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출발할 때 여행 계획이라곤 공연 일정을 정한 것 밖에 없었다. 공연을 안 보는 시간대에는 무엇을 할지 전혀 확정짓지 않은 채로 간 것이다. 처음 9박 10일이라는 계획을 짰을 때는 낮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공연을 보러다닐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연 일정이 훨씬 늘어나면서 생각보다 박물관, 미술관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빈 시간 동안 찾아갈 박물관을 꼭 가고 싶었던 곳으로 한정 지을 수 밖에 없었다.
1월 16일 도쿄 여행 첫날. 이날은 오후 3시 까지는 일정이 자유로운 날이었다. 내가 도쿄 첫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바로 도쿄국립과학박물관. 음악 애호가이기 이전에 한 명의 공학도로서 보자면 일본은 최첨단 과학기술의 선두국가이다. 대학원도 안 나온 평범한 샐러리맨이 노벨 화학상을 받는 국가 아니던가. 우리나라에게는 아직 멀리만 느껴지는 노벨 화학상, 물리학상, 의학상들을 심심찮게 배출하는 나라다. 그래서 도쿄 첫 관광지로 국립과학박물관을 찾아갔다.
국립과학박물관은 우에노 공원에 있다. 우에노 공원에는 아마 가장 유명한 박물관인 도쿄국립박물관을 비롯해 도쿄서양미술박물관, 도쿄시립미술관 등이 있다. 공연장으로는 도쿄도향의 주 공연장 중 하나인 분카 카이켄이 있고 상당히 큰 동물원도 있다. 도쿄에 온 관광객이라면 우에노 공원은 한번 쯤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나도 우에노 공원을 간 날이 많았지만 아쉽게도 다 둘러보지는 못했다. 일단 대표적인 도쿄국립박물관도 찾아가지 못했다. 애초에 여행 목표가 '일본이란 어떤 나라인가'가 아니라 '일본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조금 더 넓히면 '일본에게 서구 예술이란 어떤 것인가'였으니 도쿄국립박물관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과학은 이와 별개로 공학도로서 관심이 생겨서 찾아간 것이었다.
잠시 먹는 이야기를 하자면, 일본에서도 한 번 편의점 음식을 먹어볼 생각으로 삼각김밥 두 개와 초코 우유를 집었다.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니 삼각김밥의 맛은 복불복이었는데 하필 집은 것이 내가 싫어하는 날치 알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삼각김밥에 넣을까 하는 불평을 하며 우유를 마셨다. 헐, 초코 우유라고 생각하고 집어온 우유는 커피 우유였다. 사실 조금만 더 그림을 살펴봤어도 헷갈릴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별생각 없이 고르다 보니 실수한 것이다. 나의 멍청함과 왜 날치 알 같은 걸 김밥에 넣는지를 불평하며 두 번째 삼각김밥을 깨물었다. 그런데 이번 건 더 심각해서, 성게 알이 들어간 놈이었다. 그 신 맛이 너무 강렬해서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날 것 같다. 돈을 내고 사온 것이니 어찌 다 먹어보려고 노력했지만 한 입이라도 더 먹었다간 먹었던 걸 다 도로 뱉어낼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도쿄국립과학박물관은 단순히 과학 박물관이 아니라 자연사 박물관에 가깝다. 실제로 영어 이름도 Tokyo National Museum of Nature and Science 이다. 지구관과 일본관 두 관이 있는데 스케일은 지구관이 훨씬 크다. 지구관을 둘러보고 일본관을 찾아가면 아담한 느낌이 든다.
처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본 것은 바로 Theater360 이다. 뜻을 옮겨보자면 360도 스크린 쯤 될텐데, 단순히 360도가 아니라 천장과 바닥 까지 스크린이다. 즉 스크린이 구면으로 되어있고 감상자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내가 갔을 때가 평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앞의 상영이 끝나길 몇 분 기다렸다 입장했는데 덕택에 혼자서 즐길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가면 가운데 다리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어서 별생각 없이 다음 문으로 나가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그 다리가 관람석인 셈이고 이미 스크린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지구의 탄생에 관한 것 하나, 그리고 우주의 신비와 같은 영상을 보았는데 나레이션은 일본어였고 자막은 없었다. 아니, 사실 자막을 달만한 위치가 없었을 것이다. 시종일관 사건이 벌어지는 위치가 달라지니 계속해서 이곳저곳 시선을 바꿔가며 감상해야했다. 정말로 황홀한 체험이었는데, 내가 지구과학이나 우주에 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도 감명 받을 환경이었다. 일본의 학생들은 이런 것을 보면서 과학을 배우겠구나라는 생각에 부러웠다.
그리고 시작되는 지구관.
심해의 생명체들 이란 제목의 수조였다.
전시관의 공간을 잘 활용해 이렇게 공중에 물고기들이 떠다니고 있다.
원시림 나무의 모습을 재현한 것
그리고 다음 층으로 건너가면 어마어마한 양의 화석들을 구경할 수 있다. 사실 이 박물관에서 '자연사'에 관련된 것은 그닥 내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넘어갈 생각도 했지만 직접 둘러보니 이 거대한 공룡 화석들에게 압도될 수 밖에 없었다. 공룡에 별 흥미가 없는 사람들도 분명 이 전시관을 둘러보면 그 경이에 감탄할 것이다. 어렸을 적 그림책에서 본 모든 공룡들이 다 재현되어 있는 듯 했다.
이 사진은 내가 따로 효과 처리를 한 것이 아니라, 원래 유리창이 이런 효과를 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전시관의 가운데에는 바다 속에 살고 있는 거대한 생물들이 전시되어있는데 바깥에서 보았을 때 바다, 혹은 수조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이런 불투명 창을 설치한 것 같았다. 단순히 불투명창은 아니고 시야각이 직각이면 일반 창 처럼 투명하게 보인다.
전시관 가운데서 바라본 화석들. 파노라마로 찍어서 중간에 공간 왜곡이 있지만, 전시된 화석들의 엄청난 스케일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침 이 도쿄에 도착한 15일 즈음에, 페이스북을 통해 학교 선배 한 분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위의 내용은 인수위 교육과학분과 위원으로 선정된 장순흥 교수에 대한 반대였다. 대선 전 '미래창조과학부'라는 이름이 나올 때 부터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는데, 설마 했던 그 걱정은 창조과학 활동을 한 장순흥 교수의 교육과학분과 위원 선정으로 한층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창조과학회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설명하려하는 사이비며 진화론을 교과서에서 없애려는 악질적인 집단이다.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이것은 과학도로서 도저히 수긍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분노가 갑자기 떠올랐던 것은 바로 도쿄국립과학박물관에는 이러한 진화의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포유류의 진화를 비롯해 영장류의 진화도 설명되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의 국립중앙과학관에도 이 정도의 내용은 아마 설명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진화론 교육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이 크게 걱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하에 있던 기초과학에 관련된 전시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mks 단위의 정의와 역사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1 단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도록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기계과 2학년 기초 실험과목인 기계공학실험에서 실제로 해보았던 레이저 회절에 관한 실험 장치도 있다. 실제로 작동시키고 어떻게 변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줄의 실험을 직접 해볼 수 있는 장치다. 사진에는 안 찍혀있지만 앞 쪽에 손잡이 달린 원반을 열심히 돌리면 장치의 양 옆에 있는 무거운 추가 위로 올라간다. 일정 높이 까지 끌어올리고 낙하버튼을 누르면 추의 위치에너지가 열에너지로 전환되어 물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은근히 힘이 많이 들어서 고생했다.
진짜 주기율표. 각각의 주기율표 칸 안에는 실제 물질이 들어있다. 보이는 것 처럼 방사성 물질은 아쉽게도(?) 당연히 전시가 되어 있지 않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삽화를 모두 원자를 나타내는 기호로 표현해냈다.
화학2에서 배우는 전자 오비탈도 설명되어 있다.
다른 층으로 올라가니 어린 학생들로 왁자지껄 했다. 견학 온 학생들은 모두 이렇게 직접 체험할 것이 많은 관에 모여있었나 보다. 내가 봐도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이 많았는데 어린 학생들에겐 오죽했으랴. 각각의 체험 옆에는 모두 일본어로 된 설명들이 있다.
일본의 근대 과학기술을 설명하는 그림들.
가장 윗층에는 온갖 종류 동물들의 박제가 있었다.
지구관을 여유있게 둘러보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일본관은 그냥 둘러보고만 나왔다. 생각해보니 사진도 한 장 안 찍었다. 최소한 푸코의 진자 모형이라도 찍어 왔어야 하는데 조금 아쉽다.
기념품 점에서 파는 우주 식품들. 처음에는 그냥 우주 이름만 같다 붙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펴보니 진짜로 우주에서 쓰이는 우주 식품들이었다.
점심은 과학박물관 안에 있는 식당에서 먹었다. 주섬주섬 가서 '카레 쿠다사이'라고 말하고 주문을 했는데, 무어라고 다시 알려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어제 라멘 집에서 비슷한 일이 있어서 밤에 '저는 일본어를 할 줄 모릅니다'를 일본어로 어떻게 말하는 지를 알아갔었다. 그렇게 말하니 점원이 친절하게 뭔가 다시 설명해주면서 음식을 바로 내 주었다. 이 때는 매우 더듬거리면서 말했지만, 이 '와따시노 니혼고가 데끼마셍'은 여행다니면서 가장 자주 쓴 일본어가 되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였다. 여튼 그렇게 해서 카레라이스를 먹을 수 있었다. 자취할 때도 직접 해 먹은 요리가 카레 밖에 없었고, 카레만 있어도 방에서 먹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카레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일본의 카레 요리들이 딱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도 음식점이나 학교 식당이 아니고서야 카레를 하는 식당이 흔치 않은데 일본에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출구에 있는 범고래 모형. 이 박물관을 대표하는 심벌이기도 한 모양이다.
어렸을 적 시카고에 갔을 때 자연사 박물관에 갔었는데, 아마 세계에서 손 꼽히는 자연사 박물관이었을 거다. 일본의 도쿄국립과학박물관이 그에 버금 가는 박물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과연 그 규모와 전시품들이 정말 대단했다. 이런 과학박물관의 중요성은 무엇보다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과학의 가치를 쉽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 학교에서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박사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강의의 주제는 어떻게 우리가 일반 대중들에게 과학의 중요성을 알릴 수 있을까 였다. 이 박물관은 그런 역할을 정말 충실히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자연의 신비에서 시작해서 현대 과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까지 다양한 내용을 다루며 학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장치까지. 대전에 있는 국립중앙과학관을 간 기억이 없어 두 시설 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도 언젠가 이런 대접을 받고 다닐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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