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에서 드레스덴으로 올 때 지나쳤던 브라운슈바이크로 향했다. 하노버와 함께 니더작센을 대표하는 도시다. 일단 드레스덴을 떠나게 돼서 마음이 가벼웠다.
공연을 같이 봤던 후배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도시를 이동하는 날이었다. 후배에게 내가 짠 일정을 통보하고 올 테면 오라고 했기 때문에 동선이 겹치는 날이 많지는 않았다. 브라운슈바이크는 호텔 값이 비싸서 내가 돈을 좀 더 내는 조건으로 후배와 같이 방을 쓰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꺼낼 때는 몰랐는데 하필 이 다음날이 바로 이 놈의 생일이었다. 멀리 타지에서 혼자 돌아다니는데 나라도 챙겨줘야하지 않겠나.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는데 역시 값이 좀 나가서 그런지 시설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좋았다. 브라운슈바이크 시내 교통권을 준 것도 신기했다.
둘다 땡볕에서 고생하다가 시원한 호텔 방에 들어오니 침대에서 벗어나기가 싫어졌다. 한참 뒹굴거리다가 느지막하게서야 브라운슈바이크 시내로 버스를 탔다.
브라운슈바이크가 니더작센의 제2도시라고 후배에게 설명해주니 니더작센이라는 이름부터 2인자의 느낌이 나는데 그 안에서도 2인자냐면서, 콩라인이라고 무시했다. 막상 시내를 좀 돌아다녀보니 하루 밖에 안 머무르는 곳인데 좀 일찍 와서 둘러볼 걸 하고 후회하더라.
적당히 근처에 있는 교회를 둘러보고 나왔다. 어차피 관광에는 흥미와 미련을 잃은 지 오래다. 구글 지도에는 여기저기 찍어놓은 곳이 많았지만, 막상 돌아다녀보니 그저 좋은 컨디션으로 오페라만 잘 보면 그만이었다.
공연은 7시 30분 부터 시작이었는데 조금 여유있게 갔다. 브라운슈바이크에도 당일 학생 티켓이 있지만 어차피 인터넷 예매 기간에도 50% 할인을 해주는데다 제일 비싼 자리도 46유로 밖에 하지 않아 그냥 23유로 할인 가격으로 1열을 예매해뒀다.
브라운슈바이크 극장 역시 눈에 잘 띄게 좌우로 여유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아담한 사이즈의 극장으로 별다른 장식이 없이 필요한 것만 있는 느낌이다. 1690년 부터 극장이 있었다니 상당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번에 돌아다니는 극장 중 퀴빌리에 다음으로 작은 극장인 듯 하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피트는 충분히 컸고 음향 역시 훌륭했다.
무대 커튼이 멋지다. 이 각도가 잘찍으면 예쁘게 잘 나오는 듯...
인터미션 중 2층 발코니.
객석에 비해 피트는 상당히 크다.
정말 작다.
가장 모르는 작품이라 예습을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예습하기 가장 까다로운 작품이었다. 이탈리안 - 영어 리브레토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니 대충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공연 전에 로비를 방황하고 있으니 어셔 분이 Einführung 찾고 있냐며, 저 쪽으로 가면 된다고 알려줬다. 일단 태연하게 아는 척 하고 뒤 돌아서서 핸드폰 사전으로 Einführung이 뭔지 찾아봤다. Introduction이란 뜻이었다.
어차피 독어로 할 것이 뻔했지만 뭐라도 좀 건져보려고 설명을 들으러갔다. 대충 작품의 리브레토 담당을 비롯한 창작 과정, 줄거리, 음악적 특징, 연출의 특징들을 설명해줬다. 리코르디의 의뢰로 시작했지만 리브레티스트가 작업이 너무 늦어 한번 교체했다던가. 2막 테발도의 아리아가 푸치니 투란도트와 닮았다는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이 작품이 투란도트보다 먼저 공연됐다는 이야기도 했다.
극장 내부가 은근히 더워서 바에서 음료수를 사마셨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이 빼어난 것 한 가지는 자판기가 아주 많이 있다는 점이며, 아쉬운 점은 그 만큼 바의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다. 브라운슈바이크 극장에는 야외 발코니가 있어 상쾌한 바람을 쐬며 음료를 마실 수 있다.
독일 내에서도 거의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니 연출이 조금 얌전한 편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어차피 내용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니 꽤 과감한 해석을 하기로 한 것 같았다.
막이 올라가자 무대에는 뿌연 연기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어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였다. 연기가 객석으로 조금씩 빠져나오고서야 무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무대는 마치 1차 대전 중의 전선을 보는 것 같았다. 의상과 무대의 디테일이 매우 돋 보였다. 몬테키와 카풀레티의 대립은 두 적국 간의 전투로 표현됐다. 로메오는 둘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데, 이 연출에선 파일럿 고글을 쓰고 나왔다.
여기 까지는 그저 시간 배경을 옮긴 정도라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했다. 원래 둘의 싸움이 끝나야 하지만, 군인이 된 몬테키와 카풀레티는 로메오의 제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게 발포하며 가운데에서 싸움을 말리던 로메오 역시 총에 난사 당한다. 전장에서도 총알이 알아서 피해가는 주인공 보정 따위는 없었다.
로메오가 쓰러지고 각각의 군사들이 모두 후퇴하고 나서, 군의관 복장을 한 줄리에타가 나타나서 쓰러진 로메오를 발견해 데려간다. 그리고 기품있는 붉은 복장을 입은 사내가 나타나서 무대에 놓여있는 시계를 뒤로 돌린다. 이 사람이 바로 원작의 야경꾼이다.
다시 무대가 회전하고 등장하는 로메오와 줄리에타는 아까와 다른 복장을 하고 있다. 줄리에타는 보라빛의 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둘은 사랑의 듀엣을 부른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가? 한국의 정규교육과정을 충실히 밟은 관객이라면 저 보라색이 죽음을 나타낸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테다.
2막은 전장의 응급 병동이다. 줄리에타를 비롯한 여성 합창단은 모두 간호사 복장을 입고 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살피며 줄리에타가 ‘삶이란 무엇일까’라고 기쁘게 노래하는 것은 꽤나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다.
테발도와 이야기 하기 전 줄리에타는 어느 새 다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로메오와의 사랑에 꿈이 부풀어 아마도 로메오가 처음 타고왔던 것으로 추정되는 추락한 전투기에서 노래하였다. 꿈과 사랑의 힘으로 추락한 전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것 역시 아리아의 낭만성을 잘 잘려낸 순간이었다.
테발도와 로메오의 싸움에서, 줄리에타는 위험에 빠진 로메오를 구하기 위해 뒤에서 유리 조각으로 테발도의 목을 찌른다. 테발도는 막사로 뛰어가고 로메오와 줄리에타도 쫓아간다. 자신과 줄리에타가 테발도를 죽였다는 사실에 로메오는 정신이 나간다.
3막은 원래 축제 장면이다. 도망쳐 온 로메오는 이 축제의 발라드 가수의 노래를 통해 줄리에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번 공연에서 이 장면은 마치 헤어하임의 환상을 보듯이 다채로운 고어 분장을 한 엑스트라들이 무대를 가득 메웠다. 피에로 분장을 한 발라드 가수의 노래를 듣고 로메오가 오열하면 모두 퇴장하고, 발라드 가수는 1막의 몬테키오 군의 복장을 입고 다시 등장한다.
로메오와 줄리에타의 재회와 듀엣이 이어진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이었는지 이 순간까지 분명하지 않지만, 노래가 끝나고 분명하게 밝혀진다. 무대 위에서 병동을 나타내는 무대 벽이 내려오고 로메오는 침대위에 눕혀진다. 군의관 복장을 한 줄리에타가 등장해 로메오의 맥박을 재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무덤덤하게 체크한다. 로메오의 눈을 감기고 돌아설 때 의사가 등장한다. 바로 테발도다. 줄리에타가 환자가 죽었다는 눈짓을 하니 테발도는 줄리에타를 껴안고 퇴장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4대 비극에 못 끼는 이유가 사랑하다 죽은 건 비극이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이 있다. 그런 점에서 전쟁에서 죽어가는 순간에 간호사에게 사랑을 느끼고 혼자 온갖 환상을 보고 간호사의 애인인 의사를 살해하는 상상까지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꿈도 희망도 없는 비극이다.
영상에 나온 로메오와 달리 내가 본 공연의 로메오는 <인생은 아름다워> 귀도 닮은 머리벗겨진 사람이었다. 머머리 까서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로메오인데 가발이라도 좀... 무슨 생각인지 트레일러에 마지막 반전까지 다 들어가있다.
요즘 오페라 연출에서 “아 슈ㅣ발 쿰”이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급의 만능 장치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해석이 유행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오페라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꿈과 광기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다.
때문에 이 해석에 대해서는 딱히 참신하다거나 무리수다라거나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상당한 반전으로 소름 끼치게 하는 엔딩이긴 했지만 대단한 해석이라고 추켜세울 것은 없어보인다. 하지만 이 프로덕션의 매력은 무대와 의상의 디테일에 있었다. 첫 장면은 정말로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싸움 말리던 로메오가 총 맞아 죽는다는 것도 원작에 비해 더 사실적이다. 줄리에타와 로메오의 듀엣도 무대의 장치들을 활용해 사랑스런 연인의 애정행각을 다양하게 보여줬다. 어느 한 순간 무대가 죽어있지 않고 계속 살아 움직였다. 회전무대와 의상의 디테일도 뛰어나 돈 많이 쓴 뮤지컬 무대가 부럽지 않았다.
음악 역시 음반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아쉽게도 지휘자가 바뀌었다. 이름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혹시 에어푸르트에서 같은 작품을 지휘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맞았다. 아무리 독일이라고 해도 이런 희귀작을 대타로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긴 쉽지 않았을 테다. 에어푸르트와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같은 시즌 비슷한 시기에 이 잔도나이의 작품을 올려 독일 내에서도 언론의 집중을 받아 두 공연을 비교하는 리뷰도 있었다. 그 리뷰에 따르면 브라운슈바이크의 지휘자가 더 뛰어났다고 했기에 아쉬움이 좀 남았다.
하지만 대타 지휘자임에도 오케스트라 - 지휘자 - 가수의 합이 뛰어났다. 열악한 녹음에서는 듣지 못했던 잔도나이의 독특한 관현악법도 잘 드러났다. 콘트라베이스 트롬본이나 3막의 테오르보 같은 악기를 직접 보는 것 역시 즐거웠다. 기대했던 3막 간주곡 카발카타는 합창단의 에너지가 약한 편이었지만 오케스트라는 마치 이 작품의 끝이라도 되는 냥 온 힘을 쏟아부었다. 특히나 음반에서 듣기 힘들었던 강력한 저음과 타악기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구멍은 가수진에 있었다. 1막에 잠깐 나오는 테발도의 부하는 정신이 번쩍 드는 노래를 선보였지만 정작 타이틀 롤인 로메오는 언제나 오케스트라에 묻혔다. 줄리에타는 젊은 가수라 걱정했지만 성량은 크지 않아도 목소리가 독특해 오케스트라를 뚫고 객석까지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다. 1막의 몬테키오와 3막의 발라드 가수 역에는 한국인 테너 ‘미하엘 하’가 출연했다.
로메오 역 가수는 목소리도 너무 부드러워 1막 등장부터 실망했다. 가장 유명한 3막의 아리아 Giulietta son io 역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 가수의 재능은 다른 데 있었으니, 바로 마지막 엔딩의 연기였다. 노래가 다 끝나고 죽어서 쓰러진 로메오는 마치 부두술사나 인형술사가 조종이라도 하듯 서서히 일어난다. 이 순간 로메오는 풀린 눈에 축 쳐진 팔 다리를 하면서 마치 누군가 관절에 걸린 실을 끌어올리는 냥 조금씩 일어났는데, 거의 팝핀 댄스의 동작을 보는 것 같았다. 연기 전공한 사람에게도 힘들 것 같은 동작을 소름끼칠 정도로 잘 소화해냈다. 원래 연기를 하다가 가수로 전향한 게 아닐까. 아니면 자신의 부족한 노래 실력을 보완하기 위해 피 나는 노력으로 연기 실력을 갈고 닦았다든지…
커튼콜 할 때 극장 관계자가 나와서 두 명의 가수에게 (아마도) 근속 기념 화환을 전달했다. 1막의 단역을 맡았던 베이스 가수와 미하엘 하씨가 꽃을 받았다. 몽골 출신인 듯한 그 베이스 가수는 극장에서 인기가 엄청난지 환호성이 대단했다. 구르네만츠 같은 바그너 역할을 맡았다던데 그 목소리 질감과 성량이라면 분명 대단한 구르네만츠였을 테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데 이번이 시즌 마지막 공연이라 로비에 이번 시즌 모든 공연의 프로그램 북을 무료로 가져갈 수 있게 해놨다. 일종의 재고 처리인 셈이다. 옆에는 극장 오케스트라가 녹음한 CD들도 있었는데, 다들 한참 털어가고 난 뒤였다. 사실 극장에 엄청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도 저 CD 모음을 봤었다. 하지만 무료로 가져가도 되는 건지도 몰랐고 처음에 꺼내든 CD가 무슨 아이들을 위한 클래식 녹음인 것 같아서 제꼈다. 나중에 보니 정상적인 녹음들도 굉장히 많았더라. 10개 넘게 챙겨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거의 챙기지 못해 좀 아쉬웠다.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데 브라운슈바이크 극장 티켓이 있으면 버스도 무료다.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면 오페라 공연이 아예 무료라고 한다.
뭐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하노버 정도는 안 바라니까 브라운슈바이크 정도의 극장 하나만 우리나라에 있으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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