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짜여진 예누파.

 

야나체크의 오페라는 여러모로 특별한 별미다. 상당히 오랜만에 감상하게 된 야나체크의 오페라인데 역시나 감동적이었다. 이전에 쓴 도이체 오퍼 예누파 공연의 후기나, 샤이보이가 이 테아트로 레알 공연을 보고 쓴 훌륭한 후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예누파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예누파는 사촌형제인 슈테바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하지만 슈테바는 술에 취해 사는 남자였고, 이를 마음에 들지 않아한 예누파의 계모(이자 슈테바의 작은어머니)인 코스텔니츠카가 슈테바가 1년 동안 술을 끊지 않는다면 예누파와 결혼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슈테바의 이부형제이자 예누파를 남몰래 좋아하는 라카는 예누파에게 구애하다가 칼로 예누파의 뺨을 베는 실수를 하며 예누파에게 사라지지 않을 흉터를 남긴다. 막이 바뀌고, 예누파는 슈테바의 사생아를 낳았다. 코스텔니츠카는 이 일을 극도의 비밀로 부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슈테바를 불러 예누파와 결혼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슈테바는 자신의 아이를 보고서도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며 예누파의 얼굴에 흉터가 생긴 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슈테바가 도망친 뒤 코스텔니츠카는 라카를 부른다. 라카는 여전히 예누파를 사랑하지만 슈테바의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겁하며 도저히 그 애를 키울 순 없다고 말한다. 코스텔니츠카는 라카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 애는 죽었다고 거짓말로 둘러댄다. 라카가 떠난 뒤 코스텔니츠카는 예누파의 미래를 위해 아이를 강가에 버리고 온다. 3막에서 예누파와 라카의 결혼식을 올리던 와중, 강이 녹아서 어린아이의 시신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예누파를 비난하지만 코스텔니츠카가 나서서 죄를 자백한다. 라카는 예누파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랑을 고백하며 예누파와 함께 사랑의 듀엣을 부르며 오페라가 끝난다.

 

예누파를 오래 전에 한번 본 적이 있어 줄거리나 인물 관계를 대충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페라가 시작된지 얼마 안돼서 잠깐 멈추고 가족 관계도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예누파와 약혼한 슈테바는 사촌 지간이고 예누파를 좋아하며 슈테바를 질투하는 라카는 슈테바의 이부 형제다(Half-brother를 이복형제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겐과 군터의 관계처럼 라카와 슈테바는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이부 형제다. 라카의 어머니가 라카를 낳은 뒤에 슈테바의 아버지와 결혼한 것). 예누파의 어머니인 코스텔니츠카는 예누파의 생모가 아니라 계모이다. 이렇게 족보가 꼬여있으니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하다. 이게 당시 체코에선 흔한 가계도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특별한 경우를 만들어 낸 건지 모르겠다.

이 복잡한 관계 때문에 인물들의 심리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다. 라카가 슈테바를 질투하는 것은 단순히 연적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가문의 적통으로서 이 방앗간을 빼앗긴 것에 대한 질투도 있을 테다. 라카는 비록 이 부리야 집안에 어머니와 함께 들어온 존재이지만 성은 친부의 성인 클레멘을 쓴다. 흥미롭게도 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등장하는 가족 이야기지만 등장인물 중 생부 생모가 살아있는 경우가 아예 없다. 예누파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죽었고 코스텔니츠카는 예누파의 계모일 뿐이다.

코스텔니츠카가 예누파의 생모가 아니라 계모라는 점은 코스텔니츠카의 행동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코스텔니츠카가 아이를 버리는 것은 오직 예누파가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계모임에도 예누파를 끔찍하게도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예누파의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기 더 쉬웠던 것일까?

 

야나체크의 음악은 민속적인 선율을 잘 활용하면서도 연극에 착 달라붙어있다. 이번에 들으면서 더 감탄했던 것은 야나체크의 오케스트레이션이다. 보통 목관악기가 현악기에 비해 보조적이거나 특정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 한 장면에서 한 악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단일 악기의 음색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야나체크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목관악기를 하나의 악기군으로써 다채롭게 활용한다. 어느 한 목관악기가 튀는 것보다는 한 프레이즈 안에서도 악기가 달라지지만 목관악기 전체로서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형태다. 이런 활용은 투티에서도 두드러지는데 메인 선율을 이끄는게 현악기가 아니라 목관악기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한번 기회가 될 때 악보를 펼쳐놓고 제대로 살펴보고 싶을 만큼 목관악기의 사용이 독특하다.

 

연출을 맡은 슈테판 브라운슈바이크Stéphane Braunschweig는 무대 디자인까지 맡았는데, 역시 무대 디자인을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풀어나가는 연출이었다. 대체로 미니멀한데 어두운 목재 재질의 무대가 인상적이다. 조명을 통해 예누파를 사각형의 밝은 공간에 가두는데, 코스텔니츠카가 아이를 버릴 때에는 무대위의 벽이 사라지면서 이 빛의 사각형이 무대 전체를 차지하게 뻗어나간다. 코스텔니츠카가 아이를 버리는 행동이 예누파에게 허락된 좁디 좁은 세계를 더 넓히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3막에선 벤치의 길이를 원근감에 맞춰 줄이는 방식을 통해 전체 무대가 깊어보이게 만들었는데,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합창단이 들어오며 무대 뒤의 벽이 십자가 모양으로 벌어지는 것은 압도적인 하이라이트였다.

가수진이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아만다 루크로포트Amanda Roocroft가 예누파를, 데보라 폴라스키Deborah Polaski가 코스텔니츠카를, 라미로슬라프 드보르스키Miroslav Dvorsky가 라카를, 니콜라이 슈코프Nikolai Schukoff가 슈테바를 맡았다. 라카와 슈테바가 잘 대비되는 것도 좋았고 코스텔니츠카의 카리스마도 역시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이버 볼튼의 지휘는 깔끔하게 잘 정리하면서도 생기가 넘친다. 극적으로 과장하는 경우는 없지만 작품의 흐름을 잘 이끌어나가는 모범적인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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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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