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메를 처음 본 것은 2008년 국립오페라단의 공연 때였다.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공연의 질 문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작품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당시 나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살로메의 음악과 내용은 나에게 역겨운 존재였다. 그 뒤로 잘츠부르크 장미의 기사를 위해 예습하기 전까지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듣지 않았다. 살로메의 기억이 어지간히도 지독했나보다. 이제 그 인상을 청산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살로메의 음악이 두렵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렇게 두려웠던 음악이 이렇게 달콤하게 들릴 수 있구나 놀랍다. 살로메는 여느 슈트라우스 오페라 처럼 선율이 풍부하며 다채롭다. 극이 지루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는다.
살로메의 오묘함은 그녀가 욕망의 대상이자 주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가장 거침없이 드러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오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이한 인물이며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한 오페라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욕망한다는 점에서 다른 팜므 파탈 여성과 비슷할 수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광기는 아주 흥미롭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 덕택인지 감각적이고 묘사적인 대사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살로메가 요하난을 처음 만나 그의 신체를 갈구하는 장면에서 몸, 머리카락, 입술로 넘어갈 때 사용하는 묘사들이나 헤로데스가 살로메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장면들을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건 슈트라우스와 가수들의 숙제라 할 수 있겠다.
공연은 완성도 높다. 나댜 미하엘의 살로메는 폭발적인 드라마틱함은 보여주지 못하지만 살로메 특유의 관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가수 중 살로메를 이 정도로 자연스럽고 유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가수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특히나 몸을 많이 써야하는 이 작품에서 마치 발레리나를 보는 것 같은 그의 유연한 몸동작은 아주 훌륭하다.
요하난의 미하엘 폴레도 역시 훌륭하다. 노래, 딕션, 연기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관객을 몰입시킨다.
미하엘라 슈스터의 헤로디아스는 노래보다는 배경 연기가 더 탁월하다. 역시 악녀 연기가 얼굴과 몸에서 자연 발산하는 가수다. 나라보트 역은 최근 카프리치오나 로델린다에서 훌륭하게 평가했던 요셉 카이저가 맡았다. 나라보트에 대한 내 인상은 살로메를 갈구하는 변태 정도였는데 카이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살로메를 사랑하는 순정남으로 표현했다. 초반부터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들어주는 일등 공신 중 한명이다.
반면 헤로데스 역의 토마스 모저는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는 배역이다. 일단 독일어 발음이 나쁘다. 말하는듯 가사를 읊조려야하는 부분이 많은 알슈의 오페라에서는 독일어 딕션이 더더욱 잘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마치 독일어 발음을 대충 배운 사람이 문장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단어 끝에 나오는 r이나 ch, ig 같은 발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노래도 가장 답답하고 단조로운데, 너무 힘없고 바보같이 들린다. 헤로데스 역이 원래 그렇게 멍청해보여야 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살로메를 설득하겠다고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는 장면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지휘자 필리프 조르당은 역시 관능적인 선율을 잘 살릴 수 있는 지휘자다. 글라인드본 카르멘이나 바덴바덴 탄호이저에서 인상깊게 들었었는데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예쁘고 야들야들한 오케스트라 소리에서 필요할 때 극적인 박력까지 보여줄 수 있는 지휘자다. 알슈의 까다로운 오케스트레이션을 질서정연하게 풀어나가되 선율이 가지고 있는 관능미를 잃지 않는다. 즐겁게 들을 수 있는 반주다.
살로메는 아마 맥비커의 대표작이자 가장 히트작이라 할 수 있다. 아주 선정적인 표지와는 달리 연출은 전반적으로 매우 정상적이다. 무대가 매우 사실적이기 때문에 어두운 공포를 자극하진 않는다. 일곱 베일의 춤을 헤로데스와 살로메의 개인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상당히 훌륭하다. '성상납'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장면을 노골적으로 전달하되 시각적으로는 절제했다. 요하난의 머리를 가져오는 장면은 프로덕션의 하이라이트로 나체의 망나니가 보여주는 육체적인 관능과 요하난의 머리, 그를 끌어안는 살로메의 모습이 합쳐지면서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하다.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를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있을법한 일 처럼 표현한 것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아울로스 미디어에서 박종호 시리즈로 1dvd로 발매해서 그런지 맥비커의 코멘터리가 짤려있다.
연출과 음악 모두 뛰어난 공연으로 21세기 살로메의 훌륭한 전범으로 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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