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의 마스터피스.

무인도에 가져갈 음반? 같은 가정을 하나 해보자. 쿠렌치스의 모든 레퍼토리 중 딱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무엇을 남겨야하나. 다른 레퍼토리는 모두 다른 여러 음반들로 대체할 수 있다고 치자. 차이콥 6번과 말러 6번을 잘했지만 수많은 다른 명반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테다. 봄제 역시 굳이 쿠렌치스가 아니더라도 개성있고 뛰어난 연주들이 있다. 다 폰테 삼부작이 떠오르지만, 절정의 가수들이 있는 다른 음반들이 아쉬울 때가 있을 테다.

오늘 연주를 듣고, 도저히 다른 지휘자로 대체할 수 없는 쿠렌치스 스러움의 절정에 있는 것은 바로 모차르트 레퀴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공연 보기 전엔 걱정이 많았다. 첫날 라모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둘째날은 8열에서 봤으니 음향이 더 나았지만 이 날 공연은 1층 가장 뒷열이었다. 예매를 늦게한터라 얼빠석은 커녕 천장에 다 가리는 음향고자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쿠렌치스라고 해도 열악한 홀에서 열악한 자리까지 감동을 던져줄 수 있을까. 비록 잘츠부르크 펠젠라이트슐레에서도 연주했지만 과연 내가 연주의 감동을 이 음향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을까 불안했다.

여기에 아무리 모퀴엠이 특별한 곡이라고 해도 그렇지 40분 짜리 곡 딱하나 하는건 좀 너무하지 않나. 음반에 커플링 안시킨 것은 그려려니 하지만 공연장까지 와서 모퀴엠 한곡만 듣고 간다니 아쉬웠다.  이 짧은 공연을 보겠다고 내가 이 멀리 까지 와야했을까.  

쿠렌치스 모퀴엠 음반의 러닝타임은 46분 32초. 공연 시작 시간은 오후 5시인데 종료 예정 시간은 6시 15분. 무언가 곡을 더 한다는 뜻이었다. 또하나 궁금증이 든건 출연진에 무지카 에테르나 비잔티나가 있다는 점이었다. 무지카 에테르나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이름을 바꿨나? 페테르부르크랑 비잔틴이랑은 무슨 연관이지…

첫번째 궁금증은 공연이 시작하면서 풀렸고 두번째 궁금증은 라크리모사와 아멘 푸가 사이에 알게됐다. 레퀴엠 시작 전, 그리고 라크리모사와 아멘 푸가 사이에 중세 성가를 백스테이지에서 불렀다. 시작 전에 부른 성가에서는 무지카 에테르나 합창단도 껴있어서 합창단 단원들이 시작 전에 밖에서 성가를 부르고 그 다음에 무대에 입장한 줄 알았는데, 라크리모사가 끝난 뒤 아무도 퇴장하지 않았는데 무대 뒤편에서 성가가 들려왔다. 이 성가를 부른 단체가 바로 중세 성가를 전문적으로 맡기 위해 쿠렌치스가 만든 무지카 에테르나 비잔티나였다. 

단원들이 모두 입장하고나서 불이 꺼졌다. 그러더니 무대 뒤편에서 아카펠라로 그레고리안 성가 풍의 선율로 Dona eis pacem이 들려왔다.  떠올려보면 10분 가까이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레퀴엠을 준비할 수 있었다. 감기 환자가 많던 객석의 분위기를 바꾸는데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때 쿠렌치스는 이미 나와있었고 바로 입당송을 시작했다. 뒤에서 노래부르던 테너 단원들이 조용히 다시 입장한다.

 

합창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숨이 막혔다. 내가 클래식을 막 듣기 시작했을 때 부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시작으로 해서 묘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이 작품을 들어왔지만 이 작품의 무게를 마음 깊이 받아들여본 적은 없었다. 이제서야 내가 왜 그렇게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망정 매료되어 서성였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껏 클래식을 들어온 여정이 오로지 이 공연으로 이끌린 것이라는, 운명론적인 생각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나는 여기에 와서 이 공연을 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라고 말하면 허무맹랑하게 들릴 게 분명하지만 이 순간 내 감정을 묘사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눈물이 모두 마를 때 까지 울 수밖에 없었다.

 

쿠렌치스는 아우라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모든 단원의 복장을 사제복으로 맞춘 것, 그리고 아카펠라 성가를 넣어서 교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 모두 오늘 공연을 특별한 체험으로 만드는데 필요한 장치였다. 어째서 1부 없이 레퀴엠만 하는 것인가 하는 투정도 부릴 수 없다. 이 공연은 온전히 레퀴엠을 위한 것이었고 여기엔 다른 것이 붙을 수가 없었다. 

 

압도적으로 완벽하다. 완벽하게 압도한다. 철저한 준비에 아우라와 기세가 더해졌다. 레퀴엠의 음표를 어떻게 살려낼지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해놓고 소리를 뽑아냈다. 오케스트라 음표들은 이제 반주를 넘어 합창단과 동등한 위치에 나왔다. 교회의 성가를 가져다 붙였지만 쿠렌치스가 이 레퀴엠에서 지향하는 사운드는 교회의 울림이 아니었다. 음표들이 서로 섞여서 혼탁해지지 않고 알맹이 하나하나가 오롯이 전달되야 했다. 성당 울림에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음표를 드러냈다. 시대연주가 보편화되었지만 합창음악에서, 특히 레퀴엠에서의 교회울림은 쉽게 벗어던질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 레퀴엠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자신의 피부와 근육과 뼈를 드러냈다.

키리에 푸가의 16분음표 멜리스마를 뭉게지 않고 포르타토로 명확하게 내는 것은 해석의 취향을 떠나서 기술적으로 경이로운 성취다.  모든 프레이즈에는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베네딕투스에서 울려퍼지는 금관의 삼연음의 가운데를 짧게 끝는 변칙과 같이 어디 하나 허투루 흘러보내는 음표가 없었다. 포르테와 대비를 이루는 피아니시모는 종종 속삭이는 듯한 수준까지 조용해졌다. 신 앞에서의 겸손함이 마음으로 느껴졌다. Rex를 외칠때 깔끔하게 울리는 치경전동음 R, 도미네 예수에서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현악기, 그리고 무엇보다 푸가 패시지가 나올 때마다 각각의 성부가 명징하게 구분되어서 튀어나오는 모습까지 어느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게 없었다. 악보의 음표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정도로 부족하고, 레퀴엠의 음표들이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쿠렌치스를 기다린 것 처럼 느껴졌다. 이 악보는 이렇게 연주되어야만 한다를 넘어서 이렇게 연주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는 듯 완벽하게 확신에 차서 완성된 해석이었다. 

 

공연을 보고나서 욕심이 사라졌다. 이걸 봤으니 이제 다른 공연들을 욕심 없이 놔주고 (공연에 대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 괜찮을 같다. 내가 본 공연 중 가장 흠없이 완벽한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또 사인을 받으러 기다렸다. 전날도 받았지만 그래도 모차르트 레퀴엠 음반과 LP에는 꼭 공연보고 난 뒤 받고 싶었다. 관객 수도 전날에 비해 많았고 또 공연이 끝나도 오후 7시가 채 안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인을 받으려고 백스테이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카우프만의 파리 리사이틀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으로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과연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찰나에 낯이 익은 아저씨가 보였다. 바로 작년 슈투트가르트 말러3번이 끝나고 사인받으려고 같이 둘이서만 기다리게 되어 알게된 독일 아저씨였다. 그러고보니 바덴바덴을 처음 이야기 꺼냈던 것도 이 아저씨였으니 역시나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여태 해외 나가면서 한번 본 인연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는데 참 반가운 일이다. 이야기 나누니 공연을 본 건 아니고 근처에 일이 있다가 사인이라도 받으려고 들렸다고 한다. 글고보니 이 아저씨는 슈투트가르트 공연 매번 볼 수 있을텐데... 공연 이야기를 하면서 어제 공연에 비해서 오늘 공연은 기립박수가 덜 나온 편이었다, 근데 이게 뭐 레퀴엠이라서 사람들이 박수를 안치는 거냐, 한국 사람들은 레퀴엠이나 수난곡 끝나고 기립박수나 브라보를 외치면 안 된다고 배운다라니 아저씨가 요새는 독일에서도 그런 거 잘 안챙긴다고 답해주셨다. 최근에 본 공연 중에는 그뤼모 리사이틀이 참 좋았고 얼마 뒤에 파스벤더의 가곡 리사이틀을 보러간다고 자랑하시더라.

사인을 안해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전날과 마찬가지로 절대 사진을 찍지 말아달라는 이야기와 함께 줄을 서서 사인을 받았다. 출국하기 전에 사인을 받을 생각으로 풍월당에 가서 앨범 몇장을 사왔는데 마침 레퀴엠 엘피 한정판이 입고됐다고 해서 앨범을 사왔다. 쿠렌치스 처음 덕질하던 당시에는 CD를 더 이상 안 사고 아이튠즈로만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당시는 애플 뮤직도 없었다) 그때 다 사놨어야 하구나 후회하고 있다. 알파에서 새로 내놓은 음반 재킷들이 너무 평범해졌기 때문이다. 엘피의 경우 CD 오리지널 커버에 사용된 그림을 그대로 전면에 활용했는데 테두리가 없어져서 이전 모습보다도 더 예쁘게 잘 나왔다. 예쁜 그림이 인쇄된 커버를 4만원 주고 샀더니 안에 무슨 검은 원판같은 것도 껴주던데 그건 무겁기만해서 그냥 집에 두고 본체만 들고 출국했다.

모퀴엠 CD를 내밀었더니 이 재킷 마음에 안 든다고, 내가 고른 게 아니라고 말했다. 나도 동감이라며 엘피를 내밀었더니 이게 바로 자기가 선택한 그림이라며 매우 흡족해했다. 여러분 역시 사인 받으려면 LP입니다. 꼭 잊지마세요. 사인받으면서 레퀴엠 음표들이 당신을 기다려온 것 같다고 말하니 웃으며 고맙다고 See you in Seoul이라고 작별인사를 건네줬다! 


사인을 받고나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마침 내 앞에서 사인을 받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이야기를 길게 하는 걸 봐서는 한두번 따라다닌 정도가 아닌 진성 빠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였다. KLM 직원으로 일하면서 쿠렌치스 보러 여기저기 다니시는 분인데 최근에 무지카 에테르나가 페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이야기로 시작하시더니 단원이 많이 바뀌어서 라모를 잘 못했을 거다, 상트 말고 베네치아도 후보지라고 한다, 2020년에는 잘츠부르크에서 돈 조반니를 할거다 등등 확실히 정보력이 남다른 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모차르트 레퀴엠 연주 마음에 들었냐고 묻더니 자기는 별로였다고 교회음악 같이 경건한 맛이 없었다며 쿠렌치스 팬이라고 해서 쿠렌치스 모든 해석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말했다. 뭐 그것도 맞는거지만 오늘 보여준 모습은 쿠렌치스의 에센스 같은 거라 그걸 안좋아하면서 쿠렌치스 팬이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가긴 했다. 이야기 하다가 나에게 두다멜 아냐고, 자기는 두다멜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다. 베를린에서인가? 두다멜 공연을 보고 백스테이지에 있을 때 쿠렌치스를 마주쳤는데 (이 말이 쿠렌치스가 두다멜을 보러 공연에 갔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도 못 알아보더라 뭐 이런 이야기였다. 두다멜이 젊고 에너지 넘친다고 좋아하신다는데 도대체 쿠렌치스와 두다멜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내가 모르는 두다멜의 매력 같은 게 있나 고민하며 두다멜 음반을 조금 들어보다가 그냥 포기했다. 같은 팬이라고 해서 취향이 비슷한 건 아닌가보다.


이 공연을 보는 데 모든 운을 대출받았는지 다음날 끔찍한 불운이 터졌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침일찍 바덴바덴에서 출발했는데,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가는 기차가 취소된 것이다. 연착도 아니라 그냥 취소였다. 다음 기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늦었다. 비행기표는 취소고 교환이고 아무것도 안되는 상황. 그냥 기차타고 쭉 네덜란드까지 올라가는게 더 싸고 빠를 것 같아서 새로 티켓을 샀다. 하지만 이 날 독일에서 무슨 일이 생긴건지 모르겠지만 도이체반은 도통 나를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기차가 도착해서 탔는데 거의 1시간 가까이 기차역에 머무르고 있더라. 결국 뒤셀도르프에서 환승해야하는 버스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기차역 사무소에 가서 "내가 오늘 아침에 기차가 캔슬돼서 비행기를 놓쳐서 새 티켓을 끊었는데 그 새 기차도 지금 연착돼서 버스를 놓쳤거든요...? 새 티켓으로 바꿔주실래요?" 라고 말하는데 무기력함과 짜증이 몰려오더라. 그렇게 세번째 환승을 하는데, 삼연벙이라도 당하는 것 처럼 그 열차 역시 네덜란드에서 문제가 생겨 경로를 바꿔 돌아가는 바람에 30분도 넘게 지연되었다. 결국 그날 700km정도를 기차로 움직여 숙소를 나온지 12시간 만에 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독일 기차를 믿지 마세요.........

 

See you in Seoul!

오늘 2월 24일은 쿠렌치스 생일이다. 원래 내한 기념 + 생일축하로 한국 팬덤의 전통인 생일축하 지하철광고라도 내볼까 했는데 2월 내내 정신이 없었다. 제발 내한 취소 안되게 해주세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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