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센터 인천의 빛나는 세례식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보겠다. 요즘따라 해외 오케스트라 내한과 거리가 멀어졌다. 그 돈 아껴서 유럽 가는데 쓰자라는 마인드가 생긴 걸까. 예전보다 시간내기가 어려워지니 정말 끌리는 조합이 아니면 나와는 상관없는 소식이 되었다. 티켓 오픈 시간을 기다려 칼같이 예매한 게 언제적인가 싶다. 프로그램이 맘에 들면 지휘자가 맘에 안 든다거나, 지휘자 협연자 다 마음에 들면 기획사가 마스트미디어라던가...

여기에 조성진 역시 마찬가지다. 조성진이 정명훈과 함께 서울시향 첫 정기연주회 데뷔를 라벨로 했던 2009년 공연을 시작으로 해서 모차르트 20번, 베토벤 5번, 마젤과의 베토벤 4번, 플레트뇨프와 라흐마니노프 2번, 광주에서 차이콥 1번 등등 다양한 협연 공연을 보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건 쇼팽의 발라드 네곡과 리스트 소나타라는 거대한 프로그램으로 꾸렸던 IBK챔버홀 개관기념 리사이틀이었다. 그 리사이틀이 있고나서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이나 그뤼모 역시 리스트 소나타를 연주했지만 조성진 리사이틀 때의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날 리사이틀이 끝나고 운좋게 지인 찬스로 백스테이지 까지 가서 조성진에게 직접 인사할 영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쇼팽 콩쿨을 우승하고 난 뒤에 조성진은 평범한 애호가가 평범한 노력으로는 챙겨볼 수 있는 연주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멀어졌던 조성진과 해외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보러가게 된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째, 아내가 조성진을 좋아한다. 소설 <꿀벌과 천둥>을 읽고나서 조성진의 영상을 찾아보더니 팬이 됐다. 스스로 연주보단 얼굴을 더 좋아하는 '얼빠'라고 인정한다. DG 콘서트가 오픈했을 때에 부담스러운 가격 때문에 포기했는데, 아내는 왜 자기한테 말을 안 했냐고 따졌다. 이제 적당한 기회가 생기면 조성진을 핑계로 좋은 공연을 하나 보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째, 새로운 공연장은 언제나 궁금하다. 이 따끈따끈한 신상 공연장의 소리가 너무 궁금했다. 대구 콘서트 하우스가 새로 개관했을 때도, (리모델링 당시는 시민회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알펜시아 뮤직텐트가 처음 지어졌을 때도, 롯데 콘서트홀이 오픈했을 때도 재빨리 찾아갔다. 여기에 개관기념이라 재정지원도 빵빵한지 C석이 단돈 2만원! 인천이 꽤나 멀긴 하지만 아내와 함께 송도 나들이 가는 겸 토요일에 가보기에는 괜찮은 일정이었다.

 오픈 소식도 상당히 늦게 나왔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고 각잡고 대기하기 충분했다. 평소 예매에선 경험하기 힘든 "이선좌" 몇번에 당황하긴 했지만 다행히 예매에 성공했다. 잠깐 사이에 전멸한 좌석 상황을 보고 내가 참 빡센 경쟁에 뛰어들었구나 싶었다.


파파노와 산타 체칠리아는 솔직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지난 이탈리아 여행에서 이탈리아 오케스트라들의 대체적인 수준을 체험하기도 했고, 파파노는 이미 두번이나 보았다. 레스피기 같은 작품이라면 모를까 베토벤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파파노의 베토벤은 내가 알고 있던 파파노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주였다.


중국 쑤저우에 갔을 때 같이 간 랩 사람들이 송도에 온 것 같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송도에 와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넓은 도로, 즐비한 초고층 빌딩들, 그런데 사람은 없어. 아트센터 인천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지하철역(광역버스 정류장)과 공연장 사이에 푸르지오 상권이 있었다. 괜찮은 카페나 편의점, 식당들이 있어 공연 전에 시간을 보내긴 좋았다. 날씨가 좀더 좋았으면 바깥 구경을 더 많이했을 텐데, 꽤나 추워서 그냥 카페에 있기로 했다.


개인적인 잡설이 길었으니 연주 이야기로 바로 넘어가보자.

파파노의 음악은 근육질이다. 항상 기합이 들어가있어 밀도있는 소리라던가 폭발하는 투티는 좋다. 하지만 너무 근육질이라 너무 마음껏 후드려팬다. 런던심포니와 엘가 교향곡 2번을 듣고 쓴 후기를 다시 끌어와본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당황스러웠다. 파파노는 모든 부분에 온 힘을 쏟았다. 그게 문제였다. 엘가의 교향곡을 압도적인 파워 하나로 해결하려는 듯 했다. 투티가 나오면 시종일관 풀파워로 모든 걸 토해냈다. 런던심포니 수준의 오케스트라가 폭발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면 일단 귀는 황홀하지만 계속 듣고 있자면 도대체 이 음악은 어디로 가는 건가 싶은 연주였다. 투티 간의 격차가 없다는 것도 컸다. 포르티시모 투티에서 매번 풀파워로 연주했기 때문에 이거나 저거나 다 같은 투티로 들렸다. 뭔가 악장 안에서 딱 한번 황홀한 클라이막스가 있어야하는데 계속 사운드를 토해내니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렇게 쓰고나니 떠오르는 지휘자가 한명일다. 숄티, 엄청난 펀치를 날리지만 그 패턴이 뻔해서 지루하다. 파파노랑 숄티는 로열 오페라 감독을 맡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소오름....

베토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컨데 2번 2악장의 포르티시모 투티를 그렇게 진짜 조금의 힘도 아끼지 않고 시종일관 밀어붙이는 그 연주는 참 당혹스러우면서 신기했다. 일종의 뻔뻔함이라고 해야할까. 사람이 좀 뒤도 돌아보고 망설이기도 하고 예쁘게 다듬기도 해야할 것 같은데 파파노의 포르티시모에 그런 건 없다. 악보는 포르티시모, 나는 소리낸다 포르티시모. 2번 4악장의 클라이막스에서도 섬세한 크레셴도 같은 장치를 넣어주면 맛이 살 것 같은데 파파노 사전에 그런 조미료는 없다.

대편성으로 쉴새없이 파워펀치를 날리는 베토벤이라니, 내가 딱 싫어할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이게 평범한 올드스타일 베토벤은 아닌 것이 특이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올드스쿨의 느끼함이 적다. 파파노는 스타카토의 아티큘레이션을 분명하게 짧게 처리하고 전반적으로 비브라토 역시 상당히 자제했다. 예를 들어 5번 1악장의 리듬은 옛날 연주들에서 느껴지는 그런 중후함보다 날렵하고 재빠른 (그리고 재미없을 정도로 균등한 파워로 분배된) 펀치의 연속이었다. 피협 3악장 코다에서 아주 짧게 치고 나오는 플루트는 파파노식 아티큘레이션의 장점이 잘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이걸 절충주의 스타일이 묻어있다고 느껴지진 않는 것이, 선율 파트는 참 느끼하고 꾹꾹 눌러담아 연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5번 4악장에서 뿜어져나오는 호른의 선율은 마치 카라얀 마냥 부풀어 오르게 했다. 5번 2악장 변주의 마지막에 1바이올린이 1주제 선율을 포르테로 연주하는 총주에서 역시 엄청난 선율미를 뽐냈다. 그러니 담백함과 느끼함 사이를 오가는, 아주 독특한 별미가 됐다.

생각보다 이런 스타일이 듣기에 나쁘지 않았던 것이, 베토벤에서는 이런 끝없는 하이텐션이 나쁘지 않았다. 섬세한 드라마를 느끼거나 디테일들이 부각된 연주를 기대하기에는 별로였지만, 별생각 없이 파파노의 무한펀치 쇼를 구경한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즐길 수 있는 연주였다. 대체로 날렵한 베토벤들이 사랑받는 요즘에, 언더아머 단속반도 피해갈 순도높은 근육질로 승부하는 베토벤을 듣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니다. 파파노의 연주에는 '이렇게 너무 일방적으로 후드려패면 조금 지루하거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을까'라는 고민이나 망설임이 조금도 없다는 게 특별한 매력이었다. 그 뚝심 하나는 인정합니다.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는 그래도 역시 이탈리아 오케스트라들 보다는 탁월했다. 앙상블의 흐뜨러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곡임을 감안했을 때 이만하면 훌륭한 앙상블이었고, 관악 주자들의 기량도 탁월했다. 피협 1악장에서 바순과 오보에가 선율을 주고받고 피아노가 반주하는 장면에선 칸타빌레를 자랑하는 목관의 실력이 두드러졌다. 



조성진의 베토벤 협주곡은 4번과 5번을 들어보았고 3번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참 오랜만에 공연장에서 직접 듣는 조성진의 연주였다.

1악장에서는 균형감각이 빛을 발했다. 대체로 오케스트라와 주고받는 호흡이 세 악장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파파노의 반주도 좋았지만 조성진이 오케스트라에 반응하는 것 역시 재빨랐다. 단순히 오케스트라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반주 음형을 잘 연주했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주고받을 때, 조성진은 분명히 오케스트라의 표현에 반응해서 자신의 연주 색깔도 함께 이어질 수 있도록 조정했다. 파파노가 조심스레 프레이징을 끝맺음 했을 때 조성진이 그것을 같은 호흡과 조심스러움으로 이어받는 부분은 놀라운 장면이었다.

주제를 강조하는 섬세한 아고긱 역시 뛰어났다. 기억에 남는 부분은 1악장 카덴차 안에서 2주제로 넘어가는 부분이었다.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모르겠지만 2주제에 도달했을 때의 짜릿함은 평소 듣던 연주와 많이 달랐다. 2악장에서는 들어가는 듯한 프레이징, 멀어지는 듯한 프레이징을 적절히 혼합하며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후반에 처음의 선율로 다시 돌아갈 때 수비토 피아노로 분위기를 바꾸는 부분은 깜짝 놀랄 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3악장은 스케르초소로 연주하며 독특한 강세법을 선보였다. 이정도로 싱코페이션 악센트를 강조하는 연주가 있던가. 특히 1주제를 마무리하는 동일음 반복을 미묘하게 느려지며 음간격을 점차 벌리는 듯한 표현 역시 섬세하며 신선한 표현이었다.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테크닉, 오케스트라와의 교감, 그리고 대범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섞였다.

앵콜로는 모차르트 K332의 느린악장, 그리고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3번을 연주했다. 확실히 조성진의 느린 악장은 원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오른손과 왼손이 미세하게 어긋나며 만드는 뉘앙스는 절묘한 효과를 냈다.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내부. 출처 아트센터 인천 홈페이지


이날 멋진 연주만큼 빛나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아트센터 인천의 음향이다.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말하자면, 내가 이제껏 다닌 세계의 모든 공연장 중 가장 이상적인 음향이었다. 

먼저 음향은 사람의 취향을 많이 타고 또 앉은 자리에 따라 많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 이는 순전히 내 취향에 따른 판단임을 명확히 해둔다. 나는 울림이 심한 홀과 메마른 홀 중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메마른 홀을 꼽겠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오케스트라 연주의 디테일이 뭉게지는 것이 싫다. 오케스트라가 내는 거친 질감도 좋아한다. 또한 내가 활동했던 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이 건조한 편이니 나에게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을 테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쿠렌치스의 모페라 녹음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울림을 좋아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예당의 1층에 앉아서 만족해본 적이 없고, 오히려 합창석과 박스석이 만나는 그 언저리에서 듣는 소리를 좋아한다. 아람누리도 좋은 홀로 평가받지만 나에겐 너무 울림이 큰 곳이다. 롯데의 경우 돈이 없어서 아직 다양한 자리에 앉아보지 못해 특별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을 모티프로 했다는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은 울림덕에 음이 화사하게 들리지만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음향이 좋기로 소문난 산토리 홀에서 느꼈던 건 소리가 깔끔하게 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대단한 소리를 기대했다가 살짝 김이 샜지만, 특별한 왜곡이나 과장, 혹은 뭉개짐 없이 소리를 전달해주는 느낌이었다. 광주문화회관, 경기도 문화의 전당 같이 국내에서 흔히 보이는 양산형 공연장의 경우 거칠고 조악한 느낌이 들때도 있지만 목욕탕 울림보다는 이쪽이 더 낫다.

막상 적다보니 유럽에선 오페라 극장을 주로 다니느라 딱히 콘서트홀을 많이 가본 편은 아니다. 베를린 필하모니는 한번은 망치 뒤에서 듣느라 예외고, 2층에서 들었을 때는 무난했던 걸로 기억한다. 엘프필은 한번 뿐이었지만 성악의 딕션을 알아 듣기에는 울림이 좀 있는 편이었다. 파리 필하모니는 1층에서 들었을 때 성당울림을 듣고 기겁했지만 2층에서 들을 땐 적당히 무난한 느낌이었다. 루체른 KKL은 합창석에서나 1층에서나 적당히 고급진 울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베이징 NCPA는 적당한 울림이 감싸주는 느낌으로 기억하는데, 이건 그날 공연이 아바도 지휘의 루체른 페스티벌이었기에 공정한 비교는 어려울 것 같다. 샹젤리제나 리더할레는 얼빠석 1열 앉느라 음향 따위 공정하게 비교할 여유가 없다.

굳이 이런저런 홀을 쓴건 내가 들었던 어떤 홀에서도 이날 아트센터 인천 같은 소리를 못 들었기 때문이다. 묘사하자면 이 공연장의 음향의 포커스가 내 자리에 맞춰져있어, 마치 망원경의 렌즈를 통해 멀리있는 물체가 바로 내 앞에 있는듯한 착각을 주었다. 3층 저 멀리서 듣고있는데, 절대 이 거리를 뚫고 나올 수 있는 소리가 내 앞에서 들렸다. 정확히는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천장과 옆의 벽면에 반사되어 들리는 것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요새 돌비 애트모스에서는 천장에서 나는 소리도 만드는데, 정말 음이 위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저 밑에 있는데 말이다. 워낙 말도 안 되는 경험이라 공연 중 몇번을 눈을 감고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심지어 악기의 소리가 맺히는 위치가 실제 오케스트라 배치와 달랐다. 예를 들어 바순소리는 다른 관악기보다도 더 왼쪽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이처럼 각 악기의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고 크게 들려 마치 최고의 톤마이스터가 녹음한 음원을 듣는 느낌이었다.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의 원칙에 이렇게나 벗어난 음향은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1부에서 깜짝 놀랐다가 진정하고 2부에 다시 들어갔을 때는 두번 놀랐다. 첫 째로 문이 열리고 단원들이 입장하면서 낸 웃음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화들짝 놀랐고, 음향에 적응했다 생각했지만 베토벤 5번이 시작했을 때 그 말도 안되는 소리 크기와 명료함 때문에 두 번 놀랐다. 무대 위에 있는 모든 소리가 자연증폭되는 느낌이었다.

반향에서 가장 큰 파트를 차지하는 게 아마 무대 바로 위쪽과 뒤쪽의 벽이었을 텐데, 그 때문인지 피아노 소리는 오케스트라 만큼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피아노가 무대 가장 앞쪽에 위치한 상황에서 반사판이 소리가 천장이나 뒤쪽으로 뻗는 걸 막기 때문이었을 테다. 만약 다른 악기였다거나, 아니면 리사이틀이라 피아노가 중앙에 있었다면 좀 더 소리가 괜찮게 들렸을 테다. 피아노 소리가 아쉽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오케스트라가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서였지, 일반적인 홀 3층에서 듣는 피아노 협연과는 비교도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잘 들리는 편이었다.


어떻게 소리가 그렇게 클 수 있을까 기초적인 음향학 지식으로 생각해봤다. 간단하게는 벽에 반사되어 오는 소리의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 연구실 과제 때문에 공연장 음향 측정을 간단하게 했던 적이 있는데, 스피커를 무대 앞쪽에 놓는 것보다 뒷쪽에 놓을 때 소리가 더 크게 잡혔다. 듣는 사람과 소리의 시작이 가까워질 수록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실제론 반향이 얼마나 모일 수 있는가에 따라, 거리가 멀어져도 소리가 크게 들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벽에서 소리의 반사율이 높아질 수록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잔향은 길어지게 된다. 나에게 직접 전달되는 음과 오랜 길이를 반사되서 도달한 반사음이 비슷한 크기로 내 귀에 들린다면 에코가 심한 것으로 들릴 것이다. 이게 보통 공연장 1층에서 잔향이 길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다. 직접음의 도달시간은 짧은데, 소리 크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사음 중 천장을 치고 돌아오는 음들이 도달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날 아트센터 인천에서는 에코가 심해서 생기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5번 2악장 후반부에서 첼로와 베이스의 반주의 리듬( '---/- - /- - )이 이렇게 명확하게 들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치 근접 녹음을 해논 걸 듣는 것 처럼 활질 소리까지 전달됐다. 내가 3층에 앉아 있었는데! 

이 말인 즉슨 반향의 크기가 상당히 큰데, 대부분의 반향이 직접음과 비슷한 시간대, 혹은 과하지 않은 시간 차로 내 자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초점이 잘 맞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자리에선 이 강렬한 반향이 어떻게 떡질지 알 수 없다는 거다.


궁금해서 조성진 갤러리에 올라온 후기들을 읽어보니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나와 비슷한 자리에 앉은사람들은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 '왼쪽 오른쪽 밸런스가 안 맞았다'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 역시 옆면의 벽에서 오는 소리가 더 크다보니 좌우 밸런스가 다른 점은 있었지만, 장점에 비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1층 앞쪽에 앉은 사람들의 후기 중에는 '관악기가 뒤에서 들리는 듯 했다', '막이 한겹 씌어진 느낌', 오른쪽 합창석에 앉은 사람은 '울림이 심했다', 2층 중앙블럭 '많이 울려서 뭉개짐' 등등이 있었다. 1층 앞쪽 오른쪽 블럭에서는 오히려 좋았다는 후기들이 있다.


즉 이 홀은 반향이 세서 자리 마다 음향 편차가 상당히 큰데, 3층이나 사이드 처럼 벽이나 천장과 가까운 곳일 수록 음향이 좋게 들린다. 좋은 공연장의 조건이 모든 좌석에서 어느정도 균등한 음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아트센터 인천은 부족한 점이 많을 거다. 하지만 특정 Sweet Spot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 크기와 명료함을 자랑한다. 우습게도 이 스윗 스팟이 전통적인 좌석등급과는 전혀 상관없이 잡혀있다는 셈이다. 설계하면서 3층 꼭대기 사이드에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추진 않았을 텐데, '대륙의 실수'라고 불리는 중국산 이어폰마냥 의도치 않은 결과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아트센터인천의 3층 사이드는 예당의 어떤 자리보다도 명료하고 선명한 음향을 들려주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계속 이자리를 최저등급으로 책정할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자리야 말로 국내 최고의 음향을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볼 수 있는 궁극의 가성비 좌석이 될테다. 물론 좌우 기묘한 밸런스를 고려해야하겠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추천할 수 있는 자리다. 

내가 앉은 자리를 구체적으로 쓸까도 했지만 굳이 경쟁자들을 더 불러모으고 싶지 않다는 사악한 탐욕이 차올라 그냥 3층 사이드 였다는 것만 말해야겠다. 3층 사이드 블럭이면 대체로 다 비슷한 소리를 들려줄 것 같은데, 굳이 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으니 이번에 앉은 자리를 다음에도 똑같이 예매할까 한다. 메모해두세요 아트센터 인천은 3층 사이드가 진.리.

다른 자리 한번도 더 앉아보지 않고 어떻게 저런 소리를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 강렬한 반향이 이렇게 명료하게 모여드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여기서 음향 환경이 조금만 틀어져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못할 거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물론 오케스트라의 배치나 이후 아트센터 인천의 음향 튜닝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을텐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주 찾아가고 싶다.



베토벤 5번이 끝나고 관객들은 미친 듯이 환호성을 보냈다. 파파노 역시 그런 환호는 들어보지 못 했을 거다. 과연 앵콜은 뭐가 나올까? 인터미션 때 분명 큰북을 꺼내놨는데 막상 2부를 시작하니 다시 사라져있었다. 큰북은 언제 다시 나올까? 큰북을 뺀다는 건 님로드부터 해주겠다는 걸까? 

파파노가 말을 시작했다. 마이크도 없이 편안하게 말했지만 기적같은 음향으로 내 앞에서 말하는 듯 토씨하나 빼먹지 않고 명확하게 들렸다. 당장 이 환경에서 영어 듣기평가를 해도 될 만큼 명료하게 들렸다. 한국에 처음 오는 것이고, 이렇게 환호해주셔서 감사하고, 자신들의 공연이 이 멋진 공연장에 적합한 세례가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인천에 좋은 일이 가득하길 바란다 같은 내용으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캬 파파노 기분 좋은가보다. 이거 앵콜 하나가 아니라 두 세개는 나오겠구만ㅋㅋㅋ 큰북은 아직 안 나왔으니 님로드 - 이발사 - 윌리엄텔 정도로 해주나요???


이렇게 김칫국 세사발 쯤 들이키고 있는데 파파노가 밥먹어야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퇴장했다. 네?? 아니??? 과과노야 이건 아니지? 저렇게 립서비스 다 해주고 퇴장하는 건 어딨습니까ㅠㅠ 설레게 하질 말던가ㅠㅠ 팬심 인증은 티켓과 음반으로 하는 거고 감사 인사는 앵콜로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물론 1부가 시작 지연 포함해서 1시간 40분 쯤 걸렸고 5시에 시작했지만 2부가 끝났을 때 7시 40분쯤이었으니 정말 늦은 시간이긴 했다. 그래도 이번엔 사인회도 안 하고 한국 투어 마지막이고 인천 개관 기념 공연이고 환호도 이렇게 열심히 보냈는데 앵콜 한곡은 해줄 줄 알았지ㅠㅠ 다른 건 모르겠고 파파노가 지휘하는 이발사 서곡을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흑흐그흐긓ㄱ


아쉬움이 남았지만, 조성진의 연주를 직접 듣고 걱정없이 질주하는 베토벤을 마음 편히 들을 수 있었다는 데에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음향을 경험한 건 앞으로 오랫동안 기억할 테다. 다음에도 좋은 공연이 있을 때 꼭 찾아오고 싶다. 이번에는 공연장을 둘러볼 시간이 없었지만 뷰가 상당히 좋아서, 송도가 가득 찬다면 감히 한국의 엘베필하모니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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