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마지막 공연 후기가 <라 보엠>이다. 공연을 보기 전 시간을 내 원작 소설을 읽고 갔다. 공연 후기 쓰는 겸 책 이야기를 같이 쓰려고 했는데 내용이 길어져서 그냥 따로 글을 쓰기로 했다. 어느 정도 스포일러가 있는 글이지만, 번역서가 절판되었기 때문에 아마 직접 읽어보실 수 있는 분이 없을 것 같아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려고 했다. 어차피 이 글을 읽는 분은 대부분 오페라 <보엠>의 내용을 아실 테니 말이다.


여행 중에 무슨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저번에 읽다가 만 라보엠 원작인 <보헤미안의 생활정경>을 챙겨가기로 했다. 앙리 뮈르제의 이 소설은 독립된 단편을 엮어 모은 소설이다.


특유의 장황한 묘사나 비유에 익숙해지고 나면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조금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이 희극적인 이야기들이다. 길이로 치면 장편 소설이지만 단편 소설로 발표하던 것들을 엮은 것이라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 

소설의 초반부는 대체로 돈에 대한 것이다. 여자나 집세 때문에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을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활극이 펼쳐진다. 그리고 대체로 그 돈은 순식간에 탕진한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여자와 데이트하기 위해 고작 5프랑 빌리려고 갖은 애를 쓰던 로돌포가 마르첼로와 둘이서 500프랑을 일주일 만에 다 써버린다. 내일이 없는 인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후반부로 갈수록 각각의 연인인 무제타와 미미에 대한 에피소드가 늘어난다. 다투고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를 몇번을 반복한다. 귀엽고 사랑스런 장면들이 참 많다. 


오페라 <보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울 만한 내용들. 


- 로돌포는 대머리였다. 

첫 챕터에 나오는 묘사에 따르면 로돌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 중 젊은 사람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만큼 갖가지 색의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무성한 턱수염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였는지 젊은 나이에 머리는 마치 무릎처럼 휑한 대머리였다. 손으로도 셀 수 있을 만큼 몇가닥 되지 않은 머리털은 허옇게 드러난 맨살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그콜리네가 한껏 꾸민 로돌포를 보고 “포르투나 여신보다도 머리털이 없는 저 친구가, 저런 머리를?” 이라고 묻는다. 

턱수염은 무성한데 대머리라구요.....? 이런 느낌인가

생각해보니 이 묘사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앙리 뮈르제 본인.

  

작품은 작가의 삶을 반영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나;; 로돌포는 뮈르제의 오너캐였던 셈이다.


- 이 넷은 모뮈스의 개진상 손님들이었다.
이들의 만행을 열거하면 이렇다.
1 - 아침에 가서 카페의 모든 잡지와 신문을 챙겨와 저녁까지 읽음
2 - 자기가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를 카페가 구독하도록 반 강요
3 - 카페에 놓인 놀이기구를 하루 종일 점거
4 - 마르첼로는 카페를 자기 작업실로 사용
5 - 지출을 줄인답시고 커피 가는 기계를 가져와 카페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심 (!)
6 - 각자 애인들을 데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카페에 들렸는데, 이 애인들이 두시간 동안 끊임없이 식사와 술을 시켜댔다. 계산서를 받고나서 절망한 보엠들은 제비를 뽑아 주인과 협상을 하려 한다. 주인은 노발대발 하면서 콜리네와 여자들의 외투라도 담보로 잡히고 가라는 말을 한다 (이 부분이 아마 오페라 4막의 외투의 노래의 모티프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원작에서 미미의 병원비를 위해 쇼나르는 겨울옷을 팔고 콜리네는 자신의 책을 팔았다). 결국 돈을 내준 건 돈이 많은 다른 신사. 이 신사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이 보헤미안 서클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에 흔쾌히 대신 계산을 해준 것이다. 오페라 2막에서는 알친도로에게 계산서를 맡기고 가는 것은 이 장면이 변형이라 할 수 있다.


- 보헤미안 서클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모뮈스에서 밥값을 대신 내준 저 남자는 보헤미안 서클 4명 각각에게 심층 면접과 융성한 식사 대접을 통해 수습생 자격으로 서클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수습생 자격이 끝나고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파티 날에 생긴다. 파티랍시고 이 네명의 악당들은 꼭 검은 예복이 필요하다면서, 이 신입 신사의 집에 쳐들어가 옷과 신발을 빌려가버린다. 원래 처음에 구성원으로 승인할까 고민하던 와중에도 이 신사의 체격이 자기들이랑 비슷해 옷을 빌려 입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였다! 하지만 이 신사가 발만 유독 작았는지 콜리네와 마르첼로가 구두가 너무 작다고 괴로워한다. 이 때 하는 말이 가관 "이보시오 선생. 선생과 저는 아무래도 친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외형의 차이는 윤리적 불화의 척도가 되어왔습니다. 철학과 의학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선생의 신발은 제가 신기엔 너무도 치수가 작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헤미안 서클은 옷과 구두를 필요하면 언제든 서로 빌려입을 수 있는 육체적 공동체 까지 이루고 있던 셈이다. 

참고로 저 파티의 장소가 바로 신입 신사가 가르치는 젊은 자작의 집이었는데, 이 자작은 파티에서 미미를 보고 반한다. 그가 바로 미미의 나중 애인이 되는 폴 자작이다.

- 오페라 속 로돌포와 미미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은 다른 커플의 이야기에서 빌려왔다.

원작 <보헤미안의 생활정경>에는 총 23개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이 중 딱 한 이야기에만 새로운 주인공이 나온다. 가난한 조각가 자크와 그의 연인 프랑신느의 사랑 이야기다. 프랑시느가 촛불이 꺼져 이웃인 자크의 집에 들린 것, 나가려다 열쇠를 잃어버린 걸 알고 당황하다 결국 사랑에 빠지는 것, 프랑신느가 폐병에 걸린 것, 죽기 전에 팔토시를 사달라고 하는 것 등이 모두 프랑신느의 이야기다. 때문에 원작 에피소드 중 오페라 라보엠과 가장 비슷한 에피소드를 꼽으라고하면 바로 이 에피소드를 꼽을 수 있다.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희극적이나 이 에피소드 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인 분위기로 가득차있다. 시작부터 자크의 죽음, 그리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장례를 거부하는 자크의 아버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자크와 프랑신느는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았고 둘다 젊은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다. 

자크는 가난한 조각가의 삶을 살면서 매일 밤 외로울 적마다 권총을 바라본다. 권총을 잊기 위해서 아편이 섞인 담배를 흠뻑 피운다. 프랑신느가 촛불을 빌리러 자크의 집에 들어가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운 아편 연기 때문에 기절한다. 이후의 내용은 오페라와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르다. 촛불을 받은 뒤 돌아가려는데 촛불도 꺼지고 열쇠도 잃어버린다. 자크는 '달이 밝아올 때까지' 이야기나 나누자고 한다. 한창 이야기를 하다 달이 뜨고 방이 밝아진다. 먼저 열쇠를 발견한 건 자크가 아니라 프랑신느다. 아! 하고 자그마한 탄성을 내지르자 자크가 무슨 일인지 물어본다. 프랑신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열쇠를 테이블 밑에 숨기려고 애쓴다.

둘의 달콤한 연애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시피한다. 둘이 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자마자 프랑신느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자크의 친구인 의사는 프랑신느가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을 때면 저 세상 사람이 돼있을 거라고 말한다. 두 연인은 죽기 순간까지라도 사랑을 나누기로 마음 먹는다. 하루는 산책을 나갔다가 나뭇잎들이 점점 물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크가 깨닫고 사색이 된다. 그러자 프랑신느가 이렇게 말한다.

"왜 그렇게 바보 같아요! 이제 겨우 7월이잖아요. 10월까지 아직 삼 개월이나 남아 있다구요. 그때까지 매일 밤낮으로 사랑을 나눠요.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면 같이 사랑하며 보내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잖아요. 게다가 나뭇잎이 노랗게 물드는 것을 보고 혹시라도 제가 우울해할 것 같으면 우리 아예 소나무를 키워요. 소나무잎은 항상 초록색이잖아요."

결국 10월이 되자 프랑신느는 병 때문에 침대에 누워살게 된다. 이 때도 자크를 안심시키려 외출하자는 말을 한다.

"전보다 훨씬 나아졌어요. 며칠만 더 지나면 외출할 수도 있다구요.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요. 손이 빨갛게 어는 건 싫거든요. 그러니까 방한용 토시 하나만 사주세요."

의사가 자크에게 프랑신느가 곧 임종할 것이란 말을 하자 그 눈을 읽고서 이렇게 화를 낸다.

"그 사람 말을 믿지 마세요! 그 말을 듣지 마세요! 다 거짓말이에요! 우린 내일 외출할 거잖아요... 그런데 너무 추워요. 어서 가서 토시를 사다 주세요. 제발...! 손이 얼까 봐 걱정이에요. 꼭 토시를 사다주세요. 예쁜 걸로 골라주세요. 그리고 오래오래 쓸 수 있는 걸로요."

자크가 토시를 사러나가자 의사에겐 이렇게 말한다.

"의사 선생님, 이제 죽을 때가 됐나 봐요. 저도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하룻밤만 더 버틸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하룻밤만이라도 예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그리고 나서 죽을 수 있도록 뭐든지 해주세요. 신께서도 제가 더 오래 사는 건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자크가 토시를 사오고 기쁜 마음으로 토시를 받아 쓴 채로 프랑신느는 임종을 맞는다. 의사는 친구 자크에게 "용기를 갖게!"라고 말하고, 이 문장은 오페라에서 미미의 임종 때 마르첼로의 대사로 옮겨온다.

뮈르제는 이 토시를 두 사람의 사랑 에피소드에 가장 중요한 소재로 설정했다. 에피소드 제목 역시 "프랑신느의 방한용 토시"다. 오페라에서 미미 역시 죽기 전에 토시를 사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이 에피소드에서 기원했다. 다만 토시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원작에서만큼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도 오페라의 리브레토가 하나 더 포인트를 준게 있다. 손을 따뜻하게 해주는 토시를 1막의 "Che gelida manina, se la lasci riscaldar"와 연결했다는 점이다. 원작에서는 프랑신느의 찬 손을 잡고 따뜻하게 해주진 않는다. 반대로 오페라에서 1막에서 미미의 찬 손을 녹여준 것은 로돌포였고, 미미는 4막에서 죽기 전에 "Se avessi un manicotto! Queste mie mani riscaldare non si potranno mai?"(토시가 있다면! 제 손을 녹일 방법은 없을까요?") 라며 손을 녹여줄 것을 부탁한다. 로돌포는 미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다.


아주 어두운 에피소드이지만 뮈르제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두 연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화자에게 항의하는 독자를 집어넣는다. 이런 식이다. 자크와 프랑신느가 처음 만나 이야기를 하다 열쇠를 숨긴 부분이다.

그녀는 자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애타게 찾던 열쇠를 테이블 밑으로 밀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열쇠를 찾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이미 없었던 것이다.

독자1: 절대 내 딸아이가 이런 책을 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독자2: 아니, 프랑신느와 방한용 토시라더니, 지금까지 토시의 실오라기 하나 못 봤다고. 게다가 말이야, 그 프랑신느란 아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하는 부분도 없잖아. 금발이야, 갈색머리야?

아직까지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부탁하건대 제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기 바란다. 앞서 들려주겠다고 약속했던 방한용 토시, 자크가 사랑하는 프랑신느에게 선물해주었던 그 토시 이야기는 결말 부분에 등장하게 된다.


오페라 <라 보엠>에 나오는 희극과 비극의 공존은 <보헤미안의 생활정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다.


- 미미의 성격은 오페라와 원작이 크게 다르다.

원작과의 차이점으로 가장 잘 알려져있는 부분이다. 오페라 속의 미미는 순정파이지만 원작에서는 오페라 속 무제타와 비슷한 느낌이다. 

미미에 대한 묘사를 읽어보자. 

"22살의 젊은 나이, 자그마한 체구에 섬세한 성격에다가 애교도 만점이었다. 얼굴은 마치 상류사회에 막 진출한 여성처럼 우아해 보였지만 이목구비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교활한 면도 갖춘 듯하면서 파랗고 투명한 두 눈의 총기는 은은히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분 상태에 따라서는 야성적인 과격한 성격도 보였다. 아마 관상가가 봤더라면 그녀의 얼굴에서 극도의 이기심과 더없이 냉정한 성격의 전형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때에 미미가 보여주는 모습은 매혹적인 얼굴에 담긴 젊고 신선한 미소, 그윽한 눈길이나 애교가 넘쳐 흐르는 모습뿐이었다. 젊음을 상징하는 듯 그녀의 끓는 피는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면서도 순식간에 식혀버렸고, 하얀 동백꽃처럼 투명한 그녀의 피부를 연분홍빛으로 물들이곤 했다."

("하얀 동백꽃처럼 투명한 그녀의 피부"라는 표현은 <춘희>의 마르그리트(비올레타)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면 당시 프랑스 사회에 폐병으로 인해 창백해진 피부와 동백꽃을 연결시키는 것이 유행이었을 지도 모른다. 오페라 <트라비아타>와 <보엠>에는 20년 정도의 시간이 있지만 <춘희>(1848년)와 <보헤미안의 생활정경>(단편 1847~9년, 엮어서 출판 1851년) 은 완전히 동시대의 작품이다. <트라비아타>와 <보엠>이 비슷한 내용을 공유하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미미는 (당연하지만) 라틴어를 할 줄 모른다. 로돌포와 미미가 헤어진 뒤 마르첼로가 길 가던 미미를 만나면서 말다툼을 하다가 라틴어로 빈정거리니 "전 라틴어는 몰라요"라고 대답한다. 사실 라틴어 뿐만 아니라 맞춤법도 제대로 모르는 수준이다. 오페라 2막에서 로돌포가 미미를 친구들에게 소개했을 때 콜리네와 쇼나르가 라틴어로 환영하는 부분이 있다. 블로그 이웃 분이 이 장면이 미미를 격하게 환영하는 것 같지는 않는 것 같다며 재밌는 스레드를 소개해주셨다. 이들의 라틴어 문장이 이상하다거나, 혹은 성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해석이다. 책에서는 이런 부분은 따로 나오지 않다. 다만 자코사와 일리카가 마르첼로가 미미에게 라틴어로 빈정거리는 부분을 생각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 같다.

미미가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수준은 오페라 속 무제타와 비견될 정도다. 마르첼로가 미미를 약올리는 장면에서 재밌는 대목이 있다. 하루는 미미가 아주 아름다운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외출을 했다. 그 예쁜 모자를 자랑하자니 베일을 내려야하는데, 그러면 자신의 예쁜 얼굴이 가려지게 된다. 얼굴을 드러내자니 베일이 모자를 가리게 된다. 미미는 그 두가지를 모두 뽐내기 위해 열걸음은 베일을 내리고 걷고, 다시 열걸음은 베일을 올리고 걸었다. 이 정도면 중증이 아닌가 싶다.

미미의 이런 성격은 오페라 3막에 잘 나타난다. 로돌포가 마르첼로에게 미미가 다른 남자들에게 웃음을 흘린다며 분노하는 장면이 있다. 로돌포는 미미가 자작을 보고 치마를 걷고 유혹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마르첼로가 "Lo devo dir? Non mi sembri sincer."(그렇게 말해야하나? 정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라고 묻자 바로 태도가 돌변해 미미가 죽어가서 괴롭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 어색한 흐름은 원작 미미의 모습과 오페라 속 미미의 모습을 섞다보니 생긴 일이다.


- 무제타의 마르첼로 사랑은 의외로 한결 같다.

무제타가 오페라에선 돈 많은 알친도로를 뜯어내는 모습으로 나와 돈만 쫓아다니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제타는 그저 사랑을 쫓아다니는 사람일 뿐, 특별히 돈을 쫓아다니는 여자는 아니다.  물론 화려한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고 가난한 남자와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이 점에서 아베 프레보의 마농과도 많이 닮아있다. 오페라에서 처럼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전 남친 마르첼로가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고 당황하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성격도 아니다. 원작의 무제타는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마르첼로와 헤어졌다고 해서 마르첼로에게 실증을 느끼고 마음이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다. 

민중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왕족의 호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절대 그 색이 바래지 않는 아주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이처럼 화끈하고 정열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뮈제트는 절대 늙고 돈만 많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정부가 되어 달라는 요구에는 한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 그녀 자신이 항상 주장하듯 뮈제트는 정당한 게임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바랄 뿐이었다.

뮈제트는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세계에 반강제로 눌러붙어 지내야 했지만 행동거지만큼은 언제나 올바르고 정숙했다. 게다가 유일하게 읽을 줄 아는 것은 바렘므요, 쓸 수 있는 것은 숫자뿐인 멍청한 족속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사랑을 비굴하게 구걸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뮈제트는 지적으로, 영적으로 마농의 혈통을 타고난 출중한 여인이었다. 구속 앞에 절대로 굴하지 아니하며 애교 섞인 교태가 동하면 결과에 상관 없이 그 감정에 충실한 여인이었다.

"제 존재는 노래와도 같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제 마음의 사랑엔 1절만 있어요. 그리고 마르셀은 바로 그 후렴구에요"

사교계의 여왕이라는 점, 남편 따윈 만들지 않으며 자유로운 연애를 한다는 점에서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에 비유할만 하다. 오페라에서는 미미와 대비되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상당히 경박하게 만들어졌고, 갑자기 헤어진 애인을 보더니 카페에서 진상을 부리는 소동까지 일으키며 유혹하는 사람이 되었다. 소설 속 무제타는 전 남친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 마르첼로가 1막에서 그리는 <홍해를 건녀며>는 마르첼로가 매 전시회 마다 출품한 작품이다. 출품할 때마다 새롭게 고쳤는데, <루비콘 강을 건너며>라는 제목으로 바꿀 때는 파라오에게 시저의 망토를 덧그려주다가 심사위원에게 들켰다. 출품과 낙선을 반복하며 전시장과 작업실을 몇년 동안 왕복해서 "바퀴만 달아주면 저 혼자서도 루브르 전시장까지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결국 그 그림은 꽤 좋은 값에 팔려 가게의 간판이 되었다. 그림 위에는 증기선 한 척이 더그려져 <마르세이유 항구에서>라는 작품이 되었다.


- 로돌포가 땔감이 없어 자신의 희곡 원고를 불태우는 장면 역시 원작에도 있다. 원작에선 의자를 땔감으로 쓰느라 점점 의자의 다리가 짧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로돌포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무도회 용 꽃을 선물해주기로 약속하여 꽃값을 벌기 위해 묘비 문구 알바를 뛴다. 하룻밤새 긴 문구를 다 쓰는데 집이 너무 추워 희곡 원고를 불태우기로 한다. 보통 오페라 무대에서는 그냥 종이 몇장 불태우는 것으로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그 원고의 양이 무려 7킬로그램 이나 되었다고 묘사한다. 로돌포의 집 굴뚝에 연기가 나는 걸 보고 바람들이 충격을 먹고 "이게 꿈이야 생시야!"라고 말하고 돌아간다. 그렇게 고생하며 한겨울에 꽃을 선물해주지만 그 여자는 무도회에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 오페라 1막에 쇼나르가 돈을 벌어오며 자신의 '앵무새 죽이기' 알바를 설명해준다. 맥락이 없으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다. 소설 속에는 이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는데, 쇼나르가 자기 애인에게 옷을 사주기 위해서 알바를 하는 내용이다. 이 알바를 부탁한 사람은 한 영국 신사다. 이 신사가 이사온 집 아래에는 여배우가 한명 살고 있고 그 여배우는 앵무새를 한 마리 키우고 있다. 문제는 이 앵무새가 그 집에서 살면서 온갖 욕설과 외국어와 복잡한 내용의 이야기들을 배워서 조금도 쉬지 않고 발코니에서 떠든다는 점이다. 이에 이웃들이 노이로제에 걸렸으니 19세기의 층간 소음이라고 할만 하다. 이 앵무새를 죽이려고 하는 신사와 자신의 초대권을 공석으로 남겨버린 것에 분노한 배우가 서로 전쟁을 선포한다. 앵무새는 그때부터 영어 특별교습을 받아 온갖 영어 욕설을 시작한다. 신사는 집에 타악기 부대를 부르고 사격장을 만들더니 기어이 거실 전체에 물을 채워 바다처럼 만들어 밑에 집에 해수가 고이게 만들었다. 이 싸움은 파리의 명물 구경거리가 되고, 신사가 다음에 생각해낸 것이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가장 듣기 거북한 악기소리를 끊임없이 연주하는 것이었다. 쇼나르가 맡은 알바가 바로 이것. 쇼나르는 앵무새가 있는 창문에 파슬리 가루를 뿌려버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지만 새장이 창문과 떨어져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그리고 신사는 쇼나르에게 피아노를 매일 똑같이 아무렇게나 두드려달라고 부탁한다. 예술가에게 소음을 만들어달라는 알바라니! 하지만 쇼나르는 돈 때문에 그 알바를 수락한다. 오페라에서는 쇼나르가 하녀를 꼬드겨 앵무새에게 파슬리를 먹여 죽인다고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연주를 해 돈을 받았다는 말만 있고 그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 집주인 베누아의 바람상대였던 젊은 여자는 사실 쇼나르의 옛 애인이었다. 원작에서도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월세를 받아가려는 집주인을 마르첼로가 골탕먹이는 장면이 나온다. 와인을 권하며 유부남인 베누아가 몰래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그 여자가 바로 쇼나르의 옛 애인인 페미라는 걸 알게 된다. 괴로워하는 쇼나르를 옆에 두고 마르첼로는 당신같이 비윤리적인 사람에게 돈을 줄 순 없다고 베누아를 쫓아낸다. 


- 로돌포가 오페라 2막에서 미미에게 자랑한 부자 삼촌은 원작에서도 몇번 등장한다. 소설 초반 로돌포가 돈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 중 한명이다. 로돌포에게 자기 업적을 글로 남기게 하려고 감금해놓고 글을 쓰게 한다.


- 오페라 4막 초반부 로돌포와 마르첼로와 듀엣이 있다. 말로는 전 애인을 다 잊었다고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잊지 못한 두 남자의 모습이 잘 그려진 부분이다. 책에서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르첼로는 미미에 대한 감정 정리가 안된 로돌포를 꾸짖는다. 

"하지만 자네나 나나 이제 더 이상 그 여인들을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라네. 우리는 희생을 해서라도 우리만의 마농 레스코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일세. 멋지고 용감하고 낭만적인 데 그리외 기사는 젊은 데다가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의 놀림감이 되지 않았지. 스무 살의 나이면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의 여인을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스물 다섯이었다면 자신의 마농을 집 안에 가두고 지냈을 걸세. 생각이 있었을 테니 말이야. 우리가 아무리 둘러댄다 해도 우린 이미 그럴 나이가 훨씬 지났단 말일세, 이 친구야. 그런 시기는 예전에 다 지나갔지, 너무도 빨리 말이야. 우리의 마음엔 이제 금이 갔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단 말일세. 우리가 삼 년이 넘도록 뮈제트와 미미를 사랑하며 지내온 동안 우리 마음은 이미 시들고 지쳐서 쓰러져 버렸다네. 난 이제 그 사랑에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네. 그녀에 대한 추억과는 영영 이별을 고하고 그녀가 내 집에 올 때마다 남기고 간 물건들, 그녀를 생각나게 하는 그 물건들을 모아 모조리 저 난로 속으로 던져버릴 생각이네."

이 작품의 모든 연애사를 '젊은날의 치기' 쯤으로 치부하는 문장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추억이 깃든 물건을 꺼내 버리면서 마르첼로와 로돌포의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고 둘은 서로 몰래 한두개 쯤은 불태우지 않고 몰래 챙겨놓기로 한다. 로돌포가 태우지 않고 남긴 물건은 무엇일까? 오페라에서도 중요하게 나오는 저녁 나들이 모자다. 핑크빛이라는 말은 없지만 말이다.


- 원작에서도 미미는 폐병에 걸리고 죽기 전에 헤어진 전 애인 로돌포를 찾아온다. 계단을 오르는 데 1시간이나 걸린 병든 몸으로, 로돌포 옆에 여자가 있다면 뛰어내릴 생각으로 말이다.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죽어가던 미미가 로돌포를 보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은 <트라비아타> 3막을 떠올리게 한다. 피아베가 <보엠>을 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마르셀, 가엾은 로돌프를 잘 돌봐 주세요. 제가 그토록 모질게 했건만 지금 이렇게 절 다시 받아주었으니....! 오, 신이시여, 너무도 불공평합니다. 제가 로돌프에게 주었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시간도 허락하지 않으시다니...!" ...

"절 입원 시켜주세요. 아! 이젠 정말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요.  .... 병원에서 주는 약이라면 아무리 쓰다 해도 남김없이 다 먹을 거예요. 설사 죽음이 저를 데려가려 해도 끝까지 버틸 거예요. 거울 좀 주세요. 벌써부터 혈색이 도는 것 같아요. 이것 보세요! 맞아요. 벌써 얼굴에 핏기가 돌아요. 게다가 이 손도 좀 보세요. 벌써 살색을 되찾았잖아요. 로돌프, 저를 꼭 안아주세요. 하지만 절대로 마지막이 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용기를 내요, 로돌프."

<트라비아타>의 마지막 Rinasce!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신을 원망하는 부분은 <트라비아타> 3막 듀엣 O gran Dio!가 떠오른다.


미미는 병원에 입원하고 로돌포는 자주 병문안을 간다. 하지만 어느날 로돌포에게 미미가 죽었다는 편지가 간다. 로돌포는 그 편지에 넋이 나가버린다. 일주일 뒤, 병원의 인턴이 찾아와 그 편지가 실수였다고 말한다. 로돌포는 부리나케 병원에 달려가지만, 로돌포를 기다리던 미미는 이미 죽고 난 이후다. 

신파 영화에 나오면 딱일 것 같은 장치이지만 마음이 먹먹해진다. 


- 미미가 죽고 나서 1년 뒤 다들 성공한 예술가가 된다. 무제타는 옛 애인의 가정교사와 결혼한다. 결혼식 전, 무제타는 신랑에게 일주일 동안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다며 마르첼로도 한번 껴안아주고 와야겠다고 말한다. 마르첼로를 찾아 헤매다가 일주일 중 마지막 날에야 마르첼로를 찾아낸다.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낸다. 마르첼로는 그 일을 회상하며 로돌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마치 걸작을 잘못 베껴서 우스꽝스러운 졸작이 된 듯한 느낌이었네."




소설은 이외에도 귀엽고 재치있는 부분으로 넘쳐난다. 인터넷에서 '필력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문체라고 해야할까. 몇개 옮겨볼까 했는데 막상 옮기니 그 맛이 안 산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뜬금없이 말장난이나 유머가 나온다.

 <라 보엠>과 <보헤미안의 생활 정경>이 다소 다른 내용이다 하더라도 기저에 깔린 젊음과 예술,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무한한 낙관을 느낄 수 있다. 각각의 인물의 성격이 다르게 묘사되었다 하더라도 이야기 전체가 주는 능청스러운 분위기와 사랑에 대한 예리한 묘사는 소설과 오페라가 꼭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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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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