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파파노를 솔티라고 놀리지 않겠습니다.
로열 오페라의 17/18 시즌 개막작은 파파노 지휘, 리처드 존스의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올리는 라 보엠이었다. 넬손스 지휘로 영상도 나온 이전 프로덕션은 무료 41년 간 써먹었다고 한다. 로열 오페라도 돈이 궁한지 라 보엠으로 제대로 뽕을 뽑아볼 기세로 파파노 지휘에 공연 횟수도 다른 작품에 비해 왕창 늘렸다.
보러 오기 전에 큰 기대를 안했다. 리처드 존스 연출도 기대가 안 되고, 캐스팅에선 마이클 파비아노와 마리우스 크비첸이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둘다 명성에 비해 썩 좋아하는 가수가 아니다. 파파노는 작년 런던심과의 엘가 공연에서 크게 실망한 뒤로 솔티의 후계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라 보엠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작품이지만 한국에서도 워낙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라 별 감흥이 없었다. 워낙 익숙한 작품이다보니 예습도 전혀 안 했다.
공연을 보기 전에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들었다. 페트렌코 내한 공연이 그렇게 좋았다고..... 왜 하필 페트렌코는 내가 유럽 왔을 때 오는 겁니까ㅜㅜ 서울에서 페트렌코가 지휘하고 있다는데 난 멀리 유럽까지 와서 파파노나 보고 있어야 하니 괜히 슬퍼졌다. 파파노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내가 페트렌코 못본 걸 만회하겠냐 싶었다.
하지만 파파노가 괜히 런던에서 짱 먹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동안 느꼈던 파파노의 장점들이 모두 한데 모여 작품에 착 달라붙어 날아오르는 공연이었다. 일단 오케스트라 장악력. 파파노가 지휘한 영상을 들으면서 ROH 오케스트라가 런던의 다섯 오케스트라 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착각을 했다. 실제 연봉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지휘자들이 잡았을 때 ROH 오케는 헛점이 자주 드러나는 오케스트라다. 파파노가 잡았을 때만 각잡히고 윤기가 생긴다. 상임지휘자가 있을 때 기합 바짝 드는 건 모든 오케스트라 공통이지만 ROH는 유독 심한 것 같다. 파파노 지휘의 ROH는 세상 두려울 게 없이 거침없고 음색 역시 반짝인다.
칼 같은 앙상블과 파파노 특유의 음표를 짧고 분명하게 자르는 특성 두개가 만나는 지점이 있으니 바로 피치카토다. 내가 오케스트라 들으면서 이렇게 피치카토에 감탄해본 적이 없다. 피치카토가 무슨 예술의 경지다. 현악기에서 무슨 하프 소리가 나네ㅋㅋㅋㅋ 조금만 틀려도 숨길 수 없는 게 피치카토인데, 파파노는 이걸 기가 막히게 맞춰낸다. 여기에 하프 소리도 다른 지휘자에 비해 확실히 강조하고, 피치카토와 함께 등장하는 관악기의 어택도 정말 깔끔하게 정리한다. 이건 뭐 피치카토 장인이라고 해야할까. 안토니오 "더 피치카토" 파파노라고 불러야겠다.
피치카토와 하프, 그리고 이들이 나올 때 전체적인 오케스트라 음색이 얼마나 아름답냐면, 파파노가 이런 소리에 특별한 패티쉬가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혹시 부인이 하피스트는 아닐까? 혹시 자식한테 하프를 공부시키고 있진 않을까? 취미로 집에 현악기 가져다두고 머리 식힐 때 항상 피치카토를 연구하나?
라보엠에는 생각보다 피치카토가 아주 많이 등장한다. 과장 좀 보태면 절반이 피치카토다. 진짜 그런가 하고 임슬프에서 파트보 잠깐 열어보니 피치카토가 정말로 자주 튀어 나온다. 1막의 장난들에서도, 무제타의 왈츠에서도, 심지어 미미가 죽을 때도 피치카토가 분위기를 만든다. 그 피치카토들이 자신있고 깔끔하고 울림있게 튀어나올 때의 효과란 정말 대단했다. 페트렌코가 라보엠을 지휘한다고 해도 이렇게 하진 못할 거다.
거기다 파파노는 템포를 조절하는데 기술자 같은 면모가 있다. 템포 변화 자체가 참신하다거나 마법같다거나 하진 않는데 정말 안정적이다. 기어 변속을 할 때 불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케스트라랑 가수가 서로 떨어질 틈새가 없다. 난장판으로 유명한 2막의 합창도 그렇다. 파파노가 애들을 얼마나 잡았는지 모르겠는데 어린이 합창단 까지 칼앙상블을 보여준다. 완벽한 세공품으로서 오페라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준다. 내이름은 미미에서 나오는 것 같은 우아한 선율들 역시 너무 쥐어짜내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부풀어 올릴 수 있는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여기에 오케스트라를 터뜨리는 능력은 더 설명할 것도 없다. 저번 엘가 들을 때 너무 미친듯이 잘 터뜨려서 힘들었다.
가수들도 잘해주었다. 마이클 파비아노는 어째서 쓰는 가발마다 다 안 어울리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노래는 괜찮았다. 그대의 찬손에서 하이 C는 쥐어짜내는 소리긴 했지만 얼추 비슷하게라도 났으니 한 50점은 줄 수 있다. 내 편견 때문인지 어딘가 가벼운 느낌이 남아서 아쉽다. 마지막 quel guardami così 대사치는 장면이 너무 어색한 것도 감점요인. 옛날 호세 발연기 보는 기분이었다. 미미 역을 맡은 니콜 카Nicole Car는 처음 듣는 가수였지만 너무 가녀리지 않은 미미를 잘 표현했다. 오히려 가장 인상깊었던 건 여태 별로 안 좋아했던 크비첸이었다. 직접 들으니 목소리의 힘도 생각보다 훨씬 좋고 소리가 안정적으로 자리가 잡혔더라. 4막에서 로돌포와 부르는 듀엣에서 파비아노를 상대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리처드 존스의 연출은 쏘쏘. 아예 기대를 안하고 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건질 장면도 있었지만, 영 아니올시다 싶은 장면도 있었다. 내가 1막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미미-로돌포 씬을 보자. 미미가 실신하는 장면에서 진짜 맨바닥에 푹 쓰러진다. 로돌포가 어찌할 줄 몰라 발로 슬쩍 건드리는 걸 보니 웃기려고 넌 것 같은데, 난 좀 가슴 아팠다. 곧 죽을 사람이라는 복선까지 저렇게 유머로 써먹었어야 하나. 거기다 미미가 촛불 받아서 돌아가는 순간까지 긴장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 미미가 개쿨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른 속도로 방문을 빠져 나가는 걸 보면 미미는 로돌포한테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둘이 아리아 한번 씩 부르고 나니까 미미가 자기도 같이 밖에 데려가달라고 하며 로돌포를 껴안는다. 아까 전까지 로돌포한테 전혀 무관심해보인 미미가 갑자기 닭살 커플 행세를 하니 어안이 벙벙.
무리수는 2막에도 계속된다. 무제타가 왈츠를 부르며 마르첼로를 꼬드기는 장면. 이건 묘한 긴장감이 매력인데 무제타가 대놓고 마르첼로 옆에 앉아서 관심을 구걸한다. 심지어 왈츠 마지막에 속바지를 벗어서 마르첼로 머리 위에 떨어뜨린다. 연출가 양반이 밀당이라는 개념을 아예 상실하신 것 같다.
무대도 너무 재미없다. 2막 무대는 이동식 건물들이 흥미롭고 아름답지만 1,3,4막의 모습이 너무 황량하다. 그 황량함을 노리고 만든 거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극사실주의로 가는 거 아닙니가. 로돌포 집이 텅 비어있다는 건 알지만 진짜 텅 빈집을 보려고 오페라 하우스 가는 건 아니라고요ㅜㅜ 영국 평론들이 연출에 대해 전반적으로 악평인 게 이해가 된다.
그래도 이렇게 기름칠 잘되서 매끄럽게 돌아가는 기어 같은 퀄리티로 라 보엠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행복이구나라는 걸 느꼈다. 뭐 아주 대단한 명연일 것 까지도 없고, 자주 공연되지 않는 희귀 레퍼토리여야할 필요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이렇게 매끈하고 흠결없게 연주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물론 파파노의 반주는 단순히 흠집없음을 뛰어넘게 빛나는 존재였지만 말이다. 4막 마지막에 미미와 로돌포의 회상 대화는 아주 섬세한 피아니시모로 연주됐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느낀 점 하나는 객석이 정말로 조용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순간은 그런 환경에서 피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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