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후기


'나쁜 오케스트라는 없다. 나쁜 지휘자만 있을 뿐이다'란 격언을 그대로 보여준 대전시향 역대 최고의 공연이었다.

마티아스 바메르트는 내가 지금껏 봐온 대전시향이 초청한 지휘자 중 가장 유명한 편이 아닌가 싶다. 샨도스에서 냈던 음반들도 훌륭하고 서울시향과의 공연도 만족스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시향에 와서 연주했던 곡이나 음반 작업을 했던 걸 생각하면 바메르트의 전문 분야는 고전파 관현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프로코피에프를 메인 프로그램으로 가져왔다. 특히 2부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휘자 본인이 추려낸 모음곡으로 연주했다.


1부 도둑까치는 비교적 무난하였지만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좀 끔찍했다. 협연자 장 루이 스토이어만(불어식 이름에 독일어식 성이라니)의 프로필은 화려했지만 나이를 속일 순 없었나보다. 계속 나오는 미스터치, 깔끔하지 못한 스케일, 불안정한 템포. 듣는 내내 이러다 멈추는 것은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앵콜로는 골드베르크 아리아를 쳤는데 기묘한 해석이었다. 템포를 비교적 빠르게 가져가는데 프레이징이 끊어질듯 아닌듯 약간은 뒤뚱거리면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곡에서도 건반 컨트롤이 연주자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은 부분이 있었다. 필립스에서 바흐 음반도 냈었던데 협주곡도 아예 바흐나 모차르트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았다.


하지만 2부 로미오와 줄리엣은 놀라운 반전을 보여줬다. 첫 곡 몬테규와 캐퓰렛의 시작 화음이 쌓여가는 장면에서부터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바메르트는 절제된 동작으로 침착하게 곡을 이끌어나갔고 대전시향은 그에 맞춰서 철저하게 제어된 연주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 곡이 워낙 유명하고 또 미친듯이 밀어붙이는 연주들이 많아 아쉬움이 안 남긴 어려웠다. 금관이나 색소폰이 나올 때 템포가 흔들려 살짝 불안한 모습도 있었다.

오히려 첫번째 곡을 지나서 점점 실력을 발휘하는 느낌이었다. 아침의 노래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상큼한 음색을 내주었는데 각 파트별로 훌륭한 다이나믹과 아티큘레이션 조절이 있지 않는한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린 줄리엣에서 악기군끼리 주고 받는 것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정경에서 바순의 아티큘레이션은 살짝 과장한듯 확실하게 표현해주었기에 곡에 생기가 느껴질 수 있었다. 아침의 춤에서는 오케스트라의 다이나믹 표현이 훌륭하게 빛을 발하는 장면이었다. 금관 주도의 투티에서는 박력을 보여주고 바이올린과 첼로가 주고받는 부분은 사람을 흡입시키는 피아노를 보여줬다. 7곡 춤(모음곡 2번 4곡)에서는 목관악기가 또 실력발휘를 해주었다. 

모음곡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티볼트의 죽음은 몬테규와 캐퓰렛에 비해서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다. 결투 장면의 현악기 앙상블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대전시향 바이올린이 이렇게 합치된 날 선 소리를 낼 수 있구나라는걸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티볼트가 죽고나서 장송곡이 흘러나오는 장면에서의 호른은 정말로 장엄한 소리를 내주었으며 모티브의 짧은 스타카토 아티큘레이션은 시종일관 제어됐다. 트럼펫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이나믹이 확실하게 한단계 올라가 힘을 잃지 않고 곡의 긴장감을 끌어올린 것도 뛰어났다. 


그 뒤로 서정적인 세곡을 연달아 배치한 것도 좋은 선곡이었다. 이별 장면에서 비올라 솔로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모든 오케스트라가 어느 선율 하나라도 표정 없이 밋밋하게 연주하지 않았다. 


앵콜로는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을 연주했는데, 큰 기대 없이 듣고 있었는데 재현부에서 첼로가 2주제 선율을 연주할때 피아니시모로 처리한 것은 환상적인 트릭이었다. 그 다이내믹 안에서 선율을 살려내기 어려웠을텐데 단원들도 훌륭히 해냈다.


아마 이 레퍼토리로 교향악축제에 갔다면 최고의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악단이 이렇게 세밀하고 풍부한 표정의 음악을 할 수 있다니. 거기다 대전시향의 각 파트들은 테크닉적으로도 아주 훌륭하게 지휘자의 해석을 구현해냈다.


대전시향의 차기 상임으로 이 정도의 지휘자가 와준다면 대전시향 공연이 진심으로 기대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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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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