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오즈와 오페라 코미크는 어울리는 걸까.
2016년 글라인드본의 새 프로덕션으로 올라왔던 작품이다. 그 해에 글라인드본에 가서 직접 공연을 봤던 때라 이 작품이 목록에 있었던 게 얼핏 기억이 난다.
베를리오즈가 남긴 작품 중에서 환상 교향곡을 제외하면 성악이 포함된 곡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레퀴엠을 비롯해서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이라던지, 거대한 스케일로도 유명한 트로이인, 그리고 한국에서도 공연된 파우스트의 겁벌 까지.
하지만 어째 이런 작품들에는 큰 애정이 가질 않았다. 레퀴엠의 경우 조르당과 빈 심포니의 공연에서 큰 감동을 받았지만, 트로이 인이나 파우스트의 겁벌과 친해지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두 공연 다 합창곡은 아주 인상적이다. 극적인 장면을 묘사할 때 나오는 관현악 반주도 훌륭하다. 겁벌 후반부에 말타고 가는 장면은 생생한 묘사가 살아있다.
문제는 아리아다. 베를리오즈가 쓰는 아리아는 무언가 정이 안 간다. 너무 나이브하달까, 예를 들어 겁벌에 나오는 툴레의 왕 아리아는 멜로디가 또렷이 기억나고 또 나름대로 즐기긴 하지만 탁월한 선율이냐고 하면 글쎄. 프랑스 식 멜랑콜리는 내 스타일이 아닌가 싶다.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을 원작으로 해서 베를리오즈가 직접 리브레토를 쓴 작품이다. 줄거리는 까칠남녀인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가 항상 서로를 조롱하고 까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츤데레 커플이라는 것이다. 1막에선 둘이 열심히 싸우고 2막에선 주위 사람들이 이 둘을 이어주기 위해 열심히 옆에서 바람을 넣는다. 두 주인공은 마지막 까지 츤츤대지만 결국 결혼한다. 두 주인공이 결혼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열변을 토하는 장면은 오늘날의 이야기와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이 재미있다.
셰익스피어 빠인 베를리오즈가 유일하게 남긴 셰익스피어 원작의 오페라다. 바덴바덴 카지노의 매니저였던 에두아르 베나제가 베를리오즈에게 이것저것 작품을 위촉하면서 30년 전쟁의 에피소드로 하나 오페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베를리오즈가 이전부터 생각해두던 이 헛소동을 원작으로 하는 오페라로 방향을 설득했다.
오페라 코미크이기 때문에 중간중간 대사가 꽤 나오는 편인데, 이 대사의 양이 상당히 많다. 사건의 대부분은 이 대사 파트를 이용해 진행되고 음악은 그 중간중간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이 점에서 일단 오페라의 재미가 한꺼풀 벗겨나간다. 음악과 함께 극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장면들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곡 수로 세어봐도 총 15곡이니 오페라 치고 곡이 별로 없는 편이기도 하다.
또한 오페라 코미크라 신나는 노래가 많을거라는 생각과 달리 서정적인 곡들이 꽤 많이, 그리고 꽤 길게 등장한다.
극 중에서 그닥 중요한 인물이 아닌 에로와 우르슬르의 듀엣이 10분간 이어진다. 둘이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를 어떻게 이어줄까 계획을 세운 뒤 사랑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유독 다른 노래보다 이 노래가 기억에 남는데, 일단 별로 메인 플롯과 관련이 적은 인물들이 메인 플롯과 별로 상관 없는 노래를 부르는데 비슷한 멜로디가 끝도 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베를리오즈의 느린 노래는 역시 나와 잘 안 맞는구나 라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베를리오즈가 어째서 이 부분을 강조했을까
중간에 유머러스한 장면으로 등장하는 이 "그로테스크한 축혼합창 - 죽어라 상냥한 신부여"는 마치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의 피아니스트처럼 평범한 음악가를 까는 듯한 음악이다. 음반에는 빠져있지만 실제론 음악가 역을 맡은 가수가 합창단이 노래하는 내내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는 게 웃음 포인트다. 신기하게도 베를리오즈의 합창은 아리아보다 훨씬 괜찮게 들린다.
믿고 보는 로랑 펠리가 연출을 맡았다. 연출이 깔끔하긴 하지만 작품의 단점을 가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본인은 프랑스 연출가로서 프랑스 작곡가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작으로한 프랑스어 오페라를 영국에서, 그것도 셰익스피어 기념해에 연출하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었다고 한다. 무채색 계통의 의상과 직육면체 상자로 작품을 표현해냈는데 다른 펠리의 연출에 비해 시각적으로 단아해보인다.
타이틀롤 베아트리스 역할을 맡은 스테파니 두스트락Stéphanie d'Oustrac 은 쿠렌치스의 티토 실연에서 보고 압도당한 가수였는데 이 공연에서도 가장 돋보인다. 대사가 많아 소화해야할 연기도 많은데 연기와 노래 모두 강렬하다. 베네딕트 역할의 폴 애플비Paul Appleby 역시 경쾌한 목소리로 음악을 잘 살렸다. 그 외에도 클라우디오 역의 필립 슬라이Philippe Sly나 우르술르 역의 카타리나 브라디치Katarina Bradic같이 이름이 익숙한 가수들이 있지만 워낙 노래 파트가 짧아서 특별한 인상을 받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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