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아마도 있음. 

영화에 대해 길게 이야기해봤자 결국 부족한 밑천만 드러내는 일이라 좋아하진 않지만 이번엔 길게 써야할 것만 같았다. 

개봉 첫날 일반관에서보고 그 다음주에 용산 아이맥스에서 보았다.


사진 출처: http://oxfordstudent.com/2017/07/24/review-dunkirk/


20일 목요일 아침 7시 30분, 고대하던 덩케르크의 개봉을 맞아 영화관에 다녀왔다. 인터스텔라 이후 덩케르크의 예고편이 조금씩 나올 때마다 정보를 찾아보며 기다려왔다. 인터스텔라는 개봉날 큰 아이맥스로 보겠다고 울산 까지 다녀왔다. 덕분에 국립오페라단 오텔로를 놓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스로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하나 열심히 챙겨보는 게 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다. 유일하게 필모그래피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본 감독이다. 친구들이 다크나이트를 보러가자고 할 때, 히어로물은 관심없다며 몇번 튕겼지만 영화를 보면서 거의 기절할 것 처럼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내가 고등학교 때 메멘토를 보고 충격에 빠져 열심히 찾아봤던 감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고 놀란의 작품이 언제나 다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초기작 중에 미행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프레스티지는 공돌이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반전이 너무 싫었고 인썸니아는 알 파치노가 나오는데도 썩 재밌게 보지 않았다. 대관령에 쳐박혀 인턴을 하면서 제일 아쉬웠던 게 바로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못 보는 것이었는데, 정작 산에서 내려와 극장으로 달려가니 실망밖에 남지 않았다.

기대를 한껏 품었지만 덩케르크도 조금 아쉬운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쟁영화이기에 플롯이 어느 정도 고정될 수밖에 없으며 비현실적인 개념이 이야기에 들어갈 틈이 없는 배경은 놀란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1.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인가.

덩케르크의 이야기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재난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전쟁영화가 결국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볼 때, 사람을 (거의) 죽이지 않는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고 부를만한 구석이 별로 없는 편이다. 이 영화에서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 주인공을 덮칠지 모르는 적군의 공격이다.

이 작품을 '독특한 전쟁영화'라고 본다면 이상한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이 서사가 실종돼있다던가, 전쟁영화다운 클라이막스가 없다는 평이 그렇다. 집에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고전적인 서사 구조의 하나이며, 전쟁영화 다운 클라이막스가 없다는 건 <투모로우>나 그래비티에서 주인공이 속 시원하게 재난을 쓰러뜨리길 기대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개인적으로 재난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다. 잘 만든 재난영화란 무엇일까. <투모로우>나, <2012>, 혹은 <우주 전쟁> 등의 차이가 뭐란 말인가. 탈출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누군가는 죽어나가고, 어쨋든 생고생 끝에 주인공은 살아남는 것에 어떤 위대함이나 신선함이 담길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비슷한 영화 중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것이 <그래비티>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그래비티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은데, 덩케르크를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하는 것보다 <그래비티>와 비교하는 것이 훨씬 적합하다.


전쟁영화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다면 스핏파이어 전투기 조종사의 이야기일 테다. 하지만 놀란은 이런 액션에 여전히 젬병인 것 같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찍은 스핏파이어의 우아한 활공은 인상적이지만 일단 재미가 없다. CG를 안쓰겠다는 놀란의 고집 덕택에 관객은 주인공의 비행기가 꼬리를 잡혔다는 사실 조차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게 된다. 교전 중 카메라의 시선은 스핏파이어와 조종사의 시선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1인칭에 대한 고집은 영화 내내 드러나지만 과연 그게 전투 장면에 효과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차라리 스핏파이어와 당시 공중전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더 재밌지 않을까. 공중전에서 가장 긴장감 있는 건 연료가 떨어져가고 있다는 것밖에 없었다.

이 공중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상당히 갈리는 것 같다. 평들을 찾아보았을 때 오히려 2차대전의 공중전과 스핏파이어 기체를 잘 아는 사람일 수록 과장없이 사실적인 묘사를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2. 작품은 신파인가

재난을 헤쳐나가는 육군 병사와 나름의 전쟁영화를 찍고 있는 공군의 이야기를 빼면 이제 병사들을 구출하려는 바다의 구조자 이야기만 남는다. 덩케르크 구출, 즉 다이나모 작전이 특별히 더 감동적인 이유는 수많은  (그 수가 많지 않다는 반박도 있지만) 영국의 민간 선박이 자원하여 전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덩케르크가 뺄셈의 미학을 보여주며 신파가 없는 담백한 영화라고 평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장하지 않는 한에서 감동 포인트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신파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놀란은 다이나모 작전에서 가장 신파적 요소라 할 수 있는 '민간 선박과 민간인 선장의 자원'을 영화 전면에 내세운다. 이름과 개인의 이야기가 가장 강조되는 것들도 바로 이 바다 플롯의 등장인물들이다. 엔딩에 나오는 신문 기사 장면 역시 전형적인 신파 요소 아닌가.

이런 감동 포인트에 화룡점정하는 것이 바로 엘가의 님로드다. 처음 나오는 부분은 영국의 선박이 해안가에 다다르고, 그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해군 중령이 무엇이 보이냐는 질문에 'Home'이라고 대답하는 부분으로, 이때 님로드의 선율을 길게 늘어뜨려 리믹스한 음악이 나온다. 원곡의 선율의 음표를 하나하나 매우 늘려놓긴 했지만, 처음 듣는 순간, 어라?? 이거 설마 노린건가? 싶을 정도로 분명하게 등장한다. 피날레에 다가가서 다시 이런 형태가 등장하더니 마지막엔 기어이 원곡의 선율이 그대로 연주된다.

이 점에서 덩케르크가 표현하는 것이 '영국뽕'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애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 음악이 등장하는 첫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 속 영웅적인 행위가 엘가의 음악을 통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영국인으로서 행동으로 부각된다는 건 자명하다. 클덕으로서, 그리고 이 곡에 사연이 있는 사람으로서 참 반가운 장면이었지만, 담백하다는 영화의 특징은 희석된다. 내게 이 장면은 대놓고 "울어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바 없었다. 예컨데 군함도와 같은 영화에서 누군가의 희생이나 영웅적인 행동이 있는 순간 애국가나 아리랑이 흘러나온다고 생각해보자. 슬로우모션으로 가족의 모습을 회상하는 장면 만큼이나 클리셰적이며 신파적인 연출이었다.



3. 어째서 시간대를 꼬았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직선적인 이야기이지만 놀란이 자신의 장기를 활용하기 위해 애쓴 구석이 보인다. 플롯 세 개의 시간을 재구성했다는 것이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된다. 일단 그런 시도 자체가 특별히 신선한 것이냐고 했을 때 확실한 답은 못하겠다.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에서 등장하는 여러 플롯들 역시 시간축은 다 꼬여있을 테다. 다만 각각의 사건이 시간의 길이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특별히 명시하지 않아서 그렇지. 시간의 순서가 뒤바뀌어있는 것 역시 신선할 것도 없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파수꾼>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을 뒤섞어 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해변에서 7일, 배에서 1일, 하늘에서 1시간이 서로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잘 표현해준다는 평을 보았는데, 완전히 반대다. 세가지 플롯이 모두 비슷한 시간으로 우겨넣어지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가는 것처럼 보이는 건 가장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는 해변의 보병들이다. 7일, 1일, 1시간은 그저 이들이 다이나모 작전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던 시간의 길이고, 실제로 영화 속에서 보병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는 것을 자막으로라도 보여준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의 시간 흐름이 서로 다르다는 걸 예고해주면서 말이다. 처음 7일이라고 안 써놨으면 보병들이 해변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인지 감도 못잡았을 것이다. 

이런 교차 편집에 대한 평은 갈린다. 이야기가 입체적이고 흥미롭게 변했다는 호평도 있지만, 그저 놀란의 교차 편집에 대한 강박일 뿐이라는 혹평도 있다. 이러한 방식이 놀란의 대표적인 스타일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이렇게 세가지 시간대를 꼬아놨다는 것 만으로 극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오페라 연출을 평가하더라도 연출가의 선택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바꾸어놓았고, 그래서 기존의 작품에 비해 어떤 감정적인 효과를 만들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이 세가지 이야기의 시간대가 꼬이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자. 교차편집되는 장면들이 대체로 같은 시간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려면 바다와 하늘의 이야기가 훨씬 앞뒤로 늘어나야한다. 예를 들면 도슨이랑 피터가 집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영국군이 덩케르크에 갇혔다는 뉴스를 듣고 있다던가, 파리어랑 콜린스가 같이 지도를 보며 작전 설명을 듣는다던가 말이다. 영화에선 그 장면들을 모두 삭제한다. 관객은 이들이 어떤 개인사를 가지고 전장에 들어왔는지 알지 못한다.

세 플롯이 만나는 장면도, 어떤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에 가까운 일이 되었을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 처럼 말이다. 우리는 각각의 플롯이 현재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히 알게 되고, 그들이 어떻게 만날지도 쉽게 예측했을 것이고, 당연히 만나게 될 것임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꼬아놓으면서 놀란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예컨데 이런 식이다. 파리어와 콜린스의 장면은 영화 전반부에서 항상 시간대에서 앞서간다. 그들이 출발하는 장면에서 바다 위에 요트가 하나 보인다. 별생각없이 보면 그저 하나의 요트, a yacht일 뿐이다. 하지만 도슨의 바다 플롯에서 스핏파이어 세대가 지나가는 장면을 통해 파리어와 콜린스가 보고 지나간 요트가 바로 도슨의 요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눈썰미 좋은 사람이면 모양 보고 바로 알아차렸겠지만, 놓친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 같다. 파리어와 콜린스가 기뢰제거선을 발견하고 보호하는 순간에 침몰하는 어선과 어선에서 탈출하는 병사들은 그저 전쟁의 한 장면일 뿐이지만, 육군 플롯이 그 시점까지 진행되면 그 어선에서 탈출하는 병사들이 바로 우리가 영화 처음부터 보던 병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특정 사건의 상황이나 원인을 나중에 가서 설명하는 것, 일종의 작은 반전과 같은 장치는 놀란의 특기다. 메멘토가 가장 전형적인 경우로,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이 앞서 보았던 장면을 다시 설명하는 단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같은 장치를 도슨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도슨은 엔진소리만 듣고 스핏파이어를 알아맞추고, 추락한 조종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며 엔진이 과열되도록 미친듯이 요트를 몬다. 관객은 나중에 콜린스와의 대화를 통해서야 도슨이 공군 파일럿이었던 큰아들을 잃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파리어는 콜린스가 해상에 떨어진 뒤에 손을 흔드는 것을 보지만 바다 플롯에서 콜리스가 손을 뻗은 것은 콕핏을 열어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드러난다. 

문제는 이러한 장치들이 메멘토에 비해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것이다. 메멘토에서 관객에게 점차 주어지는 단서는 사건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퍼즐과도 같다. 하지만 놀란이 시간차를 두며 던져주는 이 단서들은 덩케르크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아까 나온 요트가 지금 바다 플롯의 요트야. - 그런데 그래서?" 도슨의 행동 역시 그냥 구조정신과 인류애가 투철한 성격으로 돌릴 수도 있다. 그런 그에게 '전사한 공군 아들'이 있었다는 부연설명은 솔직히 좀 신파적이다.

이렇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서도 놀란이 이 시간축의 꼬임을 고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놀란은 이 영화에서 가급적 1인칭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독일군이 나오지 않는것도 이 때문이다. 전투기 장면에서도 그렇고, 육군 플롯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에 어선을 타고 빠져나오는 순간에도, 관객들은 이 어선이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했는지 전혀 눈치채기 어렵다. 배 위로 나와 바깥을 보지 않고서는 자신이 어디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세 가지 플롯을 보여주면서도 조금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이런 1인칭을 유지했을 때 관객 역시 각각의 인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저기 요트가 하나 지나가네. 하지만 이 요트에서 어떠한 특별한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콜린스는 자신이 저 요트 덕에 구출당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테다. 도슨의 요트 시선에서도 마찬가지다. 세 대의 스핏파이어가 지나가는 순간, 저 세대의 스핏파이어가 콜린스와 파리어의 비행기라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겠지만, 아마 그냥 '영국 전투기가 지나간다'라고만 느끼는 관객도 분명 있었을 테다. 각각의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모르는 타자다.

이 안에서 세 가지 이야기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 덩케르크 구출 작전에 임한다. 육군은 살아남으려 애쓰고, 선장은 구출하려고 애쓰고, 공군은 폭격기를 격추하기 위해 애쓴다. 파리어가 마지막에 연료가 떨어질 것을 감수하고 독일의 슈투카를 제압하려고 하는 이유는, 관객들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육군 주인공과 도슨의 요트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바다 위에있는 수많은 영국인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세 플롯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 슈투카의 추락에 바다가 불타오르는 장면에서 합일이 이루어진다.

놀란이 이러한 플롯 방식을 고집했을 때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각자의 플롯이 서로 교차하면서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을 강조하는 것도 염두해 두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영화를 두번째 보았을 때, 이렇게 지나가 듯 보여주는 장면들이 모두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에 파리어가 하늘에서 보았던 어선에서 탈출해 바다에 빠지는 병사들, 그저 전쟁의 한 광경만으로 보았던 그 병사들이 우리가 그렇게 땀을 쥐며 지켜보았던 병사들이라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리가 무심하게 바라보는 타인들이 그 자리에 있기 까지 어떤 과정과 이야기를 겪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주인공 토미가 어떻게 전쟁에 나가게 됐는지, 어떤 작전에 투입되었다 후퇴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다이나모 작전은 그 이름모를 영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 작전이었다. 놀란은 이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을 테다.

같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사도 있다. 영화 속에서는 영국의 보병들이 공군을 욕하는 대사가 두번 등장한다. 당시 보병들의 눈에는 영국 공군의 활약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독일 공군의 폭격이 있을 때마다 원성이 자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놀란이 이 대사를 넣은 것 역시 단순한 역사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대사가 이렇게 적은 작품에서 굳이? 이 대사는 탈출이 막 시작할 때, 그리고 탈출이 끝났을 때 등장한다. 보병들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이 직접 본 것만 알 수 있다. 자신들과 구출된 공군 파일럿이 어떠한 일을 겪었고,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그렇게 무사히 구출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른다.

이 작품에서 각각의 인물의 개인사가 최소화된 것은 많은 평들이 지적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것이 다이나모 작전 전체에서 개인의 역할을 줄여서 보여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인물의 개인사가 사라짐으로써 우리는 전쟁 속 어떤 군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잘 샘플링된, 표본을 잘 대표하는 아무개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기 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나친)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특별한 장치는 모두 이 메시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아쉬운 장면들

토미, 깁슨, 알렉스가 좌초된 어선에서 말싸움을 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놀란 식 딜레마를 보여준다. 이동진 씨의 평은 이 점을 잘 요약해준다. "너가 내리면 우리가 살 수 있어"라는 제로섬 게임을 주장하는 사람들, "한 명이 내려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라며 우리 모두가 살 방법을 생각해야한다며 논제로섬을 이야기하는 토미. 기차에서 살아돌아온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알렉스와 맘 편히 잠드는 토미의 모습은 이것의 연장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놀란이 자기 스타일의 장면을 조금 억지로 집어넣은 듯한 인상도 없잖아 있다. 그 장면은 결국 명확한 메시지나 흥미로운 갈등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린다. 생존은 불공평한 거라고 외친 분대장이나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생존왕 깁슨이 맞이하는 결말은 참 아이러니하다. 살아보려고 제일 발악하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재난영화의 클리셰가 작동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죽음엔 어떠한 규칙이 없어보인다는 느낌도 든다.



5. 아이맥스

놀란의 필름 아이맥스에 대한 고집은 지독하다. 이번엔 한술 더떠서 더 극단적인 화면비를 들고왔다. 덕택에 의도한 화면비를 짤리지 않고 볼 수 있는 극장이 용산 아이맥스밖에 없다. 당연히 용아맥 예매는 전쟁이었고, 새벽에 잠들기 전에 항상 핸드폰을 붙잡고 있어야했다. 잠깐 다른 것 하고 있는 사이에 오픈을 해버렸고 프라임존은 다 나가있더라. 하지만 좋은 자리를 구한 사람이 다른 날짜 취소할 거란 생각에 열심히 대기타다가 j열 프라임존 가장 사이드를 얻어 "친애하는" 여친님과 볼 수 있었다. 

울산, 전주, 왕십리 등 나름 큰 아이맥스를 몇번 본 경험이 있지만 용산은 확실히 규모가 남다르다. 특히 위아래로 꽉차있는 비율은 정말 특별하다.


아이맥스로 볼 때의 문제점이 있다. 먼저 대화 장면이 많은 순간에는 아이맥스로 찍지 못해서 (카메라 소음 때문인 듯하다) 일반 카메라로 찍은 화면이 나오는데, 비율도 그렇지만 색감도 너무 다르다. 아이맥스로 볼 때는 바다와 하늘이 참 파랗게 보이는데, 카메라가 바뀌는 순간 날씨가 완전히 칙칙하게 느껴질 만큼 색감이 확 바뀌어버린다. 주로 도슨의 요트 안에서 일어난 일과 해군 중령 (케네스 브레너) 장면에서 주로 일반 카메라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일반관과 장면이 다르게 편집 부분도 있다. 트레일러에서 슈투카 공습에 잔교의 보병들이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한 엑스트라의 어설픈 연기가 개봉 전부터 논란이 됐다.

일반관에서는 이 사람이 주춤 거리는 게 그대로 편집되지 않고 나오는데, 아이맥스 관에서는 이 순간 잠깐 항공샷으로 교체가 되고 다시 화면이 돌아올때는 모두가 이미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기억의 착각일까 싶지만, 개봉날 보러가기 전에도 이미 이 논란을 알고 주시했으니 틀리진 않았을 테다.

짐머가 쓴 음악과 효과음들이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다는 걸 아이맥스에서 체감할 수 있다. 영화관 우퍼 데모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만큼 저음이 시끄럽게 강조돼있다. 일반관에서는 느끼지 못한 저음의 광포한 진동을 느낄 수 있다.  전쟁의 포화를 표현하려 한 거겠지만 음악이 과하다는 평도 수긍이 된다.  



결론.

1. 한 가지 확실한 건 님로드 뮤직비디오로서는 아주 훌륭하다는 점이다. CG를 최소화하고 아이맥스 카메라로 담아낸 바다와 하늘은 님로드 듣기 참 좋은 배경화면이다.

2. 재난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내 취향에 그렇게 잘 맞는 영화는 아니었다. 도그파이트 장면 역시 재미없었다. 

3. 우주를 배경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인터스텔라는 바그너의 반지와 비슷한 작품이라고 평했던 적이 있다. 덩케르크는 육해공의 복잡한 작전 속에서 우리를 둘러싼 개인들의 다양하고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생각없이 지나치는 많은 사람과 사건들, 혹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우리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놀란의 말을 빌리면 그게 바로 '공동체'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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