퍼에 오페라 보러갔다가 페기다 시위대한테 맞아죽으면 오페라 순교로 인정받을 수 있는거냐, 그래도 신들의황혼 보러가다 죽는 거면 모를까 미망인 보러가다가 죽으면 너무 불쌍하지 않냐 라는 개드립을 치고 있었는데, 현실은 훨씬 더 기분 나쁜 방식으로 이뤄졌다.

나와 후배는 둘다 기분이 뭣 같아져서 말이 없어졌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괜히 더 이야기 꺼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둘다 머리 속에 방금 그 조롱 소리밖에 남이있지 않았다.


표를 찾아 젬퍼오퍼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서 검표하는 젊은 어셔를 보면서, 저 사람도 나를 마음 속으로 조롱하고 있을까 싶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 개자식에게 영어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줬으면 속이 좀 풀렸을까 싶었다.






젬퍼오퍼의 내부는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아름답지 않았다. 이게 그 콧대높은 작센인들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이런 거 지어놓고 작센뽕에 취해서 이슬람 동양인 꺼져 할 걸 떠올리니 심사가 꼬여서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친구가 젬퍼오퍼에서 공연 보는데 옆에 아저씨가 ‘너희 나라엔 이렇게 큰 콘서트홀 있냐?’라고 물어봤다는 게 기억났다. 아재 우리나라에 삐까뻔쩍한 건물 사이에 껴있는 3000석 넘는 공연장 있거든요?? 깝ㄴㄴ


무대 위의 시계가 5분마다 돌아간다.

젬퍼오퍼 내부 천장화

젬퍼오퍼의 황홀함과 작센에 대한 혐오로 마음이 복잡할 때, 옆에 앉은 할머니가 나에게 독일어로 말을 걸었다. 이 오페라 극장 참 아름답지 않냐고. 나도 참 아름답다고 대답하니 젬퍼오퍼의 역사를 설명해줬다. 오래전에 지어졌다가 전쟁으로 무너지고 다시 재건했다는 이야기, 예전엔 오페라 뿐만 아니라 연극도 공연했기 때문에 천장에 셰익스피어 쉴러 등의 그림이 있지만 요즘엔 오페라만 공연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무대 위에 있는 시계가 5분마다 바뀐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신기하게 독어로 설명하는데 절반 이상을 알아들었다. 내가 잘 알아듣는 걸 보고 내게 독어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주셨다.


친절한 할머니의 설명이 끝나니 작센에 대한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불쾌한 기억이 사라질 순 없었다.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의 연주도 곱게만 들리지 않았다. 레하르의 음악은 참 걱정 없고 아름다운데, 그것마저 맘에 안 들었다. 레하르는 헝가리 인이라고 빈에서 차별 안 받았으려나? 


이 드레스덴 프로덕션은 DVD로도 발매되었는데 조국에 대한 충성을 조롱하는 내용이 많다. 배경은 2차대전 중 독일군에 점령된 파리로 보인다. 연출을 보니 자꾸 다시 생각났다. 극장에서 아무리 나치 까면서 과거를 반성하는 척 하면 뭐하나. 극장 바깥에 나치들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연출마저 독일인들의 가식으로 보였다. 로비에서는 다음주에 새로 올리는 바인베르크의 <승객>에 관한 전시가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반성도 양심의 가책을 덜고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건 자체도 화가 났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오페라 관람까지 망가지고 있다는 게 나를 더 괴롭게했다. 젬퍼오퍼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페라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날의 관람은 내 스스로와의 다툼이었다. 


이날 저녁에 날 상념에서 빼낸 것은 상투적이게도 지휘자가 보여 준 열정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지휘자. 젬퍼오퍼에서 객원 지휘를 맡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기회이지만, 정작 주어진 것은 그저 단순한 유흥 프로그램에 불과한 <미망인>. 현악기의 인원도 평소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지휘자는 자신의 온 정신을 집중하여 <미망인>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었다. 저 사람이 어떤 사상의 소유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순간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을 거라는 건 확실해보였다.


가수들은 무난하게 잘 해줬고, 3막의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끝도 없이 소리지르며 활기를 내뿜었다. 중간중간 나오는 현악기 반다의 연주 역시 탁월했고 적은 인원이었지만 반주 역시 SkD의 실력을 엿볼 수 있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Lippen schweigen에서는 감상에 젖었다. 음악은 죄가 없다. 젬퍼오퍼도 아마 죄가 없을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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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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