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올 것이 왔다.


작년에 부활절 페스티벌에서 카우프만과 틸레만이 카발/팔리를 한다고 할 때부터 기대했던 타이틀이다. 한창 바쁠 때였지만 발매가 되자마자 구입해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카발/팔리 영상물의 발매를 애타게 기다렸던 이유 중 하나는 작품 자체가 오페라 수업에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전막을 보는 게 부담스럽지 않은 길이,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 전개, 감정이 폭발하는 아리아까지. 오페라 입문에는 더할 것 없이 좋은 작품이다. 다만 여태 괜찮은 영상물이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처음으로 한글 자막 달려 나온 취리히 오페라 공연은 거의 재앙급이다.


사실 걱정했던 것은 틸레만의 지휘였다. 최근 들어서 틸레만에 점점 호의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난 틸레만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인과의 대화에서 깨달은 건데, 틸레만이 자주 쓰는 가수진도 싫어한다. 플레밍이라든지, 도멘이라든지, 볼프강 코흐라든지 말이다. 그래도 자주 듣게되면서 틸레만 스타일에도 슬슬 정을 붙이는 것 같다. 


틸레만과 베리스모는 대척점에 있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래도 그의 베토벤을 듣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흔히 베리스모 하면 떠오르는 거칠고 폭력적인 음향은 등장하지 않는다. 틸레만은 베리스모 오페라에서도 특유의 야리꾸리한 음색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음색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은근히 잘 어울린다는 점에 놀랐다. 처음 전주곡에서부터 가녀린 선율선을 잘 살려내는데, 혹시 틸레만의 그 느끼한 감각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바로 이 오페라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취향의 차이가 있겠지만 틸레만이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가지고 높은 수준의 치밀한 음악을 만드는 믿을만한 오페라 지휘자라는 건 이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카발레리아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산투차 역의 류드밀라 모나스트리스카Lyudmila Monastryska(아마 실제 발음은 마나스트리스카에 가까울 것 같다)였다. 파파노 맥베스에서 레이디를 훌륭하게 소화해내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거의 산투차의 화신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독기를 품은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 완벽하게 보여준다. 눈을 뗄 수 없는, 숨 막히게 하는 등의 수식어는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한 것이다. 투리두와 듀엣을 하는 장면에서는 카우프만도 잡아먹을 기세다. 사실 카우프만의 연기도 살짝 어색해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 산투차에게 막대하는 게 보통인 투리두인데 이 투리두는 산투차 앞에서 좀 쫀 것 같다. 투리두가 떠나고 그를 저주하는 장면에서는 진짜 영화배우도 울고갈 눈빛을 보여준다.


알피오 역을 맡은 암브로조 마에스트리Ambrogio Maestri는 팔스타프 장인으로 유명한 바리톤이다. 덩치는 크지만 알피오를 맡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말끔하지 않나 싶다. 

루치아 역 가수는 노래와 연기 모두 어색하다. 롤라는 연기를 잘 하니 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카우프만은 산투차와 다투는 장면에서는 조금 절제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Mamma quel vino è generoso 에서는 완전히 폭발시킨다. 정말로 훌륭한 대목이다. 


팔리아치는 이에 비해 살짝 아쉽다.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준 모나스트리스카가 빠졌고, 실비오 역이 연기와 노래가 아쉽다. 상의 탈의만 안 했어도 좀 더 나았을텐데. 연출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비하면 아쉬운 느낌이다. 

카니오 역의 플라타니스Dimitri Platanais는 알피오 역의 마에스트리와 달리 사악함이 넘쳐나는 바리톤이다. 첫 프롤로고부터 괜찮은 노래를 들려준다.

다 역의 마리아 아그레스타Maria Agresta는 아리아와 듀엣을 안정된 목소리로 잘 소화해낸다.


카우프만은 내가 기대했던 그런 완벽한 토니오를 보여준다. 처음 Un tal gioco, credetemi 에서부터 무대를 휘어잡는다. 하이라이트인 Recitar - Vesti la giubba에서는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마지막 대사인 La comedia è finita 에서도 sarcasm을 드러내 극을 훌륭하게 끝맺는다.


필립 슈퇼츨Stöltzl은 원래 영화 감독인데 최근 오페라 연출도 맡아 영상물이 몇개 출시되었다. 바렌보임이 지휘를 맡은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일 트로바토레는 상당히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대단하다'라는 말이 나올 만한 작품을 선보였다. 잘츠부르크 축제 대극장의 길쪽한 무대를 잘 활용해서 6개의 화면으로 쪼갠 후, 이를 영화의 장면전환 처럼 활용했다. 때문에 보통 무대가 별로 바뀌지 않는 두 오페라에서 끊임없이 공간적 배경을 바꿈으로써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산투차와 투리두 사이에 애가 있다든가, 투리두의 어머니 루치아가 돈 놀이를 하는 수전노라는 점은 투리두의 아리아 Mamma quel vino è generoso를 더욱 설득력있게 만든다. 


카우프만, 모나스트리스카, 틸레만, 슈퇼츨 모두 훌륭하다. 특히 카발레리아의 몇몇 순간은 내가 오페라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 전까지 내가 누군가에게 오페라를 추천해준다면 1순위로 꼽는 영상이 2004 잘츠부르크 라 트라비아타였는데, 이제 이 타이틀을 추천해야할 지 고민할 것 같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