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상이다. 보고싶은 블루레이가 많지만 수지 오페라단 가면무도회 공연이 다가오니 가면무도회를 먼저 보기로 했다.
파바로티와 카티아 리차렐리, 루이 퀼리코, 주디스 블레겐이 주역을 맡고 주세페 파타네가 지휘를 맡았다.
전설적인 오페라 가수들의 광휘를 잃어버린 시대의 영상물만 보고 지내왔는지라 기대반 무덤덤 반으로 보았다. 1950년대 바그너 처럼 괴수들이 포진해있던 시대도 아니고 80년대면야 뭐 요즘 가수랑 넘사벽 차이도 아니지 않을까, 요즘 가수들은 실력이 없다 같은 거 다 요즘 꼰대들이나 하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다분히 삐딱한 태도가 있었던 건 인정하고 시작해야겠다.
파바로티는 역시나 훌륭하다. 확실히 파바로티의 음색은 다른 가수들을 압도하는 깡패같은 무기라 할 수 있다. 특히 고음 에서 생겨나는 미묘한 음색변화는 굉장히 특징적이다. 파바로티 노래야 음반에서 많이 들었지만 영상으로 오페라 전체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생각보다 연기가 굉장히 훌륭한 편이라 놀랐다. 무엇보다 시선 고정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하는 가수다. 애초에 노래 부를 때 복잡한 동선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지휘자를 쳐다보느라 시선을 돌리는 어색한 행동은 전혀 없다. 노래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 때문일지, 아니면 지휘자가 알아서 파바로티느님에게 모두 맞춰야하니 그런 거일지는 모르겠다.
리차렐리의 영상 모습도 아마 처음보는 것일텐데, 그간 영상물에서 봐온 다른 소프라노의 아쉬움을 완벽히 달래준다. 따뜻함과 힘을 겸비하고 있는 안정적인 발성에 시원한 고음까지 부족한 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바리톤 루이 퀼리코는 그다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 정도 해주는 바리톤은 요즘에도 여럿 있지 않나.
오스카도 훌륭하지만 두 배신자 역 가수가 꽤 인상적이었다. 특히 2막에서 레나토와 아멜리아를 비웃는 노래는 상당히 맛깔나게 처리했다.
반주를 맡은 파타네는 약간 이상했다. 템포가 너무 빨라 무게감 없이 휙 지나간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고 전반적으로 가볍게 쓸고 지나간다는 느낌이었다. 가수의 템포 변화에 약간 뒤늦게 따라가는 장면도 조금 나왔다. 별로 좋은 점수를 주고싶진 않다.
연출은 과거 국립오페라단 돈 카를로의 연출을 한 바 있는 엘라이저 모신스키가 맡았다. 무대 구성이라든가 연기 동선이라든가 딱히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았는데 그닥 효과적인 것 같지는 않다. 노래를 부를 때 동선이나 위치도 단순하며 변화가 없다.
카메라 감독은 악명 높은 브라이언 라지가 맡았다. 생각해보니 라지의 대표작인 불레즈-셰로 반지를 촬영한 것이 1980년이었다. 이 영상을 보면서 라지가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시대적인 특징에 기인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요즘 카메라에 비해 화질이 떨어지는 카메라로는 화면에 가수 얼굴만 클로즈업해야 겨우 가수들의 표정이 보인다. 이 부분에서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에서 TV와 영화의 차이였나, TV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화질 때문에 인물의 얼굴 중심으로만 화면이 구성되며 이것이 곧 TV라는 미디어의 특징과 연결된다고 지적한다. 가수들 클로즈업 위주의 구성, 열악한 카메라 위치와 같은 라지의 특징들도 확실히 이런 한계 때문에 생긴 것들로 보인다. 저 시대에는 나름 최선이었겠지. 하지만 이제 제발 은퇴 좀... 제발 잘츠부르크를 살
메트의 희한한 박수 관습을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있는데 무대가 등장한다고 박수 한번, 파바로티가 등장할 때 또 한번. 리차렐리가 등장할 때도 박수가 나온다. 무대의 경우 딱히 박수를 받을만한 퀄리티도 아닌 것 같은데..
파바로티와 리차렐리의 노래가 아주 훌륭하고 다른 가수들도 뛰어나지만 지휘가 아쉽다. 어차피 연출과 영상을 기대하고 본 것은 아니니 그 점은 딱히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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