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길레프 후예들의 샹젤리제 공습.


드디어 보았습니다. 쿠렌치스! 


후기를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누군가의 공연을 특정해서 보고 싶었던 게 오랜만이다. 이 정도로 보고싶었던 음악가가 아바도와 카우프만 빼고 또 있었나 싶다. 런던에 있다가 학회가 끝나고 파리로 갈 일정을 짜다가 쿠렌치스 공연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런던에서 부랴부랴 출발했다. 유로스타가 원래 출발 30분 전이면 체크인을 마감하는데 역에 도착했을때는 출발 25분 전이었다. 이렇게 기차를 놓치나 싶었지만 다행히 빨리 서두르니 체크인이 10분 정도에 끝나서 여유있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첫 파리 여행이지만 정신이 없었다. 에어비앤비 숙소에 들려 체크인하니 공연이 얼마 안 남았다. 간단하게 뭘 먹고 갈까 하다가 혹시나 늦을까봐 일단 샹젤리제극장으로 갔다. 도착하니 40분 정도가 남았는데, 로비 개장을 30분 전부터 해서 내부가 아주 복잡했다. 한참 줄서서 기다렸더니 티켓 찾는 건 로비 개장 하고 나서 해야한단다. 


건물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깐 바깥에 나왔는데, 얼굴이 아주 익숙한 사람이 지나간다. 헉! 고민도 안하고 바로 달려가서 불러세웠다. 혹시 무지카 에테르나 악장님 아니세요??? 공연 전에 미안한데 정말 팬이라고 사진 좀 같이 찍어도 되겠냐고 했다. 생각해보니 이름도 정확히 못 외우고 있었다. Afanasy Chupin이다. 오늘 공연에서도 시종일관 쿠렌치스 뺨치는 활동반경을 보여주며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내가 진짜 쿠렌치스를 보러 오긴 보러 왔구나 싶었다. 

악장님 존잘... 내가 찍어놓고 내가 놀람. 초점만 제대로 맞았어도ㅜㅜ

점심도 제대로 못 먹어서 아예 굶었다간 큰일 날 것 같아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주위가 죄다 비싸 보이는 건물들이라 간단하게 먹을 케밥집이나 햄버거 집 같은 건 없을 것 같았다. 길 맞은편에 Entracte라는 이름의 호텔 레스토랑이 있길래, 이름에 걸맞게 30분이면 먹고 나올 수 있는 음식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들어갔더니 알란 릭맨 닮은 정장 입은 아저씨가 날 맞이했다. 무슨 지배인 같은 복장을 하신 분이 직접 서빙을 하니 당황했다. 8시 공연인데 간단하게 먹을 만한 게 있냐고 하니 클럽 샌드위치를 추천해줬다. 샌드위치랑 카페오레를 시켰다. 샌드위치는 21유로였고 카페 오레는 10유로였음….. 맛 까지 없었으면 빡쳤겠지만 샌드위치는 나름 맛있었다. 하지만 한끼, 아니 거의 반끼니 밥값으로 31유로를 쓰게될줄이야….  하지만 쿠렌치스 영접하는데 돈을 아낄 순 없었다.



좌석은 1열 중앙으로 예매했다. 원래 1열 정중앙을 노리려고 했는데 예매 오픈이 언제인지 몰라 놓쳤다. 1열 중앙블럭 중 가장 왼쪽이었다. 이 자리 앉았는데 무대가 너무 높아 지휘자가 안 보이거나 가수한테 가리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했다. 음향 밸런스가 엉망이진 않을까. 하지만 아바도 공연을 보고 느낀 게 하나 있다. 그 때 합창석을 앉을까 가장 비싼 1층 중앙을 앉을까 하다가 내가 얼빠짓 하러가는 것도 아니고 음악 들으러가는 건데 음향 좋은 걸 선택해야지! 하고 1층 중앙을 골랐다. 음향은 물론 좋았지만 아바도를 더 가까이서 못본 게 한이 됐다. 루체른에 가면 꼭 합창석 1열을 앉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결국 KKL 합창석 1열에 앉았지만 지휘대에 올라온 건 아바도가 아니라 넬손스였다.


자리 걱정을 많이했는데 이게 웬걸, 진짜 개 꿀 자리였다. 단상도 생각보다 낮았고 무엇보다 쿠렌치스를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쿠렌치스의 넓은 지휘 반경 때문인지 지휘자 뒤쪽은 가수들도 비워놨다. 거기다 쿠렌치스가 왼편에 있는 가수들을 지휘하는 경우가 많아 쿠렌치스의 얼굴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자리기도 했다.



쿠렌치스가 입장할 때 정말 떨리더라. 아 내가 진짜 빠순이가 맞구나. 와 저거 진짜 쿠렌치스? 이거 실홥니까? 쿠렌치스가 내 앞에 서있다니… 화질이 무슨 70미리 필름 아이맥스에 쓰리디야ㄷㄷ 영상으로 보던 쿠렌치스가 진짜 내 앞에 있다니ㅋㅋㅋㅋㅋ 손 떨리는 거 하나하나 악장 지휘할때 표정 하나하나가 다 보이는데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음악 이야기 해야하는데… 어…. 뭐라고 해야하지.. 해석은 당연히 잘츠부르크 공연과 거의 같았다. 실연에서 들었을 때 더 인상적인 것들은 극도로 섬세하게 처리된 피아노 패시지들이었다. 락커 같은 모습이 더 머릿속에 남게 되지만 실제로 다른 지휘자들과 차별화되는 쿠렌치스의 특기는 선율들을 정말로 달콤하게 처리해내는 능력들이었다. 피아노 안에서 다양한 다이나믹을 두며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정지할 것 같은 속도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 바로 쿠렌치스였다. 


1층 1열을 고르면서 가수 목소리가 잘 안 들리진 않을까 걱정했다. 대체로 콘서트홀이나 오페라 극장에서 1층보다는 높은 층에서 가수 목소리가 더 뚜렷하게 들리는 경향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독일 돌아다니면서 1층만 골라잡을 때 그런 점이 아쉬웠었다. 

그런데 콘체르탄테 배치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뒤에있고 가수가 말 그대로 코앞에 있어서 이보다 더 가수 소리를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로 실제 공연장에서 듣는 가수의 노래는 울림이 많이 들어가 딕션을 알아먹기 힘든데, 이렇게 발음 하나하나게 완벽한 해상도로 들리는 걸 처음 경험해봤다. 반향 없이 생소리만 압도적으로 들리는 것이었지만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공연장에서 듣는 것보다 그냥 음반으로 듣는 게 가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 들은 건 XRCD에 억대의 오디오를 물린 시스템도 가뿐히 부숴뜨릴 질감이었다. 공연장 많이 다니면서 음향 때문에 라이브 현타가 오는 경우가 있는데 (가수가 오케를 뚫고 나올 길이 없는 구레의 노래라든가…) 역시 레코딩은 통조림일 뿐이라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비주얼이나 오디오나 실제 공연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환경이었다. 가수가 작은 방에서 나를 위해 노래해주는 느낌이었으니.


잘츠부르크 때와 가수가 바뀌어 조금 걱정도 했다. 진짜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카리나 고뱅이랑 스테파니 두스트락은…. 이것보다 노래를 더 잘할 수 있나 싶었다. 둘의 첫 듀엣부터 잘츠부르크 가수들을 아쉬워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잘츠부르크 리뷰 다시 읽어보니 샹젤리제 캐스팅이 잘츠부르크보다 과연 잘 부를 수 있을까 싶다 라고 써놨네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직접 들은 사람이 제일 잘하는 겁니다 암요. 


맨 앞자리라 성량은 이미 차고 넘치는데, 두스트락은 딕션 곱씹으면서 연기하는 게 정말 탁월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피아니시모에서부터 포르티시모 까지 꽉 찬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세스토의 아리아들이 오늘 공연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이었다.  고뱅 역시 프레이징을 만들어내는 게 쿠렌치스 사단 다웠다. 잘츠부르크의 골다 슐츠에 비하면 표현의 폭이 훨씬 넓었다 찌르는 듯한 고음도 인상적이고, Non più di fiori 중간에 저음역시 소름끼칠 정도였다. 


티토 역의 막시밀리안 슈미트는 어려운 역할을 잘해줬다. 이 역할을 어떤 목소리가 불러야 하는지는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지만, 잘츠부르크에서 티토를 불렀던 러셀 토마스와 정반대 되는 스타일이었다. Se all’impero 에서 콧소리가 너무 많이 섞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어려운 아리아를 그 정도 해줬으면 됐지. 거기다 레치타티보에서 자음을 강렬하게 사용하는 연기도 아주 좋았다.



나머지 배역들도 주연에 전혀 뒤쳐지지 않았다. 안니오 역의 지니 드비크는 콘체르탄테였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연기를 하고 있었고 실제로 들었을 때는 영상에서보다 좀더 명징한 소리였다. 세르빌라 역의 안나 루치아 리히터는 체를리나를 자주 부르는 가수로 체를리나 하면 떠오르는 딱 그런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 아름다운 목소리에 쿠렌치스 반주가 곁들어지며 첫 노래 라우다무스 테에서부터 대단한 박수를 받고 시작했다. 윌러드 화이트는 가끔 목소리가 답답하게 들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실제르 들으니 그 나이에도 아주 화통한 목소리를 들려줬다. 은근히 중창에서 중요한 파트를 맡는데 베테랑 다운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다.

무지카 에테르나의 앙상블은 정말로 탄성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음반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칼 같은 앙상블을 실연에서도 똑같이 보여줬다. 분명히 현악기 음정이 조금 틀어질 법도 한 패시지 역시 깔끔했다. 시대연주 단체 특유의 실연 디버프를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가끔 저음에서 나오는 그 특유의 타악기스러움은 뭘까 싶었는데, 스피카토를 활 중간 위에서 연주하더라. 진짜 활이 팡팡 튈 수밖에 없는 위치 말이다. 합창단 역시 비브라토와 다이나믹을 조절에 뛰어났다.


이런 저런 말 많이해도 쿠렌치스의 지휘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손을 어떻게 움직이고, 프레이징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떤 표정으로 음악을 이끌어내는지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가수들과 함께 가사를 읊으며 노래와 오케스트라가 엇나가는 일이 전혀 없이 완전히 호흡을 같이 하는 것 같았다. 가수의 눈 옆까지 와서 손을 흔들어대며 프레이징을 이끌어냈고 거기에 음악이 다 담겨있었다. 조였다가 풀었다가 조였다가 풀었다가, 쿠렌치스의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지루할 수 있는 틈새가 전혀 없었다.



 이 오페라가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작품이었나. 오늘 공연을 보면서 쿠렌치스가 왜 티토를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선율은 모차르트 후기의 완숙된 경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으로 가득차있고 아리아 하나하나가 뚜렷한 대비를 갖췄다. 쿠렌치스가 탐낼 만한 요소들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여기에 잘츠부르크 공연에서와 마찬가지로 C단조 미사와 프리메이슨 장송곡을 추가하며 레치타티보는 아주 간결하게 정리하여 극의 흐름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활약할 여지도 다른 모페라에 비해 더 많다. 잘츠부르크와 차이점 딱 하나는 프렐류드와 푸가를 제외한 것. 




사실 출국하기 전에 쿠렌치스한테 줄 선물을 만들어볼까 했었다. 월갑이 예당에 건 밑 생일축하 광고 같은 걸 나도 만들어볼까 싶었다. 진짜 시도까지 했다. 구글에서 이미지 긁어 모았는데, 자꾸 프로그램 에러나고 하니까 좀 현타가 왔다.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이지ㅋㅋㅋㅋㅋㅋ 이런 거 할 시간 있으면 여친님 선물이나 챙겨야지... 그거 쿠렌치스한테 들이밀면 이 씹덕놈은 뭐지 싶을 거 아냐....



그런데 공연장 가니 뭔가 진성 쿠빠들이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일단 이반카 닮은 여성분이 2부 시작할 때 거대한 꽃다발을 들고 객석에 들어오더라. 1층 1열에 앉은 걸 보니 보통 빠가 아닐 것 같았다. 또 다른 여성 한명은 내 미러리스 카메라를 꼬꼬마로 만들 것 같은 데세랄을 들고 극장을 배회하더라. 카메라 들고 열심히 찍고 있으면 너무 덕후처럼 보일 것 같아 걱정했는데 괜히 위안이 됐다. 커튼콜때는 아예 대놓고 나가서 찍고 내 바로 옆까지 와서 열심히 셔터질을 하길래 나도 용기를 얻어 열심히 찍었다. 근데 알고보니까 무슨 전속 사진사이신듯.. 그냥 평범한 얼빠였으면 사진 좀 보내달라고 구걸해볼 생각이었는데.....

커튼콜 때 박수 안치고 1열에서 사진기 들이밀고 있으면 좀 눈치 보일 것 같아 걱정을 했는데, 옆에 있는 관객들도 다 폰 들고 찍고 있고 저 사진사 분도 열심히 찍으니까 나도 나름 열심히 찍었다. 찍고 나니 초점 나간 게 많아서 더 찍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눈치 보이는 건 순간이지만 사진은 영원하다. 진짜 빠순이 다 됐구나ㅜㅜ


공연 끝나고 출연자 출입구를 찾으려고 했는데 다행히 쉽게 찾았다. 딱 봐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어서 저기로 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사인 받을 거 몇개 가져왔는데 개멍청하게 네임펜을 안챙겨옴.... 거기다 유럽에선 네임펜을 어디서 사야되는지도 모르니까ㅜㅜ 숙소에 돌아오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이집에 널린게 펜이더라. 하나만 빌려달라고 할 걸 꺼이꺼이ㅠㅠ  

여기 왼쪽에 찍힌 사람은 페름 감독.


쿠렌치스가 한창 대기실에서 사람들이랑 사진찍고 인사하다가 이제 리셉션에 가려고 했다. 옆에 아저씨한테 펜을 빌리기로 해서 겨우 사인 받았다. 그 아저씨는 쿠렌치스랑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가져오셨더라. 나도 셀카 한번 같이 찍고 사인을 받았는데, 문제는 그 펜이 사인받기에 좋은 펜이 아니었다는거ㅜㅜ 너무 얇은 펜이라 코팅된 종이 위에 받으니 마르기 전에 너무 빨리 번져버렸다. 복도 나가는 길에 붙잡고 사인받는 거라 세장 다 들이밀기에 좀 눈치보였는데 마지막 봄의 제전 음반 보더니 "이 음반에 싸인하기 참 적당한 장소"라고 이야기해줬다. 근데 막상 받고보니 원래도 숨은글씨 찾기 그림인 재킷에 숨은 사인 찾기가 돼버렸다. 한국에 너 팬들 많다고, 생중계 들으려고 새벽까지 깨있는다고 전해줬다.

대기실 앞에서 기다리면서 함께 서있는 사람 중 한명이 왠지 낯이 익었다. 그러고보니 쿠렌치스 돈조반니 레코딩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녹음 감독이었다. 내가 혹시 녹음 감독 아니었냐고 (톤 마이스터라고 물어볼걸, 말이 떠오르지 않아 recording engineer라고 말해서 좀 미안했다) 물어보면서 다큐멘터리 재밌게 봤다고 사진 같이 찍어도 되냐고 하니까 좀 당황해 했지만 그래도 같이 찍어줬다. 내가 너무 흥분해서 말 건것 같아서 돌아가면서 정말 그 레코딩들 좋아한다고 하니까 음악은 저 사람들이 만드는 거니까 너무 그럴 거 없다고 말하더라. 하지만 진짜 레코딩의 음향 자체도 훌륭한 음반이다. 


로비에서 리셉션을 하더라. 사진찍으려고 근처에 가니 프라이빗한 리셉션이라고 직원이 막더라. 멀리서 카메라 줌 땡겨서 잡는데 내가 무슨 파파라치도 아니고. 빠순이질이 참 힘들구나 싶었다. 전국의 빠순이들 리스펙 합니다.


 

완벽의 경지에 다다른 오페라였다. 더 쓰고 싶지만 내일도 공연을 봐야하니 이만 줄여야겠다.

오늘도 샹젤리제는 러시아 음악가를 빛내주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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