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구입해놓은 바그너 영상을 보는건 밀린 숙제를 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이 영상 역시 아마도 2013년 쯤에 구입했던 것 같은데 여태 보지 못했다.
르네 콜로와 귀네스 존스는 아마 '훌륭한 바그너 가수' 라는 것의 마지노선 쯤 되지 않을까. 물론 두 가수 역시 1950년대 이전의 전설들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이 둘은 그래도 영상물 세대라는 걸 감안하자. 1993년이라면 바그너 애호가들은 이미 포기한 시대이지만 나한텐 꽤나 오래된 기록이다.
이 영상은 도이체 오퍼의 일본 투어 때 촬영한 것이다. 유럽 오페라 극장이 통째로 찾아와 공연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는 우리나라 입장에선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다. 막이 끝날 때 터져나오는 '사무라이 브라보'에서 이 영상을 일본에서 찍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두 가수의 명성이 워낙 뛰어나지만 이미 나이가 한참 든 다음이라 사실 내용은 썩 훌륭하지 않다. 르네 콜로는 이전에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귀네스 존스는 예전의 기억에 비했을 때 상당히 실망이었다. 귀네스 존스는 비브라토의 폭이 너무 크고 고음은 프레이징 없이 너무 세게 내지르기만 한다. 거기다 딕션도 깔끔하지 못하다. 발음이 이상한 건 아니지만 명확하게 해주지 않는 느낌이다. 안타깝게도 가끔 음정이 나가거나 삑사리가 나기도 한다. 르네 콜로의 딕션은 낫지만 전체적으로 귀네스 존스의 단점을 비슷하게 보여준다. 느린 패시지에서 비브라토의 폭이 너무 커 바보같이 들려 과연 이 목소리를 헬덴 테너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케한다. 두 사람 다 이란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격앙되서 노래하는 부분은 괜찮지만 1막에 나오는 대화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르네 콜로의 경우 3막에서 쉼표가 있는 대사를 할 때 쉼표에서 맥이 탁탁 풀려서 감정 전달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오히려 가장 빛나는 것은 마르케 왕의 로버트 로이드다. 귀네스 존스의 발음이 안 좋은 게 영국인의 한계인가 싶었지만 로버트 로이드의 딕션을 들어보면 그건 아니구나 알 수 있다. 2막 독백과 3막 독백에서 깊은 발성으로 절제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감정 표현을 들려준다.
한나 슈바르츠의 브랑게네는 날카롭긴 하지만 별로 인상깊지 않다. 반대로 게르트 펠트호프Gerd Feldhoff의 쿠르베날은 상당히 흥미롭다. 연출의 일부겠지만 쿠르베날을 충직한 부관이 아니라 어딘가 부족한 무식한 부하로 묘사한다. 3막에서 노래하는 장면은 투박하기 짝이 없으며 첫 자음 D발음을 과장되게 하여 트리스탄의 상태에 대해 굉장히 흥분한 모습을 표현한다. 모습이나 표정 역시 기존의 쿠르베날에서 봐온 듬직함이 아니라 힘만 센 머슴, 혹은 노틀담의 곱추를 연상시키는 바보스러움이 묻어나온다. 때문에 '어리석은 저라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단순히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진짜 바보의 말이 되었다. 꽤나 설득력있는 해석인 게, 쿠르베날이 1막에서 브랑게네를 조롱하는 모습이나 3막에서 멜로트를 보고 흥분해서 덤벼드는 모습은 이성적이라고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괴츠 프리드리히의 연출 역시 상당히 기대했지만 확실히 요즘 연출 트렌드와는 확연히 다른 오래된 스타일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연출한 '시간 터널' 반지는 반지 연출을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부분이라 그의 바그너 연출이 많이 궁금했는데 요즘 연출에서 기대하는 번뜩이는 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입체적인 무대와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로 빌란트 바그너의 스타일의 연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연출의 경우 가수들의 연기가 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자연스럽게 커지게 되는데 주연 둘의 연기가 훌륭하다고 보긴 힘들다.
지휘 이지 코우트Jiří Kout는 약간 투박한 지휘를 보여준다. 앙상블의 세로선이 안맞을 때가 종종 등장하는데 도이체 오퍼 오케스트라의 한계도 보인다. 목관이 강조되어서 군데군데 투박한 느낌이 더욱 강조되는 지도 모르겠다. 극적으로 몰아치는데는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상이나 음악이나 오래 전 향수가 난다. 트리스탄 블루레이 중 유일하게 한글 자막이 달려있다는 점은 좋지만 사실 dvd와 비교해도 영상 퀄리티 차이는 별로 나지 않는다. 귀네스 존스와 르네 콜로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굳이 구입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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