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튼이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취임식에 맞추어 작곡한 오페라로, 2013년에 브리튼 탄생 100주년, 엘리자베스 2세 취임 60주년을 맞아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새 프로덕션으로 상연하였다. 브리튼의 오페라를 헌정 받은 사람이 생존해있다니, 살아있는 역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제목 글로리아나는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1세의 호칭 중 하나다. 엘리자베스 1세와 로버트 데브뢰 사이의 관계를 다뤘는데, 같은 소재로는 도니체티의 로베르토 데브뢰가 유명하다. 도니체티의 튜더 삼부작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에 비교할 순 없지만 로베르토 데브뢰가 픽션을 가미한 로맨스 사극이라면 글로리아나는 정통 사극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브리튼의 오페라에 묘하게 끌린다. 이탈리아 오페라 처럼 단순하지 않고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많으면서도 곳곳에 마음을 사로잡는 장면들이 있기 때문일까. 내게 적당한 정도의 자극과 편안함을 주는 작품이다. 대체로 편안함보다는 자극이 크지만. 오페라 별로 안보던 시절에 나사의 회전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을 일종의 컴플렉스로 극복하고 싶은 심리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브리튼 블루레이도 나름 착실하게 모은 편이다. 오푸스 아르테에서 루크레시아의 강간과 글로리아나를 발매했을 때, 브리튼 오페라에 아는 게 전혀 없는데도 보관함에 추가했던 기억이 난다. 둘 중 루크레시아를 먼저 사고 글로리아나는 한참 지난 지금에야 구입했는데, 글로리아나를 먼저 샀다면 브리튼을 좀더 일찍 파보았을 것 같다. 


글로리아나를 보면서 브리튼이 진실로 탁월한 오페라 작곡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브리튼 오페라의 특징은 음악 스타일의 다채로움이다. 나사의 회전에서는 실내악적인 음향을, 피터 그라임즈에서는 깨끗한 낭만-인상파의 느낌을,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발리 음악 등을 선보이는데 글로리아나에서는 튜더 시대 음악 양식을 차용한다. 극의 내용에 따라 형식을 바꾸는 점 역시 탁월하다. 로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루크레시아의 강간에서는 남녀 코러스를 각각 배역으로 등장시키는데, 글로리아나에서는 튜더 시대의 가면극 양식을 그대로 활용한다. 글로리아나 2막 3장에서는 왕궁의 무도회가 등장하는데, 이 고풍스러운 음악이 순식간에 브리튼의 어법으로 바뀌면서 분위기가 변하는 장면은 브리튼이 가지고 있는 팔레트의 폭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브람스가 음악사에서 가진 특별한 위치는 바로 처음으로 자기 이전 시대 모든 음악의 어법을 모두 활용했다는 것인데, 브리튼이 오페라에서 그런 인물이지 않을까 싶다.


글로리아나는 엘리자베트 여왕의 인간과 국왕으로서의 내적 갈등을 심도있게 다룬다. 그는 한 개인으로서 젊은 에식스 백작을 사랑한다. 하지만 국왕으로서 지켜야할 선이 있으며 국무총리 쯤에 해당하는 세실은 에식스 백작에 대한 총애를 거두라고 간언한다. 에식스 백작은 여왕이 자신에게 아일랜드 토벌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에 원한을 품는다. 여왕을 자극하기 위해 왕궁 무도회에 자신의 부인을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채로 데리고 간다. 이에 분노한 여왕은 에식스 백작 부인의 옷을 뺏어 입고 등장하여 에식스 백작을 조롱한다. 이렇게 에식스 백작의 기를 꺾어놓고 그에게 아일랜드 출정 명령을 내린다. 에식스 백작은 아일랜드 토벌에 실패한 채로 잉글랜드에 돌아오며 의회에 자신의 적들이 너무 많다고 징징댄다. 여왕이 에식스 백작을 물러나게 하자 세실이 와서 백작이 왕권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백작은 런던탑에 구금되고 사형선고를 받게된다. 백작부인과 백작 여동생의 탄원이 이어지지만 엘리자베스는 결국 사형 집행에 서명한다.


군주의 공과 사에서 오는 갈등, 여기에 여성 군주라는 특수성이 부여된 이야기다. 브리튼의 여느 오페라 처럼 엘리자베트와 백작의 갈등은 기존 오페라 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에식스 백작이 엘리자베트의 총애를 받고 싶어하는 것은 연인으로서의 정과 권력 욕구가 혼재된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에식스 백작을 대하는 것도 개인의 연정과 정치적 문제고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엘리자베트의 결정은 언제나 이중적이다. 에식스 백작의 부인을 한껏 모욕해놓고서는 곧바로 에식스에게 아일랜드 사건을 맡긴다거나, 인간적인 정으로 사형 집행을 거부하며 백작 부인을 위로하다가 에식스 백작의 여동생의 오만불손한 탄원을 듣고선 군주로서 단호하게 사형을 명령하는 식이다.


음악적으로도 훌륭한 부분이 많다. 1막 2장에서 부르는 듀엣도 아름답지만 에식스 백작의 류트 노래는 특히 16세기 영국 음악의 감성을 고스란히 살려낸다. 2막 1장의 가면극 역시 극의 진행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16세기의 모습을 담아내는 사극 장치라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합창 음악 역시 일품이다. 앞서 언급한 무도회 장면이나 마지막 탄원 장면 역시 음악적으로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마지막 엘리자베스의 독백 역시 연극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명장면으로 꼽을만 하다. 이 장면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실제 연설문을 따와 노래가 아닌 연극 대사로 말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객석에서 난 소리인지 무대 뒤편에서 난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여왕의 나라사랑 고백 뒤에 꽤 큰 환호성이 들린다. 


에식스 백작 역을 맡은 테너 토비 스펜스Toby Spence가 훌륭하다.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수잔 블록Susan Bullock은 프랑크푸르트 반지에서 브륀힐데를 맡았었는데, 그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별로 인상깊지 않다. 이외에 백작 부인 역의 파트리샤 바르동Patricia Bardon과 케이트 로열Kate Royal이 훌륭하지만 원채 배역 비중이 크질 않아서 조금 아쉽다. 합창단이 훌륭하고 지휘도 무난하다. 


연출은 꽤 흥미롭다. 사실 글로리아나 구입을 꺼려온 이유 중 하나가 표지에 나온 연출이 조금 구려보여서도 있는데, 괜찮은 아이디어에 무난한 디자인이다. 무대를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기념 초연 무대로 바꾸어놓아 액자식 구성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2막 1장의 극중극은 극중극중극이 되는 셈이다. 1953년의 사람들은 무대 양옆에서 끊임없이 무대 지시를 내린다. 크리슈토프 로이가 잘츠부르크에서 그림자 없는 여인을 그림자 없는 여인 녹음하는 장면으로 연출한 것을 연상시킨다. 오페라의 시작과 끝을 엘리자베스 2세 대역의 입장과 꽃다발 전달로 만든 것 역시 재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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