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스루에의 바그너 DNA
2막 커튼콜.
3막 커튼콜
슈투트가르트에서 칼스루에로 넘어왔다. 지금까지 하루 동안 움직이는 일정 중 가장 붙어있는 두 도시였다. 칼스루헤, 카를스루헤, 카를스루에 등 표기법이 다양한 것 같지만 일단 내게 제일 익숙한 칼스루에라는 이름으로 쓰겠다.
칼스루에라는 이름은 두 가지로 익숙하다. 하나는 대구 오페라 축제에서 홀랜더와 탄호이저를 공연한 것이다. 아마 마술피리도 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건 보러가지 않아서 모르겠다. 당시 지휘자와 솔리스트, 몇명의 합창단, 그리고 무대 프로덕션 일체가 대구에 왔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내가 어쩌면 교환학생을 가게됐을지도 모르는 도시라는 점이다. 나는 친구랑 독일에 교환학생을 같이 가기로 했는데, 친구는 내 학점이 좋지 않으니 뮌헨이나 베를린 처럼 인기있는 곳이 아니라 안전하게 칼스루에 같은 곳을 써도 좋다고 했다. 칼스루에 거주민이나 대학생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난 칼스루에가 진짜 듣보 시골 동네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동아리 활동을 더 하게되는 바람에 교환학생은 물건너 가버렸고 친구는 나에게 욕을 한바가지 하며 뮌헨으로 갔다. 그렇기에 한번도 오지 않았지만 괜히 익숙한 동네였다.
칼스루에 지크프리트냐 마르콘 지휘의 바젤 알치나냐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칼스루에로 정했다. 마르콘 헨델 오페라 그거 진짜 노잼 반주 아닌가요?? 그 누구 블로그에 마르콘 극찬해놨던데 막귀인듯요 ㅉㅉ
칼스루에로 정한 이유에는 이 극장에서 한 다른 바그너 공연 클립들이 상당히 괜찮았고 지휘자 저스틴 브라운Justin Brown이 바그너에 열정적인 지휘자라는 이유에서였다. Opera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도 칼스루에 오케스트라는 태생부터 바그너에 대한 특별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필했다. 이 오페라 극장의 초대 음악 감독이 바로 명가수, 파르지팔 등을 초연한 1세대 바그네리안 헤르만 레비다. 때문에 현재 슈타츠테아터 건물이 있는 위치의 이름도 헤르만 레비 광장이다.
지크프리트를 실연으로 보는 건 2014년 바이로이트 이후 3년 만이다. 라인골트와 발퀴레는 서울시향의 콘체르탄테로 본 적이 있지만, 알다시피 박현정 사태 이후 서울시향의 링 사이클은 물건너 가게 됐다. 이 공연을 보면 일종의 나만의 반지 사이클을 이어가는 셈이다.
공연은 오후 4시부터 시작했다. 칼스루에 극장 역시 당일 학생 티켓이 있지만 인터넷 예매에도 50% 할인이 적용되길래 그냥 예매했다. 실제로 극장에 가보니 예매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객석이 가득 찼다.
극장은 독일에서 보기 쉽지 않은 형태의 건물이다. 프랑크푸르트나 함부르크 처럼 얌전히 생기지 않고 상당히 개성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난 이 극장이 상당히 최근에 지어진 줄 알고, 극장 안에서 홍보하던 Neue Staatstheater도 당연히 지금 현재 극장을 설명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찾아보니 이 건물은 1975년부터 있었다고 한다. 1975년에 이런 디자인이라니! 그 말을 듣고 나니 개성적인 형태에 비해서 낡게 느껴지는 외관의 색감이 이해가 됐다. 현재 리모델링 설계가 진행중인데 1500억 가량을 투자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하하하하하ㅏ 너무 부럽ㄷㄹ ㅇㅁㄴㄹ 머전은 콘서트 전용홀 하나 없는데…
저스틴 브라운이 자신의 Opera 잡지 인터뷰에서 “아 솔직히 우리 극장 디자인 구린 건 인정하자”라는 말을 했었는데, 살짝 이해가 되면서도 좀 얄미웠다. 건물이 오래돼서 외관 타일이 낡아 칙칙한 느낌이 글긴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한국 어떤 학교의 목욕탕 타일보단 훨씬 나은데! 거기다 건물의 로비도 넓어서 쾌적하다. 독일 극장들이 대체로 로비가 비좁고 고층으로 갈 수록 불편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칼스루에 극장은 그점에서 매우 훌륭하다.
오후 4시에 시작해서 9시가 넘어서 끝나기 때문에 인터미션마다 먹을 걸 챙겨먹어야 한다. 독일 극장들은 인터미션에 마실 음료나 먹을 음식을 미리 예약해놓는데, 로비의 테이블마다 번호가 적혀있어 그곳에 미리 세팅해준다. 나도 예약해보고싶었지만 혼자서 테이블을 잡을 수 있나 걱정되기도 하고 메뉴 이름도 몰라서 포기했다. 인터미션에 나왔을 때 이것저것 팔던데 비싸서 양이 많을 것 같다는 이유로 Käsebrot를 시켰다. 치즈에 빵이라니 뭐 이상한 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진짜 얇고 넓게 자른 빵에 슬라이스 치즈만 가득가득가득 올린 거더라. 치즈냄새를 참아가며 배를 채웠다. 대신 1유로에 프레츨을 파는데 꿀맛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저런 거 있으면 사람들 엄청 사먹을 텐데..
이날 바젤에 가서 알치나를 볼지, 칼스루에에서 지크프리트를 볼지 한참 고민했기 때문에 이 공연에 대해 사전 조사를 많이했었다. 지휘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영국 출신인 저스틴 브라운으로 이 극장의 게엠데를 맡은지 몇년이 됐다. 매시즌 의욕적으로 바그너를 올리며 공연 때마다 호평을 받고 있는 나름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다. 이번 링 사이클은 네 작품을 각기 다른 연출가에게 맡겼고 지크프리트는 이번 6월에 프리미어였고 내가 본 공연이 두번째 공연이었다. 지크프리트 연출을 맡은 아르나르손Thorleifur Örn Arnarsson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이슬란드 출신 연출가다. 아이슬란드인이라니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것 같다는 기대도 있었다. (해보진 않았지만) EVE 온라인을 만들어낸 상상력의 나라이며 신화의 국가 아닌가.
캐스팅 중에서는 지크프리트가 가장 걱정됐다. 사실 누가 부르던 걱정할 수밖에 없는 역할이지만 지크프리트를 한 번도 안 불러본 가수라면 어쩌겠는가. 에릭 펜튼Erik Fenton이라는 미국 테너인데, 기획사 홈페이지에 당당하게 리릭 테너라고 소개돼있다. 최근에는 카우프만이나 포그트 같은 스타 테너의 커버 역을 많이 맡았다고 한다. 예전엔 타미노나 알프레도 같은 역할을 많이 맡았다가 최근 들어서는 <운명의 힘> 돈 알바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바쿠스 같이 무거운 역할을 맡는 듯 하다.
보탄 역의 레나투스 메사르Renatus Mészár는 바이마르 반지 영상에서 보았던 가수다. 뭐 보탄 오래 해봤으니까 어련히 잘하겠지. 브륀힐데 역의 하이디 멜튼Heidi Melton은 작년에 바이로이트에서 지클린데로 캐스팅 된 가수이니 지방 극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가수일 테다.
극장은 생각보다 좌우 폭이 넓었다. 객석 형태만 보면 일반 콘서트홀 같다. 오케스트라 피트는 바그너를 연주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고 3막에 등장하는 하프 2대는 프로시니엄 앞쪽 왼편에 따로 두었다.
드디어 지크프리트가 시작했다. 불길한 전주곡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마르콘의 헨델을 포기했던 내 선택에 후회가 사라졌다.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한다고 바그네리안은 바그너를 들어야한다. 딱히 내 스스로를 바그네리안이라고 분류할 생각은 없었지만 (심지어 친한 분에게 “바그너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가려고 하냐”라는 말도 들었다) 음악을 듣는 순간부터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저스틴 브라운의 지휘는 예상했던 것 만큼 독특하거나 톡톡 튀는 스타일이 아니라 상당히 진중한 정통 바그너 지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유튜브로 들었을 때 거칠게 느껴졌던 바디셰 슈타츠카펠레의 소리 역시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서는 고급스러웠다. 현악기의 질감, 특히 바그너의 향취가 듬뿍 묻어있는 패시지를 바그너답게 연주하는 프레이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느낌이 특히나 훌륭했다. 호른은 왼쪽 끝에, 다른 금관은 오른쪽에 두어서 둘이 무대 폭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가끔 엇나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한 호흡을 보여줬다.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공격적인 사운드로 바그너 사운드의 방점을 찍어줬다. 목관의 음색과 표현력도 탁월했다. 서울시향 쯤이면 유럽 지방 오케스트라에 비벼볼 수 있을까 싶지만 현실은 한참 멀다. 한 단원이 오랫동안 근속하게 되는 오케스트라의 경우 오랜 전통이 후대에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악장 한명이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바꿔놓을 수 있는 것처럼, 위대한 바그너 지휘자들과 함께한 단원들의 능력은 세대교체가 이뤄지더라도 좀처럼 희석되지 않고 전승된다. 한 번의 공연만 같이해도 주위 사람들의 습관과 스타일을 따라가게 되는 오케스트라에서 매 시즌 수십번의 공연을 함께하는 환경이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가수 이야기로 넘어가자. 지크프리트는 반지 4부작 중에서 인기가 덜한 편에 속한다. 아마 1, 2위를 발퀴레와 신들의 황혼이 다투고 3,4위를 지크프리트와 라인골트가 나눠먹지 않을까. 난 개인적으로 지크프리트를 아주 좋아한다. 오히려 발퀴레에 딱히 큰 매력을 못 느끼는 편이다. 지크프리트는 반지 사이클 중 중요한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보탄, 알베리히, 브륀힐데 등 국회의원으로 치면 3선에 해당하는 모든 인물이 다 나오고 2선에 해당하는 지크프리트, 미메, 파프너, 에르다가 나온다. 등장인물 중 지크프리트에만 나오는 인물은 오직 숲새 발트포겔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무대에 ‘등장’하는 게 아닌 목소리 뿐이다. 반지 사이클에서 두번 이상 등장하는 인물 중 지크프리트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은 라인강 처녀, 프리카, 발트라우테 뿐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중요한 두 사람의 만남으로 가득 차있다. 보탄과 에르다, 보탄과 알베리히, 보탄과 지크프리트,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 말이다. 여기에 모든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가장 비중이 큰 슈필테너 역인 미메가 등장한다.
로게/미메로 이어지는 바그너 슈필테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역할이다. 이 분야의 대가인 하인츠 제드닉과 그레이엄 클라크의 노래와 연기를 들을 때면 다른 오페라에서 찾을 수 없는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때문에 반지의 퀄리티를 평가할 때 이 역할들의 중요성은 다른 영웅적인 역할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공연때는 이것보다 더 잘 불렀다.
이날 공연에 나온 마티아스 볼브레히트Matthias Wohlbrecht는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훌륭한 미메였다. 사악하며 가벼운 목소리, 가사를 활용하는 능력, 여기에 명확하게 전달되는 성량까지 탁월했다. 딱 하나 망치질 하는 리듬이 불안했지만 이건 바그너가 잘못한 거다. 참고로 망치를 한 손으로만 들고 그 속도로 그 리듬을 치라고 하는 건 진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글을 쓰다가 알았는데 서울시향이 라인골트를 할 때 미메 역으로 캐스팅 됐던 가수였다! 그 당시 후기들을 검색해보니 미메가 아주 잘 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당시 로게가 망했던 건 똑똑히 기억하는데, 볼브레히트가 로게를 불렀다면 훨씬 나았을테다.
이 공연 감이 좋다. 여기에 지크프리트가 등장한다. 전통적인 헬덴테너의 울림있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소리에 힘이 꽤나 들어가있다. 내가 유튜브로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아틸라 포레스토를 부른 영상.
헬덴테너 기근의 시대에 이탈리안 테너로 돌려막는 느낌은 있지만 시대가 시대인데 어쩌겠는가. 딱 김성근이 선발 없다고 계투 중에 아무나 선발 세우는 것과 비슷하다. 그 중에서도 지크프리트를 부르라고 하는 건 9이닝을 완투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관객들이 지크프리트를 실연으로 직접 보면서 느끼는 감동은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와 비슷한 면이 있다. 투구수 100개를 넘어가면서도 어깨를 갈아 한구 한구 던지는 눈물의 장면이나 1, 2막 개고생하고 3막에서 자기보다 덩치큰 여가수를 상대로 듀엣을 부르는 장면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캐스팅의 기준을 ‘잘 부를 수 있냐’라고 할 때, 지크프리트는 ‘잘’을 빼야한다. 일단 죽이되든 밥이되든 죽지 않고 마지막까지 부를 수 있는 가수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지크프리트를 부르는 가수의 풀은 아마 모든 오페라 역할을 통틀어 가장 좁을 것이다.
때문에 지크프리트 롤 데뷔를 직접 본다는 건 관객으로서도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오늘밤이 지옥이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지크프리트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칼스루에가 낳은 지크프리트로는 한동안 전세계 지크프리트를 정복하고 다녔던 랜스 라이언이 있다. 칼스루에 전속가수였던 라이언은 여기서 지크프리트 롤 데뷔를 했다고 한다.
에릭 펜튼은 약간은 경직된 연기를 보였지만 차분하게 지크프리트를 소화해냈다. 신인이 벼락처럼 데뷔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 다르다. 관객은 오롯이 가수의 떨림을 함께 공유한다. 베테랑의 여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노래가 아쉬운 것도 아니다. 성량도 충분했고 목소리도 너무 가볍지 않았다. 라이언 처럼 심함 비브라토도 없었다.
1막의 피날레에서 노퉁을 벼리는 장면은 내가 반지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지크프리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노래 역시 장중한 반주를 뚫고 나와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을 객석에서 직접 보니 마치 가수가 음표 하나하나씩 ‘클리어’해가는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호 호! 호호! 호하이! 하는 장면에서 가사는 흥겹게 노래하고 있지만 가수나 관객이나 모두 똑같이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잠시 미메가 노래를 할 때는 함께 마음을 놓았고 지크프리트가 다시 돌아올 때면 침을 꿀꺽 삼켰다. 브라운은 템포를 상당히 여유롭게 잡았고 그만큼 가수가 채워넣어야하는 공간은 넓어졌다. 오페라가 흐를 수록 펜튼은 지크프리트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았다. 이 어려운 역할이 조금씩 완성되가는 것이 눈 앞에서 펼쳐졌다.
이날 에릭 펜튼은 3막의 마지막 까지 지친 기색도 별로 보여주지 않았다. 지휘자가 제대로 발굴해낸 셈이다. 3막에서 잠 든 브륀힐데를 보는 장면에서 잠시 가사를 까먹긴 했지만, 정말 다행히도 그 부분은 오케스트라가 가수를 기다리는 부분이었다. 공연 내내 가사의 첫단어를 무대 왼쪽에서 불러주던 프롬프터도 그 순간 당황해서 꽤나 큰 소리로 가사를 알려줬다.
보탄을 맡은 레나투스 마사르에게서는 바이마르 반지에서 보여주던 바보같은 모습은 줄어들고 멋진 목소리와 레가토가 특징적이었다. 이 정도 퀄리티가 독일의 흔한 보탄이라 이건가! 보탄을 잘하는 데 중요한 것은 성량이나 넓은 음역과 같은 피지컬이 아니라 멋드러진 목소리로 가사를 맛깔나게 처리하며 노래를 지루하지 않게 연극적으로 해석해내는 능력이다. 마사르는 이 점에서 믿음직스런 보탄이었다.
알베리히를 맡은 Jaco Ventor는 알베리히 다운 사악한 목소리가 일품이었다. 미메와 함께 가장 모범적인 소리를 내줬다.
에르다와 숲새는 별다른 인상을 주진 못했다. 숲새야 돈 업쇼같은 내추럴 본 꾀꼬리가 부르지 않는 이상 큰 차이가 없지만 에르다는 이야기가 다르다. 성악적 역량이 곧 역할의 비중으로 이어졌고 두 끝판왕 신의 대화인 3막 1장은 조금 심심해졌다.
브륀힐데 역의 하이디 멜튼은 보통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소프라노였다. 광포한 비브라토, 엄청난 성량, 알아듣기 힘든 딕션 말이다. 목소리가 그래도 거슬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매력적인 소프라노는 아니었다. 곡을 수월하게 소화해내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사실 지금와서야 이렇게 쓰는거지 직접 볼때는 그저 바그너가 쓴 음표들을 오케스트라를 뚫고 전달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가수와 반주가 모두 합격점이었으니 연출만 방점을 찍으면 됐다. 하지만 연출은 내 기대를 배반하며 강렬하게 뒤통수를 쳤다.
1막이 올라갈 때 까지만 해도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것만 같았다. 골동품으로 가득찬 무대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줄리에타와 로메오>때 처럼 각각의 소품의 완성도가 빼어났다. 소품들이 어떻게 쓰일지, 어떤 의미로 풀어나갈지 흥미진진했다. 무대 위에 펼쳐진 박물관은 반지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크프리트>의 특징과도 일맥상통했다. 여기에 미메의 괴물 분장 역시 상당히 공을 들였다. 시각적인 퀄리티는 매우 뛰어났다. 여기에 보탄이 미메의 집에 들릴 때 간달프 복장을 입고 나온 건 취향저격이었다. 톨킨은 <반지의 제왕>과 <니벨룽의 반지> 사이에 공통점은 반지가 둥글다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몇가지 사소한 공통점들이 더 있다. 영웅이 아버지의 칼을 다시 벼리는 것, 용의 죽음과 관련된 말하는 새라든가.. 모두 지크프리트에 등장한다. 이날 반더러는 Grey Wanderer라고 불릴 만한 복장을 잠깐 입었는데, 겉옷을 벗었을 때는 사루만으로 분장한 크리스토퍼 리를 연상케했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노퉁이 모루를 가르고 박히는 것 역시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일관성 있는 아이디어가 없는 무대만큼 지루한게 없다. 이야기를 말이 되게 엮어내질 못했다. 그렇다고 도발적인 해석도 없었다. 멋있다고 생각했던 무대는 3막 2장까지도 울궈먹었다. 뒤에 틈틈히 상영하는 보탄의 눈과 지클린데의 얼굴은 공허했다. 카슈토프 반지는 사회주의 가정 아래 태어난 혁명전사가 AK로 용을 쏴죽이고 알렉산더플라츠로 나아간다는 이야기라도 있었지만 이 연출에서 지크프리트는 어느 곳으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보탄과 에르다의 싸움에서 보탄이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고 에르다를 찾아온 건지, 자신의 죽음과 신들의 황혼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생각이 없어보였다. 지크프리트에 데뷔하는 가수를 배려하기 위해서인지 3막 3장에서 브륀힐데를 만나는 장면은 브륀힐데가 깨어나기 전까지 가만히 앉아서 노래했다. 듀엣에서도 연기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케스트라가 폭발하며 열일하는 와중에 연출가는 직무유기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줬다.
보탄과 그 수하들이 미메의 집과 파프너의 동굴을 계속 감시하고 있다는 컨셉은 좋았으나 거기서 더 발전되지 못 했다. 미메와 알베리히의 분장은 훌륭했지만 그들의 캐릭터는 결구 오토 솅크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예전에 솅크의 반지를 박물관에나 들어갈 반지라는 의미로 ‘박물관 반지’라고 불렀는데, 이번 연출은 무대 자체도 박물관이고 개념 역시 박물관에서 꺼내온 것 같다는 점에서 역시 ‘박물관 반지’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내가 바그너 오페라를 보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솅크 같다는 것이다.
몇가지 파편적인 아이디어들은 있었다. 지크프리트가 파프너에게 노퉁을 꼽은 뒤 칼을 챙기지 않는다는 것, 온갖 히어로 옷을 입고 다니지만 결국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기 한참 걸린다는 것, 그리고 3막에서 Zeeg Freed라는 말도 안되는 글자가 써진 티셔츠를 입고나와 “You know nothing” 이란 소리를 들을만한 영웅이라는 점(이때 복장이 존 스노우와 살짝 비슷한 느낌이다)은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장면이었다. 새의 노래를 따라하는 장면에서 피리 대신 조율이 안된 피아노를 치니 바그너 두상이 절레절레 머리를 돌려버리는 장면도 나름 괜찮았고, 호른 콜 장면에서 호른 주자를 부른 뒤 새를 잡기 위해 교묘하게 부르는 것 처럼 타이밍을 조절한 것도 나름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극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3막 3장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지크프리트가 드디어 박물관 무대를 양쪽으로 밀어 열어버릴 때만 하더라도, 이 해방감을 느끼게하기 위해 3시간 동안 같은 무대로 괴롭혔구나 싶었다. 하지만 정작 열리고 나서 나타나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저 두 남녀가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카메라로부터 천천히 멀어져가는 장면이 무대 뒤편에 상영됐다. 뜬금포도 적당히 날려야지…
대충 표현해도 말이 되는 다른 장면과 달리 3막은 섬세한 감정 연출이 꼭 필요한 장면이다. 보탄이 왜 말로는 신들의 황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에르다한테 징징대는 건지, 뻔히 자기가 질 거 알면서 왜 지크프리트 성질을 긁는 건지, 브륀힐데는 왜 저렇게 감정이 요동치다가 결국 지크프리트를 받아들이는지, 이런 점들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수수께끼 처럼 이상해진다. 이번 공연이 딱 그랬다.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저스틴 브라운의 지휘는 참 훌륭했고 가수들도 잘 따라와줬지만 연출이 빠지니 감동이 완성되기 어려웠다. 차라리 콘체르탄테였으면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모습이라도 보지, 그냥 서서 연기없이 노래하는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를 보고 있는 건 별로 즐겁지 않았다. 두 가수가 성악적으로 충분히 이 작품에 도전할만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두고두고 아쉬울 일이다.
바이로이트에서 만난 아저씨와 돌아다니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두 우문현답이 있다.
“아저씨는 공연 보러갈 때 뭘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지휘자? 가수? 연출? 극장 네임밸류?” 내가 묻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물론 작곡가야.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지, 어떤 특정 신부나 목사가 하는 설교를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 마찬가지로 지휘자나 가수, 연출은 그저 신의 말을 옮기는 사람이지. 어떤 신의 말이냐가 중요하지, 어떤 사제가 이야기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칼스루에 공연을 보니 조금 알 것 같았다. 믿을만한 공연단체가 별로 없는 우리나라야 지휘자, 오케스트라, 가수 등등 꼼꼼하게 체크해보고 결정하지만 독일에서는 그냥 보러 가는 거다. 어떤 공연을 보러가도 퀄리티가 나오기 때문에. 저 아저씨들도 우리나라 와서 공연봤으면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로시니를 듣지 xx시향이 연주하는 바그너는 안 들으러갈 걸.
또 하나. “연출을 평가할 때 뭐가 제일 중요해요?”
“난 극장에서 진짜 ‘드라마’를 보고 싶어. 배경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든 말든, 그게 제일 중요해.”
드라마라는 개념이 얼마나 포괄적인지를 생각하면 두루뭉술한 대답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조금씩 그 의미를 알아가는 것 같다. 오늘 연출에서는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드라마는 없었다. 음악가들의 고생을 망쳐놓는 건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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