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토 클래식 C major 할인 구매의 세번째 작품은 라 스칼라의 아이다다. 메타의 지휘, 페터 슈타인의 연출로 아는 가수의 이름은 살미넨 뿐이었다. 메타 지휘의 아이다가 한글 자막 달려 나온 피렌체 영상물이 이미 있는데 또 다시 발매되었다니 조금 놀랐다.
아이다는 내가 처음으로 실제 관람한 오페라다. 내 기억이 맞다면 베세토 오페라단의 공연이었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쯤이었을 것 같은데 어머니에게 오페라가 보고 싶다고 졸라서 서울까지 가서 봤다. 당시 내가 아이다에서 아는 곡이라고는 개선행진곡 뿐이었고 (초등학교 애국조회 시간의 배경음악이었다) 우리집에 있는 씨디를 다 뒤져봐도 아이다의 곡은 라다메스의 1막 아리아 Celeste Aida 밖에 없었다. 그 한곡 마저도 예습을 제대로 안해갔나보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보자면 개선행진곡 장면에 흑인 분장이랍시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했고 한참을 졸다가 정신을 차리니 아이다와 라다메스가 갇혀서 죽어가고 있었다. 기억 나는 건 그 두개 뿐이다. 그 이후로 나는 베르디를 멀리했다.
아이다는 우리나라에서 나름 인기있는 오페라라 그 이후에도 서울시립오페라단의 세종공연 (아마도 2013년)과 대전예당 기획공연(역시 2013년)을 본적이 있다. 연출은 대전예당 쪽이 조금 더 나았다.
난 아이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쓰고 나니 내가 지금껏 쓴 후기 중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게 상당히 많을 것 같다. 아이다를 좋아하지 않는 첫번째 이유는 이게 이집트 배경이라서 그렇다. 당시 유럽인들이나 요즘 사람들에게나 큰 규모의 이집트 풍 무대를 보는 게 흥미로운 일인가보지만 나는 이집트에 전혀 흥미를 못느낀다. 이집트의 건축이나 복장이 너무 답답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영화 '미라' 같이 이집트 유적을 탐사하는 내용도 질색했다. 게임에서도 이집트 관련 문명은 전혀 선택하지 않았다. 미술사 시간에도 고대 이집트 미술은 싫었고 그리스 미술을 좋아했다. 아 난 정말로 뼛속까지 유럽 문명 추종자인가보다.
이것 때문에 아이다를 볼때면 항상 배경이 이집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너무 싫었다. 아 제발 뭐가 됐든 이집트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브레겐츠 아이다 배경이 이집트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그 영상물을 살까도 고민했다. 사실 나는 오페라에서 구식 복장을 보는 걸 싫어한다. 특히 지방색이 너무 강한 배경을 싫어한다. 같은 이유로 대놓고 중국스러운 투란도트와 너무 일본스러운 나비부인을 싫어한다. 오페라 덕질을 처음 시작할 때 바그너로 시작한 이유도 클 것 같다. 바그너 오페라 연출만큼 배경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장르가 어디있겠는가.
아이다를 싫어하는 두번째 이유는 내용이 너무 전형적이어서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아이다 정도면 꽤나 훌륭한 리브레토이긴 하지만 여전히 별로다. 이야기 진행의 개연성을 위해선 라다메스와 아이다의 사랑, 그리고 암네리스의 짝사랑이 절대적이어야한다. 막이 오르기 전에 이 셋의 관계는 이미 고정되어있다. 때문에 인물에 몰입이 잘 되지 않는다.
라 스칼라에서 제피렐리 이후 드디어 새 프로덕션을 내놨다. 페터 슈타인은 독일 연출가인데 잘츠부르크 돈 카를로를 연출한 걸 영상으로 봤다. 여전히 이집트스럽긴하지만 상당히 추상화되어있다. 무대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며 기하학적이다. 복장 역시 조금 독특한데 이집트의 복장은 약간 SF적 느낌도 나면서 여전히 이집트풍이다. 에티오피아 인물들에게는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들 처럼 입혀놨는데, 이집트의 황금 문명과 대비되는 효과를 만들었다. 아이다가 노래하는 '자유로운 내 조국의 하늘 아래'라는 가사가 유독 중요하게 다가왔는데, 에티오피아를 혹시 엄격한 위계질서가 없는 자연 문명처럼 묘사하려는 건가 싶었다. 4막의 공간을 어두침침하거나 모래 가득한 이집트가 아닌 새하얀 건물 내부로 바꿔놓아 세련돼 보였다.
음악은 상당히 놀랍다. 사실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없어 별 기대를 안했는데 라 스칼라 무대에 노래 못하는 성악가라는 것은 존재할 수 가 없는 것 같다.
라다메스 파비오 사르토리Fabio Sartori는 전형적인 이탈리안 스핀토-드라마티코 테너의 목소리인데 상당히 훌륭하다. 샘웰 탈리를 연상케하는 외모와 시선 고정도 제대로 안되는 연기가 조금 안타깝다.
아이다 역의 커스틴 루이스Kirstin Lewis도 안정적이고 훌륭한 가창을 보여준다. 다만 타이틀 롤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힘은 부족하고 가녀린 아이다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뭐 사실 아이다가 그 성격만 잘 보여줘도 충분히 훌륭하지..
암네리스 역의 아니타 라흐벨리쉬빌리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1,2막에서는 그냥 발성 안정적이고 두꺼운 목소리의 메조네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4막에서는 완전히 극을 휘어잡는다. 강렬한 노래는 기본에 완벽한 연기까지 선보인다. 노래를 끝마치고 오열할 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지루할 수 있는 4막을 긴장감 넘치게 해준다. 라 스칼라 관중들이 막이 끝나기 전에는 박수를 안치다가 이 노래가 끝나자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커튼콜에서도 가장 큰 환호를 받는다.
아모나스로 조지 가닛제는 돌같이 단단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와 이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의 바리톤이 있었다니. 약간 소리가 안에서 울리는 느낌인데 정말 매력적이다. 찾아보니 2013년에 엘레나 모숙과 함께 수지오페라단 리골레토에 출연했다고 한다.
람피스 역은 마티 살미넨! 2015년이면 70세인데... 그 괴물같은 목소리는 여전하지만 이제 완전히 꽉찬 소리를 기대할 순 없다. 하지만 람피스 정도라면 충분하다. 4막에서 라다메스의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의 카리스마는 압권이다.
어쩌면 가장 기대하지 않은 건 메타의 지휘일 거다. 난 메타가 이름에 비해 그렇게 대단한 지휘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영상을 본 지휘자가 주빈 메타였는데도 말이다! 빈필 말러2번 처럼 전설적인 음반도 있지만 은근 교향곡 쪽으로 알려진 음반이 없어서였을까. 투란도트 같은 오페라 명반을 들은건 편견이 너무 생긴 다음일지 모른다. 여튼 난 메타가 별볼일 없는 지휘자라고 생각했다. 발렌시아 반지에서도 오케스트라가 안정적이고 무거운 소리를 들려주지만 그건 그냥 오케스트라가 뛰어나서라고 생각했다. 메타에게서는 '번뜩이는 천재성' 같은 걸 기대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영상을 보면서 메타를 다시 보게 됐다. 1막 2막은 심심한 편이다. 특히 2막 같은 경우는 심하게 둥글둥글하다. 오케스트라가 내는 모든 음이 의도적으로 느슨하다. 포르테 코드를 하나 내도 동그랗다. 유럽 할아버지들 놀라지 말라고 이러는걸까 싶었다. 파파노 같은 지휘자들이 프레이즈 하나 음표 하나 공들인다면 메타는 그보다 한참 멀찍이서 오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1막 후반부의 신비한 합창은 효과가 잘 살았지만 박력이 거세된 2막 개선행진곡을 듣고 있으니 메타가 이제 그저 늙은 지휘자일 뿐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2막 피날레는 의외의 반전이었다. 분명 폭발시키는 힘은 없는데 뭔가 끓어오른다. 그 수많은 성부들이 차곡차곡 넘치지 않게 쌓여나갔다. 무대 위의 모든 소리가 하나의 음향체가 된다. 그 전까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내지르고 박살내고 몰아치는 것이었다면 메타는 전혀 다른 극단을 보여준다. 근데 이게 먹힌다. 몸이 굳고 완전히 집중하게 된다. 그래놓고는 3막의 아모나스로 장면들은 오케스트라를 칼같이 밀어붙인다.
아 메타는 이 공연을 암보로 지휘했다. 암보 지휘에 대단한 의미를 두는 걸 지양하는 편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페라를 암보로 지휘하다니. 앞으로 메타는 까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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