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바실리 페트렌코.


바실리 페트렌코와 제임스 에네스가 함께 왔다. 서울시향의 스케줄이 발표됐을 때부터 기대하던 공연이었다.


1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불안했다. 도입부에서 베이스가 들어오는 부분부터 삐끗했던 걸로 기억한다. 전반적으로 산만한 반주였다. 그에 반해 에네스의 연주는 아주 안정적이었다. 더 튀어보이거나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시도가 없이 탄탄한 기본기만으로도 청중을 사로잡았다. 이런 특징이 가장 돋보였던 것은 3악장이었다. 빠른 템포에도 흔들리지 않는 균질하고 깔끔한 스피카토는 감탄이 나올만큼 스릴 넘쳤다. 여기에 클라이막스로 다가갈 수록 휘몰아치는 페트렌코의 스타일이 맞붙으며 서로 상승 작용을 이뤄냈다. 페트렌코는 1악장에서도 순간적으로 템포를 당기며 협연자를 점화시켰다.

앵콜로 연주한 바흐의 두곡 역시 에네스의 단단한 테크닉 위에 만들어진 견실한 연주였다. 에네스의 안정된 소리는 바흐에 잘 어울렸고 안정된 테크닉 속에서 바흐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노래가 되었다.


2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페트렌코의 확신과 노하우가 담긴 연주였다. 페트렌코는 악보의 모든 음표들이 어떤 비율로, 어떤 아티큘레이션으로 연주돼야하는지 확신이 있었다. 금관악기의 어택 음색 역시 통일돼있었고 러시아 오케스트라를 연상케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사운드가 지저분하게 남지 않도록 통제했다. 

3년 전 어머니와 함께 도쿄에서 리버풀 필하모닉과의 공연을 보았었는데, 그 때 봄의 제전에서 보여주었던 컨트롤은 거의 신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귀공자 스타일 같은 이번의 머리 스타일과는 다르게 카리스마 넘치도록 뻗쳐나가는 짧은 머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팔이 거의 오징어를 보는 것 마냥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접신의 경지에 이르른 봄제 지휘를 보며 살로넨이 떠올랐는데, 실제로 살로넨에게서도 지휘를 배웠다고 한다. 

봄제만큼 복잡한 곡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페트렌코가 오케스트라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모습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의 몸짓은 어떤악기가 어떤 밸런스로 어떤 뉘앙스로 연주해야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줬다. 각각의 성부가 어떻게 직조돼있는지 관객에게 떠먹여주다시피 분명하고 쉽게 전달하는 것 역시 페트렌코의 탁월한 능력이었다. 

이전까지 라흐마니노프 2번이 탁월한 작품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딘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고 간혹 너무 센티멘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전체의 그림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실연으로 처음 들으면서 열심히 예습한 것이 10년 전이고, 그 뒤로도 기억나는 것만 최소 두번은 공연장에서 직접 들었으니 절대 적게 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페트렌코의 이번 연주만큼 곡의 구조가 선연하게 전달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페트렌코는 각각의 부분에서 무엇을 들려줘야할 지 분명한 결정을 내린 채로 이끌어나갔다. 2악장에서 대조되는 두 부분 사이를 이어주는 경과구를 아주 느리고 섬세하게 연주한 것 역시 그런 진행의 일환이었다. 분위기가 바뀌어야 할 지점을 짚어내는 점도 탁월하다. 1악장에서 비올라의 특징적인 리듬을 신호로 시작되는 변화 역시, 언제나 강렬하게 처리되기 마련이지만, 아주 분명하고 절도있게 들어갔다.

클라이막스를 만들어내는 능력 역시 탁월했다. 정상에 오를 수록 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없이 돌진하여 반박자 빨리 터뜨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라흐마니노프 2번의 투티가 이렇게 폭발적이고 시원할 수 있나 새롭게 다가왔다. 1악장과 4악장의 깔끔한 폭발은 듣는 사람에게 쾌감을 주었다. 4악장을 상당히 빠른 템포로 시작한 것 역시 전체 템포의 낙차를 크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3악장을 빼놓는 것 역시 서운할 일이다. 프레이징을 흐리지 않으면서도 항상 다음 프레이즈로 자연스럽게 연결 시키며, 언제나 다이나믹의 폭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탁월했다. 


본지 한달이나 지난 공연이지만 여전히 기억에 많이 남는다. 페트렌코가 어떻게 RLPO를 데리고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21세기 추천반을 연주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줬다. 그건 단순히 페트렌코가 러시아 음악의 적자여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작품을 뼛속까지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비교적 좁은 레퍼토리에 집중하는 이유도 그런 곡들만 잘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잘 연주하기 위해서는 깊은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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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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