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 헨릭이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두 사람 앞에서 가면무도회의 가치를 찬양하는 장면
서울시향 닐센 교향곡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 예습을 위해 닐센 오페라를 봤다. 대전시향 류명우 전임지휘자가 2009년 부지휘자 오디션 공연 때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 1악장을 지휘하기 전, 작곡가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작곡가가 쓴 오페라를 공부하는 것이다 라는 내용의 설명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페라 안에서는 다채로운 장면을 그려내야하기에 작곡가의 스펙트럼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 가면무도회라고 하면 베르디의 Un ballo in maschera 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닐센의 오페라에서는 베르디의 것에서보다 가면무도회가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오페라의 제목을 가면무도회 말고 다른 것으로 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페라의 시작부터 끝까지가 모두 가면무도회에 관련된 이야기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보겠다. 남자 주인공이 가면무도회에 갔다가 여자 주인공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이 남주에게는 아버지가 정해준 신붓감이 있다는 것이다. 남주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걸 안 아버지는 분노하여 가면무도회이 못가도록 남주를 집에서 못나가게 감시한다. 결국 남주는 탈출해서 가면무도회에 가 자신의 연인을 만나는데, 가면무도회가 끝나고 보니 사실 자신이 사랑한 여주가 곧 자신의 아버지가 정해준 신붓감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가면무도회에서 서로를 속인다는 점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가 생각나기도 하고 부모가 자식의 결혼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2막의 시작과 끝에 야경꾼이 등장하는 것은 명가수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이는데, 닐센이 바그너의 음악을 싫어했다고 하니 아이러니다.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전면으로 내세운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 예로니무스의 1막 아리아는 기성 세대의 꼰대스러움이 잘 나타나있다.
리브레토는 클래식 팬들에게는 친숙한 노르웨이인 홀베르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대본가의 성도 안데르센이라 괜히 더 믿음이 간다. 무엇보다 리브레토의 유머 감각하나는 최고다. 남자 주인공 레안더의 어머니가 자신도 춤추고 싶다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부분이나, 레안더가 아버지 예로니무스에게 사실을 말하기 꺼려할 때 하인인 헨릭이 능청스럽게 다 털어놓는 장면부터 소소한 재미가 있다. 자기 아들딸들이 가면무도회에 가서 생판 모르는 다른 이성에게 반했다는 걸 알고 두 아버지가 만나 사죄하는 장면, 예로니무스가 레안더에게 각서를 받아쓰게 하는 장면도 웃음이 터진다.
닐센은 멘델스존이나 베르디를 연상시키는 비교적 단조롭고 고전적인 리듬을 활용하지만 목금관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극의 진행에 어울리는 독특한 효과음을 흥미롭게 활용한다. 음악은 1막과 2,3막에서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막에서는 시종일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진행을 보여주지만 2,3막의 음악은 오페레타를 연상케 할만큼 단조롭다. 장면 전환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 1막의 신선한 음악들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이 공연은 극장, 지휘자, 연출가, 그리고 가수의 대부분이 덴마크 출신인 순도높은 덴마크 프로덕션이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닐센의 대표 오페라를 상연하는데 이것보다 더 적격인 조합을 상상하기 힘들다.
연출가 카스퍼 홀텐은 이런 종류의 극에 제격인 사람이다. 홀텐은 바그너 오페라를 연출해도 웃음을 만들어냈던 연출가다. 안 그래도 시종일관 유머 포인트가 끊이지 않는 작품을 더욱 장난기 넘치게 만들었다. 전체 이야기를 현대로 옮겨 놓으면서도 추상적이지 않고 항상 사실적인 묘사를 지향한다. 원래 극은 프랑스 혁명 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홀텐의 가장 대담한 시도는 바로 가면무도회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즉,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가면을 쓰고 다니다가 무도회에 와서야만 가면을 벗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다니는지, 또 언제야 그런 가면을 벗어버리고 솔직해지는지에 대한 훌륭한 통찰이 돋보이는 연출이다.
지휘 미하엘 쇤반트는 홀텐과 함께 코펜하겐 반지와 탄호이저에서 코페하겐 극장의 역량을 부족함 없이 보여주었다. 다른 작품도 아니고 닐센인데 그의 해석에 굳이 가타부타할 것도 없다. 유쾌발랄한 이 오페라를 진심으로 잘 살려냈다. 얼마나 이 작품을 애정해 마지 않는지 카메라에도 그의 할아버지 미소가 자주 잡힌다.
가수들 역시 덴마크의 자존심을 세워준다. 이제는 바그너 베이스로는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이 된 스테판 밀링과 한 때 바렌보임 지휘로 바그너 테너로 자주 나왔던 폴 엘밍이 등장한다. 코펜하겐 반지에서 라인골트 보탄으로 등장했던 요한 로이터가 헨릭 역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다만 코펜하겐 하우스 특유의 난잡한 카메라워크는 짜증이 난다. 샷 교체가 너무 잦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왜 그리 많비이 춰주는지. 그냥 관현악 반주 파트가 아니라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면에서도 짤막하게 오케스트라 단원을 잡아준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재미 없으면 모를까, 이건 무대가 재미있기로 둘째가면 서러울 홀텐의 연출이란 말이다.
작품 자체는 20세기 초 후기 낭만주의의 뛰어난 희극 오페라를 논한다면 빼놓기 아쉬운 작품이다. 덴마크어가 아니라 독일어였다면 더 나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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