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극장은 과연 벨리니의 리브레토도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
오퍼 슈투트가르트의 몽유병 여인 공연은 독일의 오페라 전문지 Opernwelt에서 2012년 올해의 프로덕션으로 선정되었으며 아미나 역의 아나 두를로브스키Ana Durlovski는 올해의 젊은 가수, 연출가 요시 빌러Jossi Wieler와 세르조 모라비토Sergio Morabito 콤비는 올해의 연출가, 슈투트가르트 국립오페라합창단은 올해의 오페라 합창단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평단의 엄청난 호평을 받았기에 그 다음해인 2013년도 공연이 영상으로 발매되지 않았나 싶다.
유명도 대비 내가 가장 멀리하는 작곡가가 벨리니다. 벨칸토 삼총사 중 로시니와 도니체티는 부파로 맛을 들였지만 벨리니는 여전히 내게 어려운 존재다. 그나마 작년에 노르마와 몽유병 여인을 한 번씩 영상으로 본 것이 다였다. 때문에 웬만한 벨리니 영상물이 나온다면 그냥 재꼈겠지만, 오펀벨트에서 상을 휩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속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마침 유로 아트 땡처리 할인에 있길래 주저없이 샀다.
몽유병 여인의 이야기는 참으로 허술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미나를 질투하는 리사, 결혼 상대를 하룻밤만에 바꾸는 엘비노, 괜히 마을에 돌아와선 아미나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나중에야 수습하는 로돌포 백작,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겠다는 엘비노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 아미나까지, 어느 인물 하나 건전해보이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엘비노와 아미나의 사랑이 너무나 간략하게 묘사되고 둘 간의 갈등이 1막 중간부터 시작되는 점이 큰 것 같다. 내가 처음 봤을 때 엘비노의 인상은 핑커톤에 버금가는 악역이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비극에서 끝이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는 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들에게도 종종했던 말이지만 아미나가 자결하고 뒤늦게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엘비노가 오열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거다.
때문에 영상에서 가장 기대한 바는 이 리브레토를 연출진이 어떻게 구원해낼 것인가였다. 빌러와 모라비토 콤비는 슈투트가르트 반지 사이클 중 라인골트를 맡았기에 기억하고 있다. 슈투트가르트 반지 중 콘비츠니의 신들의 황혼 다음으로 높게 평가하고 싶은게 이 두 콤비의 라인골트다. 여러 인물이 설켜 있는 라인골트의 파워 게임을 무대 한번 바꾸지 않고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다. 다시 찾아보니 라인골트가 아니라 지크프리트를 맡았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몽유병 여인은 상당히 괜찮은 아이디어들로 무장했다. 무대를 야외 배경이 아닌 실내로 바꿨기에 좀 더 섬세하고 은밀한 감정들이 잘 나타나게 만들었다. 또한 이 배경이 리사의 건물로 표현되기에 리사의 극 중에서 더 무게감있어진다는 것도 좋다. 엘비노는 처음 등장부터 다른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바람둥이 캐릭터를 보여준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로돌포 백작의 특성을 살려낸 것이다. 사실 로돌포의 등장은 얼핏 보기에 상당히 뜬금없고 이야기와 따로 노는 느낌이다. 극 전체 구성으로 보았을 때 로돌포라는 인물은 아미나가 어쩌다 들어간 침실의 주인으로서의 역할만 중요할 뿐이다. 아미나가 엘비노를 버리고 선택할 만큼 매력있어 보여야 하며, 나중에 아미나를 변호할 때 명예를 걸고 말해야하므로 귀족이라는 속성이 덧입혀진 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신분을 숨기고 고향 땅에 들르게 된 옛 백작의 아들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이 백작을 환영한답시고 침실로 들어가게 만들기 위해서?
이 연출은 로돌포가 아미나를 보며 옛 연인을 떠올리는 걸 더 발전시킨다. 로돌포가 젊었을 때 이 마을에서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이 불미스런 일로 끝나서(아마도 여성의 임신) 로돌포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미나가 고아라는 점, 로돌포가 아미나를 보고 옛 연인을 떠올린다는 것으로 로돌포가 사랑했던 여인이 사실 아미나의 어머니였다고 표현한다. 때문에 유령이 등장한다는 마을사람들의 말 역시 다르게 해석해낸다. 보통은 이 유령이 몽유병에 걸린 아미나라고 해석하지만, 이 연출가들은 아미나 역시 '우리들 모두 다 봤다'라고 말하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곤 이 유령이 사실 아미나의 어머니이자 로돌포의 옛 연인이었던 것으로 해석해낸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텍스트를 훌륭히 분석해냈으며 이야기의 부족한 점을 훌륭히 보완해내는 연출이다. 추가로 엘비노와 리사의 결혼을 비웃는 합창단의 연기 역시 살아있는 듯 자연스럽다. 마을 사람들이 백작에게 환영 인사를 하려고 잠입하는 것이 아니라 백작의 물건을 털려고 들어간다는 것 역시 과감하지만 흥미로운 해석이다. 이 마을이 상당히 음울하고 음흉한 곳이라는 걸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마치 요새 코지 판 투테가 해피엔딩이 아니듯 온갖 찝찝한 마음을 다 남기는 엔딩으로 표현된다.
음악적으론 아미나 역의 두를로브스키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다. 편안한 목소리에 화려한 콜로라투라를 갖추고 있다. 리사 역시 캐릭터를 잘 살려내고 노래도 뛰어나다. 엘비노 역의 루차노 보텔로가 고음에서 목소리가 불안정해 많이 아쉬운 편이다. 페로의 지휘, 오케스트라의 반주, 합창단 모두 완성도 높다. 카메라 촬영도 좋으며 녹음도 가수들을 근접 녹음하지 않아 실제 오페라 극장에서 듣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벨리니의 리브레토가 마음에 안 들어 손이 안가는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영상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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